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3월 실리콘밸리은행 파산 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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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8월 엔
캐리·아시아 증시 대폭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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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4월 뉴욕증시 뉴스 오보 급변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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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5월 대만달러 가치 역사적 급등
모바일 뱅킹이 만든 미친 ‘돈의 속도’
지금껏 경험 못 한 ‘아웃라이어’ 속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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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용 한국은행 총재 |
“특정 환율 수준보다는 속도를 조절해야 한다.
”
작년 11월 20일 트럼프 당선 후 이른바 ‘트럼프 트레이드’ 효과로 뉴욕 증시와 달러값이 한껏 달아올랐습니다.
이에 따라 원화 가치가 떨어지면서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시장의 염려를 이렇게 달랬습니다.
원화 절하 속도가 다른 통화 대비 비정상적으로 빠른 수준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취지입니다.
이 말에 담긴 ‘속도’는 ‘변동성’의 이음동의어입니다.
그런데 이 속도라는 단어는 비단 한은 총재 뿐 아니라 다른 중앙은행 총재들이 함께 고민하는 중요한 현상으로 부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난 5일 황금연휴 기간에 터진 대만달러의 변동성은 이 ‘속도’의 무서움을 실감케 하는 새로운 사례가 됐습니다.
시장의 이상 움직임 혹은 부정확한 뉴스에 전 국민이 손에 쥔 스마트폰을 켜고 일제히 매도 버튼을 누를 경우 과거 볼 수 없었던 비이성적 변동성이 발생하는 것이죠.
달러 대비 대만달러 환율은 불과 2거래일 새 8% 급락(=대만달러 가치 상승)하며 역대 볼 수 없었던 변동성 장세로 기록됐습니다.
국내 언론들은 급락 폭에 주목했는데 매일경제는 관련 보도에서 기술적 이상 징후를 함께 조명했습니다.
바로 각 은행 사이트와 앱에서 발생한 ‘서비스 장애’ 현상입니다.
당시 대만 금융당국 발표를 보면 시민들의 환전 수요 급증으로 5일 오전 모바일 뱅킹 앱에서 서비스 정체와 시스템 지연이 나타났습니다.
해당 은행들은 모바일 뱅킹의 트래픽을 분산시키고자 고객들에게 모바일이 아닌 인터넷 뱅킹으로 거래해달라고 공지했습니다.
순식간에 모바일 뱅킹으로 트래픽이 몰리자 분산 조처를 한 것인데, 그만큼 모바일을 이용한 돈의 이동 수요와 속도 압력이 현대 기술로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증가하고 있음을 가리킵니다.
관련해서 이창용 한은 총재는 작년 8월 5일 아시아 증시 대폭락과 엔
캐리 트레이드 청산 위험을 거론하며 이 사태가 주는 교훈으로 ‘돈이 움직이는 속도’를 강조한 바 있습니다.
그는 아시아 폭락 장을 만든 주체가 ‘기관 투자자’였던 반면, 다음날 급반등을 이끈 주체가 스마트폰을 이용해 대출한 ‘개미투자자’였음을 환기합니다.
한국 시장의 강력한 디지털 기반 금융 서비스로 인해 개미투자자들이 빠르게 돈을 빌려 주식 매수에 나섰고, 이것이 한국 증시 안정성에 분명한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합니다.
이 미친 돈의 이동속도 사례가 작년 8월 증시 대폭락 상황에서는 빠른 회복력을 일군 긍정적 동인이었지만 2023년 3월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 뱅크런은 정반대의 공포 사례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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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쩡했던 은행을 순식간에 파산으로 이끈 2023년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 뱅크런 사태 당시 현장 모습. <UPI 연합뉴스> |
총자산이 276조원에 이르는 SVB는 미 국채 매각 손실이 알려진 후 예금자들이 스마트폰으로 앞다퉈 예금을 인출하는 통에 불과 36시간 만에 파산했습니다.
이 사건을 두고 이창용 총재는 “만약 한국에서 SVB 파산과 같은 은행 위기가 터지면 미국보다 예금 인출 속도가 100배는 빠를 것”이라고 염려하기도 했습니다.
문제는 ▲미국의 뉴욕증시 폭락(2018년 2월 5일) ▲-SVB 뱅크런 파산(2023년 3월 8~10일) ▲아시아 증시 대폭락(2024년 8월 5일) ▲뉴욕증시 뉴스 오보 급변동(2025년 4월 7일) ▲대만달러 가치 급등(2025년 5월 5일) 이벤트에서 볼 수 있듯이 돈의 미친 속도가 금융시장에 충격을 가하는 주기가 짧아진다는 점입니다.
2018년 2월 뉴욕증시에서 다우지수가 장 후반 한때 6% 넘게 빠졌는데 시장은 모바일 뱅킹 증가와 더불어 알고리즘 매물 폭탄이 쏟아지면서 비정상적인 폭락세가 연출됐다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지난달 7일에는 이와 유사하게 미 CNBC 오보에 따른 뉴욕 증시의 급변동 사건이 터졌습니다.
‘트럼프가 중국을 제외한 모든 나라에 관세를 90일 일시 중단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는 단 한 줄의 속보에 수 조원이 움직였습니다.
이 한 줄의 뉴스가 ‘가짜’라는 백악관 입장이 나오기까지 10여분 새 시가총액 기준 3조5000억원이 소멸했습니다.
이에 앞서 작년 8월 5일 아시아 증시 대폭락 때는 한국 증시에서 235조원(코스피 -8.77%)의 시가총액이 사라졌고 세계 3위 증시인 일본(닛케이 -12.4%) 시장의 충격은 더 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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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닛케이 지수가 사상 최대폭인 12.4% 급락한 작년 8월 5일 도쿄 시내 주가 전광판 모습. <AFP 연합뉴스> |
금융시장을 패닉으로 이끄는 가장 위협적인 초크포인트가 투매 발작을 일으키는 ‘알고리즘 매매’와 더불어 스마트폰으로 이동하는 돈의 미친 ‘이동 속도’인 것이죠.
이처럼 뉴스와 현상의 진위를 판가름할 틈을 주지 않는 돈의 움직임으로 인해 자본시장에서 기존의 경험과 예측을 크게 벗어나는 ‘아웃라이어’ 사례가 속출하고 있습니다.
이 역사적 사건에서 대체로 투자자들은 웃음기가 아닌 겁에 질린 표정을 짓습니다.
트럼프발 경제 불확실성으로 인해 시장에 오보와 잘못된 신호가 더 증가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돈의 미친 속도가 일으키는 변동성 공포는 올해 더 자주, 더 큰 진폭으로 투자자들과 마주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 뚜렷한 신호음이 불과 2거래일로 일년 치 흔들림을 보인 대만달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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