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공세에 맞설 최고의 무기는”...거함 이끄는 ‘40대 기수’ 정기선

정기선 HD현대 수석부회장
그의 직함은 정기선 HD현대그룹 수석부회장이다.

최근 들어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는 ‘미래형 조선소(Future of Shipyard·FOS)’다.

인공지능(AI)과 친환경으로 대표되는 정 수석부회장의 FOS 프로젝트는 HD현대그룹의 청사진 중 핵심이다.

그룹 주력인 HD현대중공업이 배를 건조하는 데에서는 세계 최고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지만, 여기서 더 나아가 FOS로 거듭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정 수석부회장은 기존 현대중공업그룹이란 명칭을 HD현대그룹으로 변경하는 작업을 주도하며 오너 3세 경영인으로서 존재감을 키워가고 있다.

지난해 11월 그룹 인사 이동에서 ‘수석’이란 두 글자가 추가된 이후 더욱더 적극적인 경영 행보에 나섰다.

40대 초반의 모범생 이미지에 감춰진 기술개발을 향한 열의와 소통 경영이 정 수석부회장을 보여주는 키워드다.


HD현대는 AI, 디지털 트윈 등 혁신 기술을 통해 새로운 수준의 생산성과 안정성을 확보해 나갈 것입니다.

” 그가 지난 3월 세계경제포럼 연차총회(다보스포럼)에 참석해 HD현대그룹의 앞날을 압축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전통적 산업을 상징하던 조선업에 AI를 적용·도입해 미래 산업으로 재편해 나가겠다는 선언이었다.

그동안 조선업은 ‘노동 집약적’이란 꼬리표를 달고 있었다.

건조 과정에서 당분간 사람이 직접 수행해야 하는 작업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대부분이다.

그렇지만 공정 혁신을 통한 생산성 향상에 AI는 필수 요소로 떠올랐다.


생산성 향상과 공정 혁신은 조선업계의 최대 고민인 중국의 공세를 막아낼 방안이기도 하다.

HD현대 관계자는 “무섭게 치고 올라오는 중국을 상대로 기술 격차를 유지해야 한다는 절박함이 크다”면서 “AI 등을 활용해 조선업을 혁신하는 데 성공하면 미래형 조선소를 실현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친환경도 조선업계에서 기업의 존망을 좌우하는 요인이다.

국제해사기구(IMO)는 탄소 배출 규제를 모든 선박에 적용하고 있고, 전 세계 선주들은 이산화탄소(CO2) 배출량과 연료 효율을 우선적으로 고려하고 있다.

그는 올해 다보스포럼에서는 ‘에너지 산업 협의체’와 ‘공급 및 운송 산업 협의체’에 잇달아 참석해 에너지 전환·운송 등 다연료 미래의 실현과 AI·디지털 기술을 활용한 선박의 건조·운영을 효율화하기 위한 협력 방안에 대해 논의했다.

정 수석부회장은 2023년부터 2025년까지 3년 연속 다보스포럼에 참석해왔다.


정 수석부회장의 글로벌 행보에서 CES도 빼놓을 수 없다.

CES 2024에서 그는 단상에 올라 기조연설을 통해 ‘사이트 트랜스포메이션(Xite Transformation)’을 제시했다.

그는 “건설 산업은 인류 문명의 토대를 마련했지만 기술과 혁신에 있어 가장 느린 행보를 보이고 있다”며 “안전과 안보, 공급망 구축, 기후변화 등 인류의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협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첨단 기술을 바탕으로 한 건설 산업의 근원적 혁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전자제품이 주류인 CES에서 이례적인 내용이었지만 주최 측 요청에 따라 기조연설에 포함된 것으로 전해졌다.

지난해 4월에는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에서 개최된 ‘세계경제포럼 특별회의’에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공동의장 자격으로 참석했다.

같은 해 9월에는 미국 휴스턴에서 개최된 ‘가스텍 2024’에 참석해 글로벌 기업 관계자들에게 HD현대가 보유한 최첨단 친환경 선박 기술을 직접 소개하는 등 다연료 미래 준비를 위한 활발한 행보를 이어 나갔다.


정 수석부회장은 미래 성장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지난 3월 미국 출장길에 올라 빌 게이츠 테라파워 창업자를 만나고 소형모듈원자로(SMR) 분야에서의 양사 간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앞서 그는 미국 SMR 기업 테라파워에 대한 투자 계약을 주도하기도 했다.

이와 함께 알렉스 카프 팰런티어 대표와 만나 AI 데이터 분석을 통한 조선 공정혁신 협력을 논의했다.


정기선 HD현대 수석부회장 [HD현대 제공]
1982년생인 정 수석부회장은 소통을 중시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판교에 위치한 HD현대 연구개발(R&D) 시설인 GRC(Global R&D Center)로 출퇴근하는데, 중공업 특유의 보수적인 분위기가 이곳에서는 잘 느껴지지 않는다고 한다.

특히 신입사원들은 정 수석부회장과 마주치면 ‘셀카’를 요청하는 일도 있다고 한다.

GRC 구내식당에서 신입사원과 줄을 선 채 식판을 들고 배식을 받거나 지난달 부산 벡스코에서 열린 국제해양방위산업전시회에서 신입사원들과 단체 사진도 찍었다.

실제 업무에서도 고위 임원들만 참석하는 회의가 아닌 임원·평직원 공동으로 진행하는 일상적 회의에도 참석해 논의 내용을 듣고 직접 사안을 챙긴다는 전언이다.


업계에서는 정 수석부회장의 태생적 성격을 고려했을 때 눈에 띄는 움직임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현대가(家)의 엄격한 가풍 속에서 모범생으로 자라왔고 모친 김영명 여사의 성격을 닮아 조용하고 내성적인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지난해 11월 23일 문수축구경기장을 찾아 프로축구 울산 FC의 시즌 최종전 승리를 직접 축하한 것은 젊은 오너 3세의 모습이었다.

울산 FC의 ‘구단주급’이지만 일반 관중석에서 경기를 지켜보며 서포터스와 격의 없이 어울리는 모습도 화제가 됐다.

아직 40대라는 게 MZ세대 및 젊은 직원과 적극적으로 소통을 이어갈 수 있는 원동력이 아니냐는 얘기도 나온다.

정 수석부회장의 ‘소통 리더십’은 GRC에서 직원들 주최로 열린 패션쇼, ‘GRC in 보이스(voice)’ 노래 자랑 등 사내 행사에서도 자주 목격된다.


소통 대상은 직원들뿐만이 아니다.

군 복무를 학군장교(ROTC)로 마친 정 수석부회장은 후배 장교들 훈련에 간식을 제공하고 미국 방문 시 미 해군사관학교를 방문했다.

업계 관계자는 “본인이 직접 챙기지 않으면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라면서 “국가관이나 안보관도 장교로서 복무한 경험에서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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