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파고를 이긴 마지막 인류'로 불리는 이세돌 9단은, 인공지능 시대에도 인간의 자존심을 지켜낸 전설적인 바둑기사입니다.
만 12세에 입단해 수많은 우승을 거둔 뒤, 치열한 승부의 세계에서 물러난 후 보드게임 작가로 인생 2막을 시작했습니다.
"바둑은 예술"이라 말하는 그는, 진입장벽을 낮춘 새로운 보드게임을 통해 더 많은 이들에게 바둑의 매력을 전하고자 합니다.
◇ 김수진 작가의 크레딧 쿠키 - 너 안에 박보검 있다
# 얼굴 천재 vs 바둑 천재
배우 박보검은 드라마<응답하라 1988>에서 이창호 9단을 모델로 한 천재 바둑기사 최택을 연기했다.
'돌부처'라고 불릴 정도로 침착하고 두터운 기풍, 차분하고 숫기 없는 모습, 그리고 특유의 무표정까지. 이창호 9단의 캐릭터를 그대로 끌어왔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이 드라마를 볼 때마다 이창호 9단보다 이세돌 9단이 떠올랐다.
극 중 최택이 흡연하는 모습은 이세돌의 과거 담배를 피우는 모습과 꽤 비슷하다.
최택의 옷차림과 이세돌이 타이 없이 정장 입은 모습도 은근 닮았다. 그리고, 대국 후 힘없이 걸어가는 모습까지도 최택 위에 이세돌이 겹쳐 보인다.
공통점이 어디 그뿐이랴, 그 폭발적인 인기도 빼다 박았다.
2016년 3월 알파고와의 바둑대국으로 이세돌 9단은 인류의 자존심을 지킨, 우주 대스타로 올라섰다.
"인공지능 알파고는 굉장히 달라요. 바둑 스타일이 굉장히 생소하기 때문에 첫 판 혹은 두 번째 판까지도 사람이 굉장히 불리한 게임이었죠."
다 끝난 줄 알았다.
이세돌 9단은 돌을 던지고 인간의 패배를 인정하게 될 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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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tvn |
하지만, 그에겐 신의 한 수를 숨겨뒀다.
역시 승부사였다.
인공지능의 지능을 무력화시킨 이세돌 그래서 그의 어록은 잊히지 않는다.
"자신이 없어요. 질 자신이요."
그렇다. 박보검은 얼굴 천재, 이세돌은 바둑 천재다.
# 이세돌도 사람이다.
알파고도 이긴 이세돌 9단이 절대 이길 수 없는 상대가 있다.
수십 수를 내다보는 바둑 천재도 이 승부만큼은 늘 불계패다.
절묘한 포석에 승부수를 걸어도 결국, 자충수, 무리수가 되어버리는 막강한 상대는 바로바로 딸이다.
알파고와의 대국 당시, 어린 딸 손을 잡고 대국장에 들어가는 장면이 전 세계에 보도됐다. 그 딸이 바로 그 딸이다.
"딸 때문에 무너지지 않았어요."
당시 9살이던 딸은 고3이 됐고, 인터뷰 당시, 입시를 준비하고 있었다.
"입시 때문에 고민이 많았어요. 자식이 참 마음대로 안 되네요."
전 세계를 호령하는 승부사도 쩔쩔매게 하는 것이 자식인가!
자식이 내 맘대로 안 되는 건 만고의 진리인가!
동병상련이 느껴지는 그의 솔직한 고민….
입시 9단이 되고 싶은 이세돌도 부모다. 고로 이세돌도 사람이다.
◇ 이담의 뒷담; 뒷이야기를 담다 - 바둑이라는 예술
이.세.돌. 인간을 뜻하는 세(世), 바둑돌을 뜻하는 돌(乭).
세상을 바둑돌로 지배하라고 아버지가 지어주신 이름이라고 한다.
그는 정말이지 한 세상을 바둑돌로 지배했다.
# 솔직한 센돌
워낙 낯을 가리시는 분이라고 들었다.
방송 시작하기 전에 분위기를 풀어보려고 대화를 시도했다.
"작가님, 프로님, 기사님…. 워낙 호칭이 많아서요. 어떻게 불러드리는 게 좋을까요?" 했더니 "아무거나 해주셔도 돼요." 했다.
"그럼 오빠라고 할까요?" 하고 던진 농담에 드디어 웃어 보이셨다.
그런 그지만 사실 센 면도 있다. 이른바 '돌직구 어록'이 있을 정도로 강하기도 하다.
"자신 없어요. 질 자신이요."
"싸울만해서 싸워요. 수가 보이는데 어쩌란 말이에요."
그래서 그는 '센돌'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너무 센 거 아니야? 싶지만, 알고 보니 그는 단지 솔직했던 거다.
실제 자신이 없는 경기에는 자신 없다고도 이야기한단다.
2016년 알파고와의 대국 전 이세돌 기사는 "저와 승부를 논할 정도의 기량은 아닌 것 같습니다."라고 당차게 말했다.
그렇게 이길 거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후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긴장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5:0은 아닐 확률이 높을 것 같습니다." 라고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 인류의 자존심
알파고는 지금까지 알려진 바론 74전 73승 1패를 했다.
이세돌은 유일하게 알파고에 패를 안겨준 사람이다.
인류의 자존심이라 불리우는 이유다.
하지만 그는 알파고와의 대국 3년 뒤 은퇴를 했다.
2019년 3월, "올해가 마지막인 것 같습니다"고 했던 말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너무도 아쉬웠던 기억이다.
