2022년 7월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조 바이든 대통령과의 영상통화에서 미국에 220억달러를 투자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자 바이든 대통령은 최 회장의 영어 이름 '토니(Tony)'를 호명하며 "생큐, 생큐, 생큐"를 연발했다.

반도체·배터리·바이오 등에 대한 투자 약속은 미국의 공급망 강화를 내건 바이든의 정책에 딱 들어맞았기 때문이다.


2025년 3월에도 비슷한 장면이 연출됐다.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이 미국에 제철소 건립과 자동차 생산시설 확대 등 210억달러를 투자하겠다는 계획을 밝히자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역시 "생큐"를 외쳤다.

"위대한 기업"이라고 치켜세우기도 했다.


두 대통령의 접근 방식은 달랐다.

바이든은 '보조금'이라는 당근을, 트럼프는 '관세 폭탄'이라는 채찍을 들었다.

그러나 궁극의 목표는 같다.

한국 기업을 미국 경제의 한 축으로 끌어들여 자체 생산 역량을 강화하고 일자리를 창출하겠다는 것이다.

그 미소 뒤에는 철저한 자국 이익 극대화 전략이 숨어 있다.

미국 대통령들의 외교적 수사가 편치 않은 이유다.


한국 기업들의 대규모 미국 투자 단행은 겉으로는 화려한 성공 서사처럼 보인다.

물론 그런 측면도 있다.

현대차가 미국에 쇳물부터 자동차 완성까지 일괄 생산 체계를 구축하는 것은 한국 기업의 존재감을 보여준 일이다.

하지만 이는 관세전쟁을 방어하려는 고육지책이자 글로벌 시장에서 생존하기 위한 절박한 몸부림이다.


미국 통상정책 변화에 기업들이 이렇게 현지화와 선제 투자 전략을 꺼내며 종종걸음을 치는 것은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의 숙명일지 모른다.

미국 시장에서 경쟁력을 유지하고 글로벌 성장을 이어가기 위해선 다른 선택지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투자 보따리를 안겨도 상황이 우리가 예상한 대로만 흘러가지는 않는다.

SK와 삼성전자는 바이든의 보조금을 기대하고 미국에 투자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반도체과학법 폐기를 언급하면서 보조금 지원이 불확실해졌다.

현대차는 관세 태풍이 몰아치기 전에 대미 투자로 방파제를 세웠지만, 미국이 곧바로 외국산 자동차에 대한 25% 관세를 발표하면서 타격을 피할 수 없게 됐다.

현대차·기아는 지난해 한국에서 생산한 102만대를 미국에 수출했는데, 미국 생산량을 늘리더라도 50만~70만대는 관세 영향권에 남기 때문이다.


특히 트럼프의 경제 정책은 유난히 변덕스럽다.

자국 이익 극대화와 정치적 계산에 따라 언제든 뒤집힐 수 있다.

게다가 관세전쟁은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한국이 미국의 10대 무역 흑자국인 만큼 더 큰 파도가 덮쳐 올 가능성이 크다.

당장 2일 발표될 상호관세를 앞두고 국내 산업계는 노심초사하고 있다.

미국의 압박이 강해지면 자동차, 철강에 이어 반도체, 배터리 등 한국의 핵심 산업이 줄줄이 미국행을 선택할 가능성도 있다.

그럴 경우 한국 제조업 공동화와 일자리 감소가 가속화될 수 있다.

국내 산업 생태계를 지키는 게 시급하지만, 기업 환경은 여전히 열악하다.

기업들이 관세전쟁을 피해 해외로 나가는 데는 국내 규제 환경 영향도 작지 않다.


관세전쟁은 기업이 개별적으로 맞설 수 있는 싸움이 아니다.

정부가 전략적 대응에 나서야 한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지렛대로 활용해야 할 뿐 아니라 현대차 같은 기업의 미국 투자 효과를 강조하고 설득해야 한다.

트럼프 대통령이 상호관세에 대해 '선 부과 후 협상' 방식을 시사한 데다 "관대하게 할 것"이라고 언급한 만큼 협상의 여지가 없지 않다.

정부는 외교적 협상력을 총동원하고 기업들도 수출처 다변화, 기술 경쟁력 향상 등 장기 전략을 재정비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생큐'라는 말 뒤에 숨은 미국의 전략적 계산에 계속 휘둘릴 수밖에 없다.


[심윤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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