뛰어난 것 앞에는 '슈퍼'가 붙는다.
우리말로는 '초월(楚越)'이다.
인간보다 뛰어난 능력을 가지면 슈퍼맨, 소리보다 빠르면 슈퍼소닉, 평범한 마트보다 클 때는 슈퍼마켓이 된다.
슈퍼컴퓨터는 보통 컴퓨터에 비해 월등한 연산 능력을 가진 제품이다.
슈퍼컴퓨터를 가르는 특정 기준이 있는 것은 아니다.
연산 능력이 뛰어나다는 건 상대적이기 때문에 사람들마다 조금씩 기준이 다르다.
특히 기술이 발전해 컴퓨터 전반의 성능이 좋아진 요즘, 슈퍼컴퓨터의 기준은 더 모호할 수밖에 없다.
오늘날 누구나 가지고 있는 USB 충전기가 1969년 달에 도착한 아폴로 11호에 쓰인 컴퓨터보다 연산 성능이 좋다.
그래도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기준은 있는 법. 세계에서 연산 성능 순으로 500대를 줄세워서 슈퍼컴퓨터로 본다.
성능 순위를 발표하는 슈퍼컴퓨터 국제학술대회도 있다.
매년 두 차례 발표하는데, 보통 그 순위에 든 컴퓨터를 슈퍼컴퓨터라고 부른다.
가장 최근 발표된 지난해 11월 자료를 보면 한국은 총 13대의 슈퍼컴퓨터를 보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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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1위 슈퍼컴, 네이버 '세종' |
상위권에는 네이버와
카카오,
삼성전자,
SK텔레콤 등 대기업이 보유한 슈퍼컴퓨터들이 올라 있다.
기상청과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 등 정부기관에서 보유하고 있는 제품도 일부 있다.
국내에서 순위가 가장 높은 네이버의 '세종'은 세계 40위다.
세종의 연산 성능은 32.97페타플롭스(PF)로 매우 뛰어나지만, KISTI에 도입 예정인 6호기의 5% 정도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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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1위 슈퍼컴, 美 리버모어硏 '엘 캐피탄' |
현재 세계 1위는 미국 로런스 리버모어 국립연구소에 있는 '엘 캐피탄'이다.
AMD의 최첨단 칩을 4만개 이상 가지고 있으며, 연산 성능은 무려 1.742엑사플롭스(EF)에 달한다.
1초에 100경번이 넘는 계산을 할 수 있다는 의미다.
오늘날 전 세계 슈퍼컴퓨터 전쟁은 엑사플롭스 시대로 넘어갔다.
공식적으로 가장 빠른 슈퍼컴퓨터는 모두 미국이 갖고 있지만, 전문가들은 중국에도 비공식적으로는 이미 엑사플롭스급 슈퍼컴퓨터가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중국은 수년 전부터 슈퍼컴퓨터의 성능을 발표하지 않고 있다.
6호기가 도입되면 한국도 세계 10위권 수준의 슈퍼컴퓨터가 생긴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지난 14일 슈퍼컴퓨터 6호기 도입을 위한 최종 계약을 체결했다고 밝혔다.
휼렛패커드 유한회사(HPE)와 3825억원 규모 계약을 맺어 올해 안으로 KISTI에 설치하고, 내년 상반기부터 운영할 예정이다.
6호기는 600PF급 연산 성능으로 세계 10위권에 진입할 수 있는 수준이다.
또한 최초로 그래픽처리장치(GPU) 중심의 슈퍼컴퓨터이기 때문에 인공지능(AI) 연산 등에 적합하다.
지금까지 적절한 컴퓨터가 없어서 연구에 어려움을 겪었던 연구자들은 앞으로 과제신청서를 내고 슈퍼컴퓨터를 이용해 자신의 연구를 수행할 수 있게 됐다.
한 컴퓨터공학 연구자는 KISTI의 슈퍼컴퓨터에 대해 "든든한 뒷배"라고 말했다.
KISTI가 없으면 직접 슈퍼컴퓨터를 사야 하는데 터무니없이 비싸고, 해외 업체의 클라우드 서비스를 이용하려고 해도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이다.
KISTI에 따르면 5호기를 사용한 연구자는 연인원 5000명에 달한다.
KISTI는 연 3회 정도 사용자 공모를 받는데, 선정률이 50% 정도다.
한 번에 약 1000개의 과제가 동시에 돌아가는데도 항상 경쟁이 치열하다.
슈퍼컴퓨터 기술의 핵심은 '연결'이다.
수천~수만 개 부품을 고집적으로 만드는 게 중요하다.
