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매경 명예기자 리포트 ◆
한때 세계 시장을 주도했던 한국 제조업이 설계 중심 품질혁신의 부재로 인해 글로벌 경쟁에서 점차 밀려나고 있다.
1990년대 후반부터 2010년대 초반까지 삼성, LG 등 주요 기업이 적극적으로 도입했던 품질혁신 전략이 더 이상 진전되지 못하면서, 3세대 품질혁신을 이룬 글로벌 선진 기업들과의 격차가 벌어지는 상황이다.
반도체, 자동차, 가전 등 핵심 산업에서 한국 기업들은 여전히 생산 공정 중심의 품질 개선 방식에 머물러 있는 반면 미국과 대만, 중국 기업들은 설계 단계에서부터 품질을 관리하는 방식으로 전환하며 경쟁력을 끌어올리고 있다.
식스시그마 이후 멈춰버린 한국의 품질혁신
1996년 LG와
삼성SDI를 중심으로 본격 도입된 식스시그마(Six Sigma)는 2000년대 초반까지 한국 제조업의 품질혁신을 이끄는 핵심 전략이었다.
식스시그마란 기업에서 전략적으로 완벽에 가까운 제품이나 서비스를 개발·공급하려는 목적으로 정립된 품질 경영 기법이다.
삼성과 LG를 필두로 주요 제조업체들은 식스시그마 기법을 활용해 불량률을 최소화하고 생산성을 높이는 데 집중했다.
이를 통해 2000년대 초반 한국은 품질경영의 선두주자로 도약할 수 있었고, 디스플레이와 반도체 같은 첨단 산업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그러나 2010년을 전후로 삼성과 현대자동차를 비롯한 주요 기업들이 식스시그마 추진을 멈추면서, 품질혁신의 흐름이 끊기고 정체기에 접어들었다.
이후 품질 개선 활동은 개별 기업 단위에서만 이뤄지며 국가적인 품질혁신 운동으로 확산되지 못했다.
이 시기 글로벌 선진국들은 식스시그마를 한 단계 발전시켜 '3세대 품질혁신'으로 전환했다.
반면 한국은 기존 방식에 머무르며 새로운 혁신을 도입하지 못했다.
이로 인해 중국과 대만이 품질과 기술력 면에서 한국을 빠르게 따라잡았고, 대만의 TSMC는 반도체 산업에서 압도적인 경쟁력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설계 기반 품질혁신이 자리 잡은 글로벌 시장
미국과 유럽 주요 기업들은 2000년대 초반부터 설계 단계에서 품질을 예측·관리하는 '디자인 포 식스시그마(Design for Six Sigma·DFSS)'를 도입했다.
설계 단계에서 빅데이터와 통계 분석을 활용해 문제를 사전에 해결하고 생산 공정으로 넘어가는 구조다.
이를 통해 시행착오를 줄이고, 원가 절감과 품질 경쟁력을 동시에 확보하는 방식이 자리 잡았다.
특히 GE, 인텔, 애플과 같은 글로벌 기업들은 품질혁신을 위한 연구개발(R&D) 단계에서부터 DFSS를 적용하며 제품 성능과 신뢰성을 극대화하는 데 집중했다.
반면 한국은 여전히 품질 문제가 발생하면 생산 공정에서 해결하는 방식에 의존하고 있다.
이러한 접근 방식으로는 제품 개발 속도가 빨라지는 환경에서 경쟁력을 유지하기 어렵다.
특히 반도체와 자동차 분야에서는 설계 품질 확보 여부가 핵심 경쟁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최근
삼성전자가 대만 TSMC에 반도체 파운드리 시장 점유율을 빼앗긴 것도 이러한 설계 기반 품질혁신이 부족한 탓이다.
반면 TSMC는 고객이 설계한 반도체를 최적화해 생산성과 성능을 향상시키는 역량을 갖추고 있어 퀄컴, 애플, 엔비디아 등 글로벌 반도체 고객사를 대거 확보했다.
반도체 산업에서 품질혁신이 필수인 이유
반도체 산업에서는 미세공정이 정밀할수록 불량률이 높아지는 경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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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노, 2
나노 공정으로 갈수록 웨이퍼 한 장에서 생산되는 반도체 칩 중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비율(수율)이 낮아질 가능성이 커지는데, 이를 극복하는 것이 곧 수익성 확보로 직결된다.
TSMC는 수십 년간 축적된 데이터베이스와 인공지능(AI) 기반 품질 분석을 활용해 초기 설계 단계에서부터 생산공정의 공정능력, 제조의 난이도, 비용을 반영해 제품을 최적화하는 역량을 갖추고 있다.
반면
삼성전자는 여전히 공정 중심의 품질 개선 방식에 의존하며 데이터 축적과 설계 개선 간의 연계가 부족한 실정이다.
이 같은 차이는 고객 유치 경쟁에도 영향을 미친다.
퀄컴이
삼성전자를 떠나 TSMC로 이동한 것도 수율과 전력 효율성 때문이었다.
퀄컴이 설계한 반도체를 동일한 조건에서 생산했을 때, TSMC에서 제조한 칩이 더 낮은 전력 소모와 높은 성능을 보여서다.
