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1975년 사이공 보는 듯"…아프간 엑소더스 인파에 카불공항 대혼돈

◆ 아프간, 필사의 탈출 ◆
이슬람 무장세력 탈레반 대원들이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의 대통령궁을 장악한 모습이 15일(현지시간) 알자지라 방송을 통해 공개됐다.

미국 정부가 지난 5월 아프간에 주둔 중인 미군 철수를 개시한 지 3개월 만이다.

탈레반은 이날 아슈라프 가니 대통령이 떠난 궁에 입성해 "아프간에서 전쟁은 끝났다"며 승리를 선언하고 탈레반기를 게양했다.

[AP = 연합뉴스]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에 위치한 미국대사관이 15일(현지시간) 성조기를 내렸다.

아프간전쟁 20년의 마침표를 찍는 상징적인 장면이다.

4200명에 달하는 아프간 대사관 직원들은 카불 하미드 카르자이 국제공항으로 전원 대피했다.

탈레반의 기습적인 카불 점령으로 인해 육로가 차단되자, 미군은 헬기를 동원해 대사관에서 공항으로 미국인들을 실어날랐다.

아프간에서 전쟁비용만 2조2600억달러를 투입했지만 빈손으로 긴급히 빠져나가는 치욕적인 탈출이다.

1975년 월남 패망 직전 사이공(현 호찌민) 함락 당시 미군이 미국인들을 헬기를 통해 남중국해 함정으로 힘겹게 이동시켰던 것과 판박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전문가의 말을 인용해 이번 사태를 "스테로이드제를 맞은 사이공 같다"고 표현했다.


미국은 이번에 대피 지원 목적으로만 병력을 6000명까지 늘렸다.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은 아프간에 남는 것은 미국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다면서 완전 철군을 재확인했다.

영국, 캐나다, 독일, 한국 등 미국 동맹국들도 아프간 대사관을 빠르게 철수하고 있다.


이날 카불에 '무혈입성'한 탈레반은 아프간 대통령궁을 장악하고 탈레반 국기를 게양했다.

이슬람 무장조직인 탈레반은 "아프간에서 전쟁은 끝났다"며 승리를 선언하고 "개방적인 이슬람 정부를 구성하겠다"고 밝혔다.

국제사회를 향해서는 "고립된 상태를 원하지 않고 평화로운 국제관계를 원한다"는 유화 메시지를 보냈다.

탈레반이 대대적인 공세에 나선 지 넉 달 만에 아프간을 완전 장악했다.

탈레반은 아프간 정부군으로부터 미국산 무기들까지 모두 손에 넣었다.

이제 외국군이 모두 떠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탈레반 지도부는 군인들에게 "민간인에게 겁주지 말라"는 지령도 내렸다.

그러나 아프간 시민들은 탈레반의 보복 가능성에 공포심을 갖고 있다.

또 과거와 같이 여성의 교육·외부활동에 대한 억압도 재현될 수 있다.

탈레반에서 벗어나려는 피난 행렬이 계속되는 가운데 카불 시내에서 폭발음과 총격 소리도 들리는 등 여전히 치안은 불안하다.


카불 국제공항으로 몰려든 탈출 인파들이 "태워달라"며 활주로까지 장악하자 이를 쫓아내려는 미군이 공중에 경고 사격을 가하면서 최소 5명이 사망하는 사고도 발생했다.

이날 인디아TV 등 일부 외신은 탈출을 시도하는 시민들이 이륙 중인 항공기 바퀴 부근에 매달렸다가 최소 3명이 지상으로 추락해 숨지는 참사가 일어났다고 보도했다.


우즈베키스탄 국방부는 16일 입장문을 내고 자국 영공에 침투한 아프간 군용기 한 대를 격추했다고 밝혔다.

조종사의 생존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으나 현지 병원에는 군복을 입은 환자 2명이 입원해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탈레반 점령 소식에 정부군 조종사가 군용기를 이용해 우즈베키스탄으로 탈출을 시도한 것이라는 추측이 나온다.


아프간을 20년 만에 장악한 탈레반이 미국을 밀어내고 이슬람 극단주의 부활을 알리고 있다.

테러조직인 알카에다와의 연계 가능성도 제기된다.

이렇게 되면 아프간은 중동의 화약고로 부상해서 주변국뿐만 아니라 국제사회에 심각한 위협으로 작용할 수 있다.


탈레반은 과도정부 수반으로 내무장관을 지낸 정치인이자 학자인 알리 아흐마드 자랄리를 임명할 것으로 알려졌다.

이어서 탈레반 실세들에게 순차적으로 권력을 이양할 가능성이 크다.


탈레반의 수장은 말라위 하이바툴라 아쿤드자다 최고지도자로, 2016년부터 조직을 이끈 것으로 전해진다.


탈레반 2인자로 불리는 물라 압둘 가니 바라다르 정치국장은 1990년대 물라 무하마드 오마르와 탈레반을 공동 창설한 인물이다.

주로 외치를 담당하며 대외 소통창구 역할을 맡고 있다.

이란, 러시아 등을 오가며 탈레반 외교를 책임진다.

지난달 중국 톈진을 방문해 왕이 외교담당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을 만나기도 했다.

그 밖에 오마르의 아들인 물라 무하마드 야쿠브도 군사작전을 총괄하는 요직에 올라있다.

탈레반 내부 무장단체 하카니 네트워크를 이끄는 시라주딘 하카니는 재정과 군사물자 조달을 책임지는 것으로 전해졌다.


국제사회에서 탈레반을 바라보는 시선은 복잡하다.

미국은 기나긴 아프간전쟁의 굴레에서 빠져나왔다는 점을 중시한다.

블링컨 국무장관은 탈레반의 합법정부 인정 여부와 관련해 "국민 기본권을 유지하고 테러리스트를 양산하지 않아야만 미국과 일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영국은 탈레반 정권 자체를 거부하는 모습이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는 "아무도 성급히 탈레반 정권을 인정하지 않기를 바란다"며 앞으로 몇 달간 탈레반 극단주의 세력의 위협을 막기 위한 국제사회 협력을 주문했다.


러시아는 그동안 미군 철수에 따른 아프간 정세 악화가 중앙아시아 지역에 혼란을 초래하고, 이것이 다시 자국 안보에까지 악영향을 미치는 등 위기 전파 가능성에 우려를 표시해 왔다.


탈레반을 인정하지 않던 인도 정부는 지난 6월부터 탈레반과 접촉하고 있다.


[워싱턴 = 강계만 특파원 / 서울 = 김덕식 기자 / 고보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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