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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미래] 혈연·지연·학연을 넘어서
기사입력 2021-02-27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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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무서운 세상을 사신 듯하다.

틈만 나면 형제를 앉혀놓고 세상에는 도둑놈·사기꾼·강도가 넘쳐나니 조심하라고 말씀하셨다.

젊어서 무작정 상경 후, 온갖 고생을 치른 경험이 짙게 담겨 있었다.

몇 번이나 떼인 임금, 돈을 빌려가서 사라진 지인, 월급봉투를 노리고 달려든 강도, 속아 산 길거리 물건 등. 이야기의 끝은 늘 "믿을 건 형제밖에 없으니 눈 부릅뜨고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아라"였다.


'동물적 생존 감각'이 아버지 세대의 내면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어린 나이에 전쟁의 참혹함과 전후의 혼란을 겪었다.

친척 한둘은 전쟁 때 총에 맞아, 배고파, 병들어 죽었다.

보릿고개를 맞아 하루 한 끼로 버텼고, 전쟁 트라우마를 못 이긴 이들이 곳곳에서 난장을 부렸다.

20대엔 밥만 먹여주는 곳에서 일을 배우고, 월남이나 중동에서 전쟁을 치르거나 힘겹게 일했다.


아버지 세대는 공조직을 믿지 못했다.

법보다 주먹을 선호하는 군인들이 입맛 따라 일을 처리했고, 권력기관은 힘없는 이들에게 툭하면 억울한 죄를 씌웠으며, 공무원은 돈을 먹어야 작동하는 자판기였다.

일을 치를 때마다 뇌물이 필요하고 연줄을 타야 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불굴의 세대에 속했다.

'법 없이 살 양반'이 상처 난 마음을 견디면서 나라와 집안의 기틀을 마련했다.


인간은 유대 없이 살 수 없으므로 저신뢰 사회에서도 기댈 곳을 찾을 수밖에 없다.

그것이 연(緣)의 네트워크, 즉 혈연·지연·학연이다.

"믿을 건 형제밖에 없다"는 가족주의, 타향을 배척하는 지역주의, 능력보다 학교를 중시하는 학벌주의다.

공동체 전체가 공유하는 공정한 사회 규범이 모자란 사회에서 적은 신뢰 자본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세대의 어두운 유산이다.

아버지를 존경하나 더는 아이들한테 물려줄 수 없고, 아이들 역시 기성세대의 모습에서 가장 크게 반발하는 지점이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연의 네트워크를 전혀 벗어나지 못했다.

여전히 낙하산이 날아다니고 청탁이 횡행한다.

자본과 권력이 법의 지배를 거부하고 중산층은 재산과 지위의 편법적 대물림을 욕심낸다.

체육계 폭력에서 보듯, 약자에 대한 갑질과 괴롭힘은 일상적이다.

이 모든 것이 신뢰를 파괴하고, '한국이 싫어서'로 이어진다.

'트러스트'에서 미국의 정치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민주주의도, 경제 성장도, 사회 복지도, 신뢰 자본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고 말한다.

사회 발전에 따라 증가하는 상호작용에 필요한 거래비용이 갈수록 높아지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가 선진 사회로 나아가려면 낡은 규범에 대한 척결과 함께 신뢰 자본의 전면적 재구축이 필요하다.

시대정신이 여기에 있다.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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