이는 설계 단계에서부터 품질을 예측하고 반영한 결과로, 단순한 공정 개선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자동차 산업도 3세대 품질혁신 필요
자동차 산업에서도 품질관리는 핵심 경쟁력이다.
기존의 품질 관리는 주로 생산 공정에서 이뤄졌지만, 최근 글로벌 자동차 제조사들은 설계 단계에서부터 품질을 예측하고 반영하는 방식으로 전환하고 있다.
독일의 메르세데스-벤츠와 일본의 도요타는 DFSS 기법을 적용해 신차 설계 단계에서부터 품질을 확보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신차를 개발할 때 빅데이터와 통계 분석을 활용해 예상되는 품질 문제를 사전에 제거함으로써, 출시 후 품질 문제로 인한 리콜 비용을 최소화할 수 있다.
반면 현대자동차는 여전히 2세대 품질혁신 방식에 머물러 있다.
신차 출시 이후에도 지속적인 품질 개선이 필요하며, 설계 단계에서 품질을 완벽하게 확보하지 못한 채 양산을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현대차는 미국 시장에서 전기차 품질 문제로 잦은 리콜을 겪고 있으며, 이러한 문제가 브랜드 신뢰도 하락으로 이어지고 있다.
설계 단계에서 품질을 예측하고 관리하는 능력이 부족하면, 결국 소비자 만족도가 떨어지고 시장 점유율을 유지하기 어려워진다.
한국 가전 기업이 겪는 품질혁신의 한계
삼성전자와
LG전자가 주도하는 가전 산업에서도 품질혁신 방식이 글로벌 경쟁에서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과거 한국 기업들은 일본 가전업체들보다 뛰어난 품질을 확보하며 세계 시장에서 빠르게 점유율을 높였다.
하지만 최근 들어 중국 기업들이 품질 경쟁력을 크게 강화하면서 위협이 가시화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하이얼이다.
중국 하이얼은 2016년 미국 GE의 가전 부문을 인수한 이후, GE의 품질 관리 시스템과 설계 기반 품질혁신 역량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글로벌 가전 시장에서 빠르게 성장했다.
LG전자는 생활가전 부문에서 세계 1위를 유지하고 있지만,
삼성전자는 최근 품질 문제로 인해 미국 시장에서 일부 제품이 신뢰를 잃는 상황을 겪고 있다.
특히 미국 소비자 리뷰 사이트에서는 삼성 냉장고 제품이 압축기 문제로 인해 잦은 고장을 일으킨다는 평가가 나오면서 브랜드 이미지에 타격을 입고 있다.
미국은 학부 교육부터 설계 품질을 가르치지만, 한국은 여전히 2세대 품질에 머물러 있다.
즉, 미국은 2000년대부터 공대 학부 과정에서 품질을 기반으로 제품 및 서비스를 상품화하는 설계 과정을 체계적으로 교육함으로써 산업 현장에서 DFSS와 같은 설계 중심 품질혁신 기법이 자연스럽게 정착됐다.
반면 한국에서는 전통적인 공학 중심의 교육이 이뤄지고 있으며 산업공학과에서조차 2세대 품질 위주의 교육이 진행되고 있다.
이로 인해 산업 현장에서 설계 기반 품질혁신이 제대로 정착되지 못하고 있으며, 결국 글로벌 경쟁에서 점차 밀려나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한국의 대학 교육 과정에서는 여전히 기계공학, 전자공학, 화학공학 등 전공별로 기술 중심 교육이 이뤄지고 있으며, 설계를 중심으로 품질 관리 및 통계적 접근법을 융합하는 교육은 미흡한 실정이다.
중국 기업 성장, 한국 제조업 기반 흔들
한국 제조업의 경쟁력이 흔들리는 사이, 대만과 중국은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대만의 TSMC는
삼성전자를 제치고 반도체 파운드리 시장을 장악했으며, 중국의 전기차 및 가전 기업들은 기술력 향상을 바탕으로 한국 기업을 위협하는 수준에 도달했다.
특히 중국은 품질혁신 속도에서 과거 한국이 일본을 따라잡던 방식과 유사한 전략을 취하고 있다.
주요 기업들이 설계 단계에서부터 품질을 철저히 관리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생산성을 높이고 글로벌 시장에서 점유율을 확대하는 모습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한국 제조업이 지속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기술 경쟁이 아니라 설계 단계에서부터 품질을 관리하는 시스템을 도입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기업 차원의 변화뿐만 아니라 교육 및 국가 정책 차원에서도 품질혁신을 지원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야 한다.
설계 중심 품질혁신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한국의 반도체, 자동차, 디스플레이 등 주요 산업은 글로벌 경쟁에서 더욱 밀려날 가능성이 높다.
지금이 마지막 기회다.
3세대 품질혁신을 도입해야만 한국 제조업이 다시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을 회복할 수 있다.
식스시그마
기업에서 품질혁신과 고객만족을 달성하기 위해 실행하는 21세기형 기업경영 전략으로, 결점을 제로에 가깝게 줄이는 품질목표(100만개 중에 3~4개. 시그마는 통계에서 표준편차를 의미한다)를 지칭.
[박승주 기자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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