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주요 대기업 10곳 중 5곳이 곳간에 현금을 쌓아두겠다고 밝혔다.

고물가 지속에 고금리가 장기화되면서 투자에는 신중해지고, 재무건전성 제고를 최우선 목표로 내걸었다.


26일 삼성증권이 자사의 법인 고객 최고재무책임자(CFO) 95명을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49.5%가 올해 법인 자금 투자를 가장 확대할 자산으로 현금성 자산을 꼽았다.


95개 설문 응답 기업은 주요 대기업이 대부분 포함돼 있다.

해당 CFO들이 굴리는 자금 규모는 총 120조원에 달한다.

현금성 자산은 단기적으로 운용할 목적으로 현금과 유사한 수준의 환금성을 가지는 예금, 머니마켓펀드(MMF), 수시입출금식 저축성예금(MMDA) 등을 뜻한다.


보통 거액을 굴리는 법인과 기관투자자들은 현재 마땅한 투자처가 없거나, 거시경제 불확실성이 있을 때 만기가 3개월 이내이거나 원할 때 돈을 자유롭게 뺄 수 있는 현금성 자산에 자금을 예치하는 편이다.


응답자의 38.9%는 CFO로서 올해 가장 고민하는 부분에 대해 '유동성 관리'라고 밝혔다.

초안전자산이면서 만기가 짧아 회수도 간편한 현금성 자산을 확보해 기업 내 유동성을 보강하고, 향후 발생할 수 있는 리스크에도 대응하겠다는 취지다.


당장 투자에 나서기보다 곳간을 불리고, 향후 기회를 엿보는 것이다.

한국의 평균 시장 금리가 3%대 중반을 훌쩍 웃도는 고금리 상황 속 레버리지를 낀 공격적인 투자에 부담을 느끼는 기업이 많다는 분석이다.


특히 고금리 환경엔 차입금에 따른 이자 부담이 늘고 있는 상황이라 비용 절감에 사내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실제 상대적으로 인수·합병(M&A)을 통한 기업(지분)의 인수 또는 매각에 대해 생각 중인 법인은 4곳 중 1곳(25.3%)에 불과했다.

보통 기업이 M&A에 나설 땐 사내 자본을 활용하기도 하지만 빚을 내 레버리지 효과를 극대화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자 부담에 유동성 관리를 투자보다 우선순위로 삼은 셈이다.


올해 자금 집행·투자·조달 측면에서 가장 영향을 줄 요소에 대해선 '미국의 금리 인하 시기'를 꼽은 CFO가 45.3%로 가장 많았다.

미국의 물가상승률이 연방준비제도(Fed·연준) 목표치인 2% 수준을 웃도는 수준에서 장기간 유지되자 응답자의 50.5%는 올해 한국은행이 금리를 내리지 못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당초 시장은 올해 상반기 내 금리 인하 시작을 예상했지만 현재는 연말로 밀린 상황이다.


한 대기업 CFO는 "대부분 CFO가 미국 금리 인하 시기를 저울질하면서 투자를 계획·집행하고 있다"며 "투자보다는 회사의 유동성을 잘 관리하는 부분에 신경 쓰고 있다"고 말했다.


대기업 CFO들은 곳간에 현금을 쌓아두면서도 증권사를 통한 기업금융(IB) 기능에서의 자금 조달, 유망한 비상장기업 투자 기회가 생기면 자금을 집행할 것이라는 의지도 보였다.

응답한 CFO의 30% 이상이 반도체, 2차전지(배터리) 업종에 재직 중으로 인공지능(AI) 특수에 따른 투자 기회를 눈여겨보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향후 가장 주목하고 있는 투자 트렌드에 대해 AI라고 답한 CFO가 67.4%로 대부분이다.

또 CFO의 54.7%는 향후 비상장기업이나 스타트업에 지분 투자를 위한 계획을 검토 중인 것으로도 밝혀졌다.

이미 투자하고 있다는 응답도 11.6% 나왔다.

투자를 위한 내부 별도 조직을 갖춘 곳도 있었다.


IB·비상장기업 투자에 있어 기업의 자금 운용은 보안이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이 때문에 믿을 만한 증권사를 통한 종합적인 재무 솔루션에 대한 수요가 늘고 있다는 분석이다.


삼성증권이 주요 대기업 C레벨과 협의해 IB 딜을 성공시킨 개수는 100건이 훌쩍 넘는다.

삼성증권의 IB 1부문 내 기업솔루션팀은 이 같은 기업의 수요에 주목해 비상장주식 투자 기회도 제공한 바 있다.


박경희 삼성증권 WM부문장(부사장)은 "금융 전담 해결사 역할을 바라는 법인 고객 수요가 높아 이에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고 말했다.


인플레이션 헤지(위험회피)를 위해 인프라스트럭처 등 대체투자 자산에 투자하겠다는 CFO도 28.4%에 달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는 안전자산으로 분류되는 국내외 채권(16.8%)보다 높은 수치다.

주식에 투자하겠다는 의견은 없었다.


대체투자 자산은 주식처럼 시세 변동성이 크지 않고, 장기적으로 물가 상승에 따라 자산가치도 상승하는 편이라 기업들이 투자를 결심하고 있다.

특히 CFO들은 AI 특수에 따른 전력 수요 증가에 데이터센터를 유망 투자 섹터로 판단했다.


대체투자 자산은 배당수익을 바탕으로 한 정기적인 현금흐름 창출이 가능하다는 게 장점이다.

향후 자산 매각 시 자본 차익도 기대할 수 있어 장기 투자에 최적화된 법인들이 눈독을 들이고 있다.


[차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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