홍태영 KISTI 슈퍼컴퓨팅인프라센터장은 "슈퍼컴퓨터는 여러 대의 컴퓨터를 같이 쓰는 개념"이라며 "6호기는 서버 수가 2500개"라고 설명했다.
슈퍼컴퓨터는 중앙처리장치(CPU)가 장착된 개별 워크스테이션들이 있는데 이를 서버라고 부른다.
개인용 컴퓨터에서 쓰는 본체 2500개가 모인 셈이다.
서버 수백 개가 모여 하나의 랙을 이룬다.
슈퍼컴퓨터를 직접 보면 큰 사무실 공간에 사람 키보다도 큰 서랍장이 줄지어 서 있는데, 이게 하나의 랙이다.
6호기의 경우 하나의 랙에 GPU가 16개 들어간다.
사무실을 가득 채운 랙들을 합쳐 슈퍼컴퓨터라고 부른다.
얼마나 많은 CPU와 GPU를 고집적으로 쌓고 운영할 수 있는지가 슈퍼컴퓨터의 성능을 결정한다.
가장 중요한 건 역시 연산을 담당하는 칩이다.
어떤 칩을 쓰는지에 따라 슈퍼컴퓨터의 종류도 결정된다.
지금까지는 CPU 중심의 슈퍼컴퓨터를 썼기 때문에 수치 계산에 특화돼 있었다.
일반적인 계산이나 시뮬레이션 등이 모두 여기에 속한다.
기상청이 사용하는 슈퍼컴퓨터 역시 수치 계산용이다.
반면 GPU는 얕지만 넓고 다양한 연산을 동시에 하는 데 적합하다.
빅데이터를 분석하고 AI 모델을 만드는 데는 GPU가 필요하다.
하드웨어만 있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한우종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연구위원은 "장비 스펙을 뒷받침할 소프트웨어도 그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고성능 컴퓨터를 동시에 사용하도록 연결하는 소프트웨어가 없으면 슈퍼컴퓨터는 불가능하다.
미국은 지난 1기 트럼프 정부 때부터 최첨단 칩을 중국에 수출하지 않고 있지만, 슈퍼컴퓨터용 소프트웨어는 훨씬 전인 오바마 정부 때부터 수출을 금지한 바 있다.
한 연구위원은 "중국은 하드웨어 측면에서는 미국을 따라가고 있지만 소프트웨어 생태계를 만드는 데 애를 먹고 있다"고 했다.
고성능 파일 시스템도 중요하다.
컴퓨터가 연산을 하려면 데이터를 끊임없이 저장하고 읽어야 한다.
데이터를 어디에 어떤 형태로 저장하고 불러오는지를 결정하는 게 파일 시스템이다.
아무리 연산이 빨라도 결과를 적시에 저장할 수 없다면 슈퍼컴퓨터의 전체 속도는 느려질 수밖에 없다.
이는 오늘날 슈퍼컴퓨터에서 데이터 병목현상이 일어나는 주된 원인이다.
슈퍼컴퓨터를 구축하는 게 어려운 건 '미래를 내다보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슈퍼컴퓨터의 성능은 대략 10년마다 1000배씩 좋아지고 있다.
기술이 워낙 빠르게 발전하기 때문에 오늘의 첨단 성능이 내년에는 벌써 구시대적 기술이 되고 만다.
네이버의 세종 역시 25위에서 반년 만에 15단계나 하락했다.
개인용 컴퓨터의 견적을 맞춰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컴퓨터에 들어가는 많은 부품을 따지고 비교하는 건 매우 지난한 일이다.
그게 수천억 원이 넘는 규모라면 훨씬 더 복잡하다.
홍 센터장은 "슈퍼컴퓨터를 도입하는 데 가장 큰 난관은 예산이고, 그다음은 경험이 있는 전문가가 많지 않다는 것"이라고 했다.
아직은 전문가의 개인기에 의존하는 게 현실이다.
광주과학기술원(GIST)은 국내 학계에서 유일하게 세계 500위 안에 들어가는 슈퍼컴퓨터를 보유하고 있는 연구기관이다.
대당 GPU가 8장 들어가는 컴퓨터 40대가 모여 하나의 슈퍼컴퓨터를 이루고 있다.
GIST에 이 정도의 인프라스트럭처가 구축된 건 김종원 GIST 슈퍼컴퓨터센터장과 몇 명의 능력에 의존한 덕분이다.
김 센터장은 "슈퍼컴퓨터는 도입한 뒤엔 고치기 힘들기 때문에 처음부터 전문적인 검토가 필요한데 아직 한국은 시스템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최원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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