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초호황인데 한국은 ‘보릿고개’…전력 중소기업들 암울한 이유는

송전탑 [사진=연합뉴스]
“미국 수출하는 대기업들은 호황이라지만 한국 내 사업을 위주로 공급하는 중소기업들은 문을 닫아야 할 지경입니다.

공사 수주가 끊겨 직원들 월급 주기도 빠듯합니다.

”(중소 전력기기업체 관계자)
미국 전력 인프라스트럭처 산업이 슈퍼사이클을 맞이했지만, 한국 전력망 투자는 좀처럼 속도를 내지 못하면서 관련 업계의 고민도 깊어지고 있다.

한국전력의 누적 부채가 200조원을 넘어선 가운데 오랜 재정 악화에 따른 예산 부족에 주민 민원 문제까지 더해지면서 송전선로 확충은 계속 지연되고 있어서다.


실제로 내수 비중이 높은 중소업체들은 회사 운영을 유지하기도 어려운 실정이다.

전력기기·공사 업체의 80% 이상은 중소기업이다.

대기업이 시장을 주도하지만 전체 사업자 수로는 중소기업이 압도적으로 많다.

이들 중소기업은 대기업의 하도급부터 부품 공급, 지역 기반 공사, 송전·변전망 시공과 유지·보수까지 다양한 역할을 맡고 있다.


한 중견 전선 업체 관계자는 “작년까지만 해도 유지·보수 물량이라도 꾸준히 있었는데, 올해 들어선 그마저도 뚝 끊겼다”며 “공장 가동률이 50% 아래로 떨어진 지 오래”라고 말했다.


또 다른 중소업체 관계자는 “정부가 송전망 투자 계획을 세운다 해도 각종 인허가와 민원, 예산 문제로 실제 사업화까지는 수년이 걸린다”며 “이러다 국내 전력기기 산업 자체가 붕괴할까 두렵다”고 토로했다.


정부가 ‘서해안 에너지 고속도로’(620㎞ 해저 송전망·11조원 규모) 사업을 2030년까지 조기 완공하겠다는 방침을 내세웠지만, 이것을 제외하면 대규모 송전망 확충 계획이 사실상 전무한 실정이다.


전국적으로 송전탑 건설 반대 민원, 입지 선정, 사업 승인 지연 등으로 31개 주요 송전선로 중 26곳이 공사 중단 또는 지연 상태에 놓여 있다.

한전에 따르면 동해안~수도권을 잇는 전력계통 사업은 주민 민원으로 입지 선정이 지연되고 지방자치단체 인허가가 불허되는 식의 여러 암초를 만나 66개월가량 사업이 지연됐다.

당진TP~신송산 구간은 이 같은 이유로 90개월, 북당진~신탕정 구간은 150개월가량 사업이 늦춰졌던 것으로 나타났다.

짧게는 5년6개월, 길게는 12년6개월가량 지연된 셈이다.


업계 한 고위 관계자는 “서해안 사업 외에는 내년까지도 뚜렷한 신규 발주가 없어 현장 직원들조차 ‘언제쯤 일감이 들어오냐’며 불안해한다”고 했다.

다른 업계 관계자는 “국내서도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수주 문의는 늘어나는데, 정작 국내 송전망 사업은 멈춰 선 상태라 답답하다”며 “미국을 비롯한 해외 시장에 눈을 돌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토로했다.


전력망 확충에 속도를 내기 위해선 프로젝트에 민간 기업 또는 펀드의 참여를 허용하거나 전력 공급망 자체를 다변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AI 데이터센터, 반도체 같은 전기 집약 산업의 성장과 재생에너지 확대로 전력 수요가 폭증하는데, 현행 독점 구조로는 공급 안정성에 한계가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어서다.

실제로 한국은 발전(생산) 부문을 제외한 송전·배전·판매 등 전력망 핵심 영역을 한전이 독점하고 있어 주요 선진국 대비 폐쇄적이라는 비판이 꾸준히 제기돼왔다.


전문가들은 전력망 독점 구조의 문제점과 공급사 다양화 필요성을 지속적으로 제기한다.

한 전력기기 업체 임원은 “미국을 포함한 주요국은 발전·소매 부문에 경쟁 체제를 도입하고, 다양한 사업자가 존재한다”며 “한국도 시장 개방을 통해 민간의 혁신과 투자를 이끌어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영민 해상그리드협회 사무국장은 “정부가 예산이 부족하다면 민간 기업이 송전망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놔야 한다”며 “지금처럼 한전이 독점하는 폐쇄적 구조로는 급증하는 전력 수요와 신재생에너지 확대에 대응하기 힘들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한전 측은 어려운 재무 여건에서도 송배전 설비투자를 차질 없이 진행해왔다는 입장이다.

한전 관계자는 “올해 11차 장기 송변전설비계획을 통해 지난 10차 송변전설비계획 대비 16조3000억원이 증가한 72조8000억원의 대규모 투자 계획을 수립하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전력망 공급 다변화에 대해선 신중한 입장이다.

한전 관계자는 “송배전망의 건설은 지형 조건, 인허가 절차, 건설 규모 등에 따라 상이하기 떄문에 민간이 시행한다고 해서 더 빠르다는 부분의 근거는 불명확하다”며 “오히려 민간이 시행할 경우 안정적인 수익을 보장해야 하므로 사업비가 증가하고 이는 국민에게 전기요금 인상 요인이 될 수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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