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집자주 = 유럽연합(EU)는 한때 기후위기 대응의 선두주자로 불렸습니다. 그러나 최근 유럽에서 친환경 정책에 대한 피로감과 이에 따른 정치 지형의 변화가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매일경제TV는 '넷제로(Net Zero)'를 둘러싼 유럽 내 갈등과 변화 양상을 짚고, 지속 가능한 에너지 정책이 갖춰야 할 조건을 되돌아봅니다.
◇ 정치에 흔들리는 넷제로(Net Zero)
한때 EU는 기후위기 문제 해결을 주도하는 리더 역할을 자청했습니다.
2000년대 초반부터 정책 기반을 다진 유럽은 2010년대 중반 이후 본격적으로 탈탄소화에 속도를 냈고, 2020년대 초반에는 전례 없는 속도로 에너지 전환을 추진했습니다.
탄소중립 선언, 탈원전, 풍력·
태양광의 급속 확장, 내연기관 자동차 퇴출 계획 등 강력한 넷 제로(Net Zero) 정책이 시행됐고, 유럽은 기후 윤리를 앞세운 '이념의 실험장'으로 주목받았습니다.
하지만 지금 유럽은 그 결과, 정치적 혼란을 겪고 있으며, 친환경 정책 자체가 근본부터 흔들리고 있습니다.
◇ '친환경 피로(Green Fatigue)' 속 극우 정당 급부상
지난해 유럽의회 선거에서 넷제로 정책에 회의적인 우파 정당들이 압도적인 의석을 확보하면서 각종 친환경 정책들은 전면 수정되고 있습니다.
극우 성향의 정당인 유럽을 위한 애국자들(PfE) 84석(11.7%), 유럽 보수개혁 그룹(ECR) 78석(10.8%), 주권국가 유럽(ESN) 25석(3.5%)을 차지하면서 거대 정치 세력으로 떠올랐습니다.
이들 세력을 합치면 다수당인 유럽국민당(EPP) 188석(26.1%)과 거의 대등한 규모입니다.
이는 유럽의회 역사상 처음 있는 일입니다.
심지어 다수당인 EPP마저도 넷제로 정책의 속도 조절과 산업경쟁력 확보를 내세우며 '실용적 우회전'으로 방향을 틀고 있씁니다.
◇ 급등한 전기요금에 돌아선 민심
과거에는 기후 대응을 지지하던 유럽 시민들이 최근 몇년 사이 급격히 등을 돌렸습니다.
그 이유는 에너지 전환으로 인한 생활비 상승과 경제적 부담때문입니다.
고공행진하는 전기요금, 전기차·보일러 교체 비용, 가파른 탄소세 인상 등 넷제로 실천에 따른 부담이 시민과 중소기업에게 전가되면서 '지속가능성'은 곧 '생활 불안'으로 인식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독일·프랑스·네덜란드 등 유럽 주요국에서는 기후정책이 가계경제를 압박하는 주범으로 지목받기 시작했습니다.
예를 들어, 독일에서 기존 방식의 보일러(화석연료)는 4천 유로(한화 약 600만 원) 정도면 설치할 수 있지만 친환경 방식(히트 펌프)의 보일러는 최대 3만5천 유로(한화 5천500만 원)을 투자해야 설치가 가능합니다.
독일 전기 요금은 2019년 대비 2023년까지 약 40% 가까이 상승하기도 했습니다.
또 2023년 1월 프랑스 제빵사들이 급등한 에너지 요금에 항의하며 파리에서 '바게트 시위'를 벌이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급등한 전기 요금과 원자재 가격 상승으로 인해 생업이 위협받고 있다며 정부의 실질적인 지원을 요구했습니다.
이처럼 생활 속에서 체감한 '친환경 피로'는 선거 결과로 이어졌고, 극우·우파 정당의 약진을 견인했습니다.
◇ 극우의 '에너지 포퓰리즘'…민심을 꿰뚫다
극우 정당들이 내세웠던 에너지 공약은 단순한 '반(反)환경'이 아니라 생활밀착형 에너지 공약으로 유권자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독일의 극우 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AfD)'는 탄소세 폐지, 기후보호법 전면 개정 등을 앞세우며 "전기요금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독일"이라는 구호를 내걸었습니다.
프랑스의 '국민연합(RN)'은 내연기관차 사용권 보장, 난방비 상한제 확대 등을 주장하며 에너지 정책을 시민의 생존권 문제로 재정의했습니다.
이들의 메시지는 복잡한 기후모델이나 2050년 탄소중립 로드맵이 아니라 "이번 겨울도 따뜻하게 지낼 수 있을까"라는 현실적인 질문에 집중하며 시민들의 공감을 얻었습니다.
◇ 기후윤리 vs 현실경제…실용적 접근의 필요성
이러한 민심의 변화 흐름이 기후윤리 자체를 부정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은 정책 설계자들이 간과했다는 반증입니다.
아무리 정당한 정책이라도 지금 당장 비용을 지불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틀린 정책'일 수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에너지 정책은 정파적 도구가 아닌 생존 전략으로 다뤄져야 하고, '사회적 수용성'이 확보된 실행 방식이 필요하다"고 강조합니다.
결국 지속가능한 미래를 설계하려면 오늘을 버텨낼 수 있는 정책부터 마련해야 합니다.
에너지 문제는 더 이상 기후 담론의 일부가 아니라 당장의 삶과 직결된 생존의 조건이 됐습니다.
보다 심층적인 분석은 매일경제TV가 선보이는 프리미엄 콘텐츠 플랫폼 《CEO인사이트》 제 16호 '에너지는 이제 생존의 조건: 지속가능성을 넘어서'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 김하영 기자 / kim.hayoung@mktv.co.kr ]
[ⓒ 매일경제TV & mktv.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