그는 그간 자부심으로 바둑을 계속 둬왔다고 했다.
인공지능이 등장한 이후, 이길 수가 없다는 판단에 절망감을 느끼고 은퇴를 결심했다.
자부심과 즐거움이 사라진 상태에서 바둑을 두고 싶진 않았다고 한다.
# 이세돌에게 바둑이란
나도 바둑을 배웠던 세대다.
내가 어릴 때엔 아파트 단지 상가에 바둑 학원이 있었다.
예(禮)를 배울 수 있고, 두뇌 발달에 좋다고 해서 당시에 너도나도 바둑을 배우곤 했다.
나 또한 동생과 바둑 학원을 다녔다.
바둑판이 일렬로 쭉 놓여진 방에서 촘촘하게 앉아 모르는 사람들과 바둑을 뒀던 기억이 난다.
나에게 바둑은 놀이였다.
특히 할아버지와 마주 앉아 게임을 할 수 있다는 점이 나는 참 좋았다.
나에게 바둑은 놀이, 승부를 가리는 재밌는 게임이었다.
이세돌 기사는 바둑이 '인류가 만든 유일하고 완벽한 추상 전략 게임'이라 했다.
바둑에서 그는 '존중', '배려', '책임' 등을 배울 수 있다고 했다.
그에게 바둑은 예술이자 아름다운 학문이었다.
그가 해온 바둑이라는 예술이 벌써 그립다.
◇ 김원경 피디의 비하인드컷 - 이세돌의 '마음의 한 수'
녹화 날, 김연자 가수의 녹화도 있었다.
이세돌 9단과 김연자 가수가 회사에 연이어서 방문하니 다른 방송 출연진들과 스텝들이 의아해했다.
"무슨 행사가 있나?"
"오늘 무슨 날이야?"
"이세돌 기사가 축사하고 김연자 가수가 축가 한 거야?"
녹화장을 기웃기웃, 궁금해하는 눈들을 뒤로하고 이세돌 9단의 녹화가 시작됐다.
화면에 비친 그의 모습은 평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어디에도 들을 수 없었던 아내에게 영상 편지를 보내기도 하고, '이건 처음 이야기하는 건데요'라며 속마음을 꺼내기도 한다.
긴 시간 조곤조곤 풀어내는 이야기들이 끝나자, 기술감독이 말했다.
"이세돌 9단의 이런 인터뷰를 처음 보는 거 같다."
# 지금까지 이런 인터뷰는 없었다.
섭외 의뢰를 넣고 과연 될까 하는 게스트들이 있다.
다른 방송국에서도 섭외하기 힘들단 작가의 말에 섭외 리스트에 넣어놓곤 손꼽아 기다리는 게스트, 그가 이세돌 9단이였다.
직설적인 화법, 빈틈없는 천재, 철저한 자기관리, 예민함, 뛰어난 집중력, 그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단어들이다.
그런 그가 이례적인 인터뷰를 했다. 녹화 후, 그는 로맨티스트로 변모해 있었다.
이세돌은 아내와의 첫 만남에 전화번호를 물어보고 사귄 지 6개월 만에 청혼했다고 한다.
"살면서 잘한 것 두 가지는 결혼을 잘한 것과 아이를 갖은 것"이라고 말했다. 아내에게 영상 편지를 부탁하자,
이세돌 : 결혼한 지 20년 되었는데 해준 것도 없는 것 같고 미안한 감정이 큰 것 같아. 앞으로 살아가면서 갚을 수 있도록 노력할게. 사랑한다!
이세돌 기사의 러브레터라니 상상할 수 있었겠는가? 알파고 AI를 이긴 천재 바둑기사의 사람 냄새나는 인터뷰. 어쩌면, 바둑으로 세상을 정복한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마음을 정복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사랑한단 말보다 더 인상 깊었던 그의 말, '미안한 감정이 크다'.
그 속에는 복잡하고 섬세한 감정들이 담겨있는 듯했다.
평생을 두뇌 싸움에 매진해온 그가, 진솔하게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는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그는 단순히 바둑의 전설이 아니라, 진정한 인간으로서의 깊이를 더해가는 것이리라.
◇ 이야기를 담다, 그 후 - 수읽기 없는 편안한 인터뷰
<이야기를 담다>촬영은 기존의 인터뷰들과는 확실히 다른 느낌이었어요.
보통은 정해진 질문에 맞춰 답을 해야 하는데, 여기서는 차 한 잔을 앞에 두고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바둑 대국처럼 긴장감이 감도는 분위기가 아니라,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생각을 정리하고 풀어나갈 수 있는 시간이었죠.
무엇보다도 이 프로그램이 가진 가장 큰 매력은 '편안함'이 아닐까 싶습니다.
보통은 인터뷰를 하면 질문에 대한 답을 미리 생각하고, 형식에 맞춰 이야기를풀어가야 한다는 부담이 생기는데,<이야기를 담다>에서는 그런 틀에서 벗어나 진짜 제 이야기를 꺼낼 수 있었습니다.
자연스럽게 흐르는 대화 속에서 저 자신도 몰랐던 생각들을 정리할 수 있었던 점이 기억에 남습니다.
무엇보다 프로그램이 가진 따뜻한 분위기가 방송을 통해서도 잘 전달된 것 같아 기뻤어요. 앞으로도<이야기를 담다>가 많은 분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담아낼 수 있는 공간으로 오래 남길 바랍니다.
- 이세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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