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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김이 양팔을 번쩍 들며 포즈를 취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
마지막 18번홀에서 이글을 잡고 공동 선두에 등극, 1차 연장에서 세컨드샷이 물에 빠져 1벌타를 받고 친 칩샷이 그대로 홀에 들어가 버디로 기사회생, 2차 연장에서는 완벽한 티샷과 세컨드샷을 성공시킨 뒤 3.5m 이글 퍼트를 넣고 생애 첫 메이저 우승….
호주 동포 그레이스 김의 미국프로골프(LPGA) 투어 시즌 네 번째 메이저 대회인 아문디 에비앙 챔피언십 제패는 그저 '골프의 신'이 우승 트로피를 건네줬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영화 같은 이야기가 펼쳐졌다.
마치 '골프는 18번홀 그린에서 장갑을 벗어봐야 안다'는 말을 증명하듯 18번홀에서만 세 번 연속으로 마법 같은 샷이 나왔다.
이제 에비앙 리조트 골프클럽(파71) 18번홀은 '그레이스 김 홀'로 기억될 듯하다.
13일(한국시간) 프랑스 에비앙레뱅의 에비앙 리조트 골프클럽에서 열린 대회 최종일 4라운드에서 그레이스 김은 이글 2개와 버디 4개, 보기 2개, 더블보기 1개를 묶어 4타를 줄여냈다.
합계 14언더파 270타를 만들어 여자골프 세계 랭킹 2위 지노 티띠꾼(태국)과 공동 선두가 된 그레이스 김은 연장 2차전에서 완벽한 플레이로 이글을 잡은 뒤 믿기지 않는다는 듯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환호했다.
기적의 우승 스토리 시작은 7번홀(파5)이었다.
1번홀과 4번홀에서 보기를 범하며 2타를 잃은 상황. 그레이스 김의 두 번째 샷이 그린 옆 벙커에 빠져 위기를 맞았다.
하지만 침착하게 벙커샷을 했고 공은 그대로 홀 속으로 사라졌다.
잃은 타수를 모두 만회하는 벙커샷 이글이었다.
두 번째 기적은 대회 72번째 홀인 18번홀. 티띠꾼에게 2타 뒤진 그레이스 김은 이글을 반드시 잡아야 했다.
그리고 190야드 남은 상황에서 4번 유틸리티로 친 샷이 홀 50㎝에 완벽하게 붙으며 이글을 잡고 순식간에 공동 선두가 됐다.
영화 같은 '18번홀 스토리'는 시작일 뿐이었다.
긴장감이 흐르던 서든데스 연장 1차전. 티띠꾼의 두 번째 샷이 그린 주변에 간 것과 달리 그레이스 김의 두 번째 샷은 실수로 그린 앞 연못에 빠졌다.
모두가 승부가 끝났다고 생각한 순간, 1벌타를 받고 친 그레이스 김의 칩샷이 홀 8m 정도 지점에 떨어졌다.
이후 공이 계속 구르더니 홀로 들어갔다.
칩샷 버디. 상상도 못 한 상황에 그레이스 김도, 그를 둘러싼 갤러리도 모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당시 상황에 대해 그레이스 김은 "세컨드샷이 연못에 빠지며 꽤 실망했지만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며 "벌타를 받고 친 칩샷이 그대로 들어갔는데, 다시 하라면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돌아봤다.
위기를 이겨낸 그레이스 김의 샷은 더 단단해졌다.
연장 2차전에서 그레이스 김은 두 번째 샷을 먼저 홀 3.5m 지점에 떨궈놓은 뒤 깔끔하게 이글을 성공시키며 경기를 끝냈다.
너무 놀라 제대로 세리머니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굳어버린 그레이스 김은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 모르겠다"며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정말 믿기지 않는다.
이렇게 빨리 메이저 대회에서 우승할 줄은 몰랐다"고 기뻐했다.
그레이스 김의 부모는 모두 한국 국적이다.
김시은이라는 한국 이름도 있다.
2000년 12월 호주 시드니에서 태어난 그레이스 김은 아버지의 권유로 골프를 시작했고 두각을 나타냈다.
2018년에는 유스올림픽 개인전에서 금메달을 따냈고, 2019년 한국에서 열린 전국체전에 출전해 해외 부문 여자 개인전 챔피언에 올랐다.
이어 2021년에는 호주여자 아마추어 챔피언에 등극하기도 했다.
2023년 LPGA 투어에 데뷔한 이후에도 바로 우승 트로피를 품었다.
그해 4월 시즌 세 번째 출전 대회였던 롯데 챔피언십에서 성유진, 류위(중국)와 연장 접전 끝에 생애 첫 우승을 차지했다.
그레이스 김은 우승상금 120만달러를 획득해 시즌 상금 순위가 74위에서 10위로 뛰어올랐고, 우승 포인트 650점을 추가해 CME 글로브 랭킹도 26위로 솟구쳤다.
그레이스 김은 "정말 큰 성과다.
올해 초반에 성적이 나오지 않아 회의감이 컸고 의욕도 식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이 트로피 옆에 앉아 있는 게 정말 꿈만 같다"며 감격했다.
그레이스 김의 우승에 가렸지만 이날 '
신스틸러'도 탄생했다.
여자 아마추어 세계 랭킹 1위 로티 워드(잉글랜드)다.
워드는 이날 무려 7타를 줄이며 합계 13언더파 271타로 이민지(호주)와 함께 공동 3위로 대회를 마쳤다.
워드는 1967년 카트린 라코스테(프랑스) 이후 58년 만에 아마추어 메이저 챔피언을 꿈꿨지만 1타가 부족했다.
워드는 지난 7일 유럽여자프로골프투어(LET) KPMG 아일랜드 여자오픈에서 프로 선수들을 6타 차로 따돌리고 우승해 화제를 모은 바 있다.
아쉽게 '톱10'에 한국 선수는 한 명도 들지 못했다.
에비앙 챔피언십이 메이저 대회로 승격되기 이전인 2001년 이후 무려 24년 만이다.
이소미와 최혜진이 합계 8언더파 276타로 공동 14위로 마친 것이 한국 선수 중 최고 성적이다.
[조
효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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