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라카와 마사아키 전 일본은행 총재가 도쿄 아오야마가쿠인대 연구실에서 최근 한국에서 출간된 본인의 책 '일본의 30년 경험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를 들고 웃고 있다. |
"(아베노믹스를 추진하면서) 일본은행이 돈을 대담하게 공급하면 디플레이션(성장이 정체되는 가운데 물가가 하락하는 현상)이 해결되고 성장률이 높아진다고 했는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정책이 일본 경제에 준 의미 있는 변화는 없었습니다.
"
글로벌 금융위기 시절 일본 경제의 조타수 역할을 한 시라카와 마사아키 전 일본은행 총재(아오야마가쿠인대 특임교수)를 최근 도쿄 시부야구에 있는 그의 연구실에서 만났다.
2008~2013년 일본은행 총재를 지낸 그는 아베 신조 전 총리 취임 후 '아베노믹스'에 반발해 애초 임기보다 일찍 사임한 것으로 유명하다.
과감한 양적완화가 핵심이었던 아베노믹스는 10년이 지난 지금 일본 경제의 성장에 도움이 됐다기보다 빈부격차만 확대했다는 비난을 받는 상황이다.
최근 일본 경제는 2~3년간 소비자물가상승률이 2~3%를 오가고 있다.
경제성장률(GDP)도 지난해 2%, 올해는 1%가 예상된다.
디플레이션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지만 시라카와 전 총재는 일본 경제가 살아나는 모습은 아니라고 진단했다.
그는 "최근 일본 물가가 오르면서 고질적인 디플레이션에서 일본 경제가 벗어나 이것이 성장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시각이 있는데 이는 잘못된 분석"이라며 "노동인구가 늘어나고 생산성이 향상되는 게 중요한데 일본은 이것과는 거리가 멀다"고 지적했다.
최근의 물가 인상과 관련해 그는 세 가지로 정리했다.
전쟁 등으로 해외 인플레이션이 높아진 가운데 일본은행이 저금리를 고집하면서 엔저로 수입 물가가 높아진 것이다.
여기에 노동력 부족으로 서비스 물가가 높아지면서 전반적으로 일본인들의 살림살이를 팍팍하게 만들고 있다.
시라카와 전 총재는 "디플레이션이 저성장의 원인이고 인플레이션은 고성장으로 가는 이유라고 보는 잘못된 경제관 때문에 일본 경제가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근본적인 일본 경제의 문제점은 인구 감소와 생산성 하락"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일본 기업의 변화도 촉구했다.
과거 총재 시절 일본 경제는 상대적으로 엔고 상황이었다.
이렇게 되자 많은 기업이 수출에 어려움을 겪는다며 환율 정책의 변화를 요구하기도 했다.
시라카와 전 총재는 "당시 엔고로 수출 경쟁력이 떨어졌다고 얘기한 기업 상당수가 엔저가 돼도 경쟁력을 회복하지 못했다"며 "진정한 문제는 환율이 아니라 그 회사 제품 자체의 경쟁력에 있었던 것"이라고 강조했다.
연장선으로 그는 일본 기업이 진정한 의미에서 글로벌화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일본 자동차 산업이 경쟁력이 있고 소재·부품 등에서도 뛰어나지만 미래 일본 경제를 이끌어갈 산업이 보이지 않는다"며 "삼성이 제품 경쟁력을 높여 세계 시장을 노리는 것과 처음부터 세계 시장을 목표로 시작한 K팝 등은 일본이 배워야 하는 부분"이라고 설명했다.
최근 엔저와 관련해 그는 방향적으로는 다시 엔고로 돌아설 것이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현재 엔저의 원인으로 그는 제조업을 중심으로 한 산업 경쟁력 저하와 일본의 인구 감소를 꼽았다.
국내 시장이 줄어드니 일본 기업들이 해외에서 공장을 만들고 제품을 판매하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엔 매도·달러 매수 움직임이 커졌다는 설명이다.
시라카와 전 총재는 "일본 기업의 해외 진출은 계속되겠지만 일본은행이 기준금리를 점차 올리고 미국이 낮출 경우 금리차 축소로 엔고 쪽으로 방향이 바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일본은행은 지난 3월 마이너스 금리 정책을 폐지하고, 지난 7월 기준금리를 0.25%로 올렸다.
시장에서는 최근 엔저 흐름 속에 물가 안정을 위해 일본은행이 다음달 추가 금리 인상에 나설 수 있다는 시각을 내놓고 있다.
이와 관련해 시라카와 전 총재는 "적정한 금리 수준은 예측하기 어렵지만 일본은행에서 발표한 논문 등을 종합해볼 때 중립적 금리 수준은 1~2.5%로 추정된다"며 "현재 물가상승률이 2% 수준이라 어느 정도 금리를 올린다고 해도 실질금리는 여전히 마이너스"라고 설명했다.
많은 부분에서 일본을 닮아가고 있는 한국 경제에 대해 그는 의미 있는 조언도 내놓았다.
그는 "일본은 경제의 저성장 원인을 디플레이션에서 찾는 잘못된 진단 때문에 양적완화 등과 같은 무리한 정책이 나와 어려움을 겪었다"며 "한국 경제는 무엇이 문제인지를 정확히 진단하려는 노력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시라카와 전 총재는 또 "일본의 경우 현재 '미래가 어둡다'는 비관론이 퍼지고 있는데 한국에서는 이러한 비관론을 경계해야 한다"며 "'비관은 감정이고 낙관은 의지'라는 프랑스 철학자 알랭의 말처럼 의지 없는 비관론에 빠지는 것은 위험하다"고 강조했다.
시라카와 전 총재는 최근 한국에 본인의 중앙은행 총재 시절 경험을 담은 책인 '일본의 30년 경험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를 출간했다.
그는 "일본 경제는 성공하지 않았고 실패도 많이 했다"며 "일본 경제에서 한국이 올바른 교훈을 얻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도쿄 이승훈 특파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