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습 매각에 뒤숭숭한 라이나생명...직원 반발·고배당 논란 '대주주 변경 험로'

미국 시그나그룹이 한국 라이나생명을 처브그룹에 매각하겠다는 계획을 기습적으로 발표하면서 라이나생명의 신사업 추진이 사실상 올스톱됐다.

그동안 숱한 매각설에도 한국 법인은 물론 미국 본사까지 “매각 계획은 없다”고 일관되게 밝혀왔던 터라 불투명한 매각 결정을 둘러싼 내부 반발이 확산 일로다.

라이나생명 직원들은 노조 설립 등 단체행동까지 불사하겠다며 단단히 벼르고 있어 매각과 대주주 변경 과정에서 험로가 점쳐진다.


알짜 생보사 라이나생명이 처브그룹으로 매각된다.

기습적인 매각 결정 통보에 내부 반발 등 내홍을 겪는 중이다.

<라이나생명 제공>

▶알짜 라이나 왜 파나
▷재무적 관점서 적기 판단한 듯
지난 10월 8일 미국 시그나그룹은 한국을 비롯해 대만, 뉴질랜드, 태국, 인도네시아, 홍콩 등 아시아태평양 지역 사업부와 터키 합작사를 처브그룹에 매각한다고 발표했다.

거래 가격은 총 57억5000만달러(약 6조9000억원)다.

이 가운데 라이나생명 가치만 6조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라이나생명의 지난해 순이익은 3572억원으로 삼성생명, 교보생명에 이은 국내 생명보험업계 3위다.


라이나생명은 1987년 외국계 생명보험회사 최초로 한국 시장에 진출해 텔레마케팅(TM) 채널 중심의 효율적인 영업 전략으로 성장세를 누렸다.

처브그룹은 미국의 기업보험 전문회사로 전 세계 54개국에서 재물보험, 특종보험, 개인상해보험, 건강보험 등을 제공한다.

한국에는 에이스손해보험과 처브라이프생명 등을 두고 있다.


미국 시그나그룹이 알짜 보험사인 라이나생명을 매각하기로 한 것은 지금이 몸값을 비싸게 받을 수 있는 적기라는 판단 때문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대주주인 시그나그룹 입장에서는 재무적 관점에서 자본 회수 불투명성을 고려했을 것이라는 게 금융권 시각이다.


간단히 말해 보험업은 고객에게 받은 돈(부채)을 열심히 투자해서 운용을 잘한 뒤 여기서 번 이익 중 일부는 고객에게 보험금으로 지급하고 나머지 일부는 보험사 자본금으로 유보하는 구조다.

특히 보험업은 주된 투자 자산인 채권의 듀레이션 관리가 핵심이다.

듀레이션은 주식 변동성을 뜻하는 베타에 대응되는 개념이다.

일반적으로 채권 만기가 길수록 듀레이션이 커지며 이는 곧 시장 금리에 대한 채권 가격 변동성이 커진다는 의미다.

생명보험 상품은 특성상 손해보험보다 만기가 길다.

가령, 10년 만기인 보험 상품에 가입한 사람들이 보험을 해약하려 할 때 이에 맞춰 보험금을 돌려주려면 자산-부채 듀레이션을 최대한 일치시켜야 한다.

지금은 금리가 사실상 제로 수준인 데다 보험 소비자 수명은 갈수록 길어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부채를 원가가 아닌 시가로 평가하는 IFRS17이 2023년 도입되면 자산과 부채 간 만기의 불일치가 커지고 이는 곧 건전성 지표인 지급여력비율(RBC) 저하 우려로 직결된다.


물론 라이나생명은 이런 우려에서 한발 비켜서 있다.

새 회계 제도 도입에 따른 자본 확충 뇌관으로 평가받는 확정금리형 종신보험이나 갱신형 상품 비중이 타사 대비 월등히 낮다.

그럼에도 저금리로 운용 수익률을 올리기 힘들고 평균 수명 연장으로 상품 만기가 길어져 투자 자산 듀레이션을 관리하기가 과거보다 까다롭게 변한 것은 사실이다.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시그나그룹 입장에서는 새 회계 제도 도입 전 자본 확충 부담이 현저히 낮다는 라이나생명의 상대적 비교우위를 지렛대 삼아 매각가를 최대한 높게 받고 싶었을 것”이라며 “그렇지만 한국 보험 산업 환경이 갈수록 악화하는 점에서 자칫 추가적인 자금을 투입했다 엑시트 시점을 특정하기 힘들 것이라는 판단이 작용했을 것으로 본다”고 촌평했다.


문제는 미국 본사 주도로 매각 결정이 이뤄진 뒤 한국 라이나생명에 전달되는 과정이 기습적으로 이뤄졌다는 데 있다.

라이나생명 매각설이 국내에서도 대두된 것은 지난해 상반기다.

미국 시그나그룹이 한국 라이나생명 매각을 위해 골드만삭스와 주관사 계약을 체결했다는 소식이 금융투자업계발로 확산됐다.

매각설이 가라앉지 않자 지난 4월 조지은 사장이 직접 매각설을 강하게 부인했다.


보험업계 관계자는 “당시에는 조 사장 역시 매각 관련 계획을 미국 본사로부터 전혀 공유받지 못했던 것 같다.

대주주인 본사에서 매각 대상 법인 사장의 의중까지 고려할 이유는 없다.

조 사장도 매각 발표가 임박한 시점에서야 본사로부터 관련 사실을 공유받고 난감해했던 것으로 안다”고 귀띔했다.


▶과제 첩첩
▷처브와 시너지 의구심
매각 결정 이후 풀어야 할 숙제도 첩첩이다.


무엇보다 내부 직원 반발을 추스르는 게 시급한 과제다.

라이나생명 관계자는 “상식적으로 매각 계획을 한국 법인 경영진이 알았다면 디지털 손보사 등 신사업 추진을 결정했겠느냐”며 “묵묵히 일한 직원들 덕에 미국 본사가 챙겨 간 배당만 1조원이 넘는데 이렇게 뒤통수 맞을 줄 꿈에도 몰랐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익명 앱인 블라인드 등에서는 직원협의체를 단체협상이 가능한 노조 설립으로 전환하자는 등 강경한 목소리가 들끓는다.


미국 본사도 부랴부랴 달리기에 나섰다.

당초 시그나는 매각 위로금으로 근속 연수 1년 이상 직원들을 대상으로 매각 전 기본급의 400%를 지급하고 1년 뒤 200%를 지급하는 방안을 제시했으나 직원들은 ‘일방적인 결정’이라며 반발했다.

결국 시그나는 대주주 변경 승인이 난 직후 800%를 지급하고 다시 1년 뒤 400%를 지급하는 방식을 제안했다.

라이나생명 직원협의회가 지난 10월 15일 성명서를 내고 노조 설립을 예고하자 화들짝 놀란 시그나가 한발 물러선 결과다.


당장만 문제가 아니다.

향후 매각이 본격화하는 과정에서 고용 보장과 처우 개선 등을 두고 언제든지 갈등이 재연될 가능성이 있다.

에반 그린버그 처브그룹 회장 겸 대표이사는 연말 전 한국을 찾아 라이나생명 매각과 관련한 세부 내용을 협의할 계획으로 알려졌다.


금융당국에서는 외국계 보험사의 잦은 이탈과 이에 따른 대주주 변경을 마뜩잖아 하는 기류가 퍼져 있다.

순이익의 대부분을 폭탄 배당으로 해외 본사에서 가져가는 데다 국내 재투자는 워낙 인색한 탓이다.

라이나생명 역시 최근 10년간 총 1조1650억원에 달하는 금액을 미국 본사로 배당했다.

2018년에는 3701억원의 당기순이익 중 95%에 달하는 3500억원을 배당해 ‘국부 유출’ 논란이 거셌다.

최근 국정감사에서도 외국계 금융사의 잦은 이탈과 고율 배당이 도마에 올랐다.

이런 이유로 대주주 변경 심사 과정에서 금융당국이 더욱 까다로운 잣대를 들이댈 가능성이 높다는 관측이다.

보험업계 관계자는 “가파른 물가 상승으로 인플레이션 우려가 커지면서 보험료 역시 인상 압박이 거세다.

대주주 변경 뒤 새 회계 제도 시행과 맞물려 처브그룹이 자본수익률 개선을 위해 보험료 인상에 나설 수 있어 금융당국 속내가 편치 않을 것”이라 촌평했다.


처브그룹과의 시너지 여부도 불투명하다.

보험업계에서는 처브그룹이 한국에서는 라이나생명을 중심으로 보험업을 영위하려 처브라이프와 흡수합병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무엇보다 양 사 간 합병에 따른 시너지 효과는 미미할 것이라는 게 대체적인 예상이다.

지난 상반기 기준 라이나생명의 총자산은 5조2594억원인 반면, 처브라이프는 1조8590억원으로 합병 시 7조1184억원으로 늘어난다.

이는 중소 생보사인 하나생명(5조3938억원)과 DGB생명(6조8091억원)을 웃도는 수준이다.

수입 보험료 증가 효과도 미미하며 당기순이익은 합병 전보다 오히려 줄어든다.


보험업계 관계자는 “라이나생명 매각으로 디지털 손보사 설립 열기가 한풀 사그라질 것 같다”며 “합병 과정에서도 고용 보장과 처우 등을 놓고 언제든 갈등이 불거질 수 있어 금융당국이 예의 주시하는 것으로 안다”고 촌평했다.


[배준희 기자]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131호 (2021.10.27~2021.11.02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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