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업 인구대응 평가 ◆


제조업 분야 중견기업에서 근무 중인 30대 여성 직장인 A씨는 수년째 출산을 미루고 있다.

회사에서 자리가 사라질 것 같은 불안감 때문이다.

그는 "주변 사례를 보면 육아휴직 후 돌아올 자리가 없을 것이라는 식으로 압박을 주는 일이 심심치 않게 있었다"며 "경력단절을 막기 위해 출산을 포기하든지 육아를 위해 퇴사하든지 선택지는 둘 중 하나"라고 토로했다.


국내 기업들의 인구위기 대응은 '낙제점'을 면치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인구절벽에 직면해 정부가 출산·육아 지원책을 잇달아 내놓고 있지만 현장에서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지적이다.


18일 매일경제와 한반도미래인구연구원은 국내 최초로 자산 규모 1조원 이상 기업 300곳을 대상으로 EPG(환경·인구·투명경영) 경영평가 점수를 발표했다.

올해 3월 매일경제와 한미연이 제34차 국민보고대회에서 EPG 경영을 제안한 데 따른 후속 조치다.

EPG는 ESG에서 'S(책임·Social)'를 'P(인구·Population)'로 바꾼 용어다.


EPG 평가에서 300개 기업 평균 점수는 55.5점에 그쳤다.

최고점은 85.3점이었으며 최저점은 16.2점으로 나타났다.

기초 평가 17개 지표를 기준으로 삼성전기(85.3점)가 1위를 차지했으며 롯데정밀화학(83.8점)과 신한카드·KB국민카드·KT&G(80.9점)가 뒤를 이었다.


대부분 기업은 다방면에서 취약점을 노출했다.

남성 육아휴직을 의무화한 기업은 5%인 15곳에 불과했다.

출산·육아휴직 복귀 지원 프로그램을 체계적으로 운영하는 곳도 27곳에 그쳤다.


산업계에서는 대부분 출산·양육 지원 제도가 사용자가 아닌 근로자에게만 초점이 맞춰진 점을 지적한다.

정만기 한국산업연합포럼 회장은 "기업이 부담해야 하는 인력난이나 생산성 저하 등에 대한 사업주 지원책은 부족하다"며 "가령 출산을 장려하는 기업에 세금을 깎아주는 인적자본 투자세액공제 도입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우수 기업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기 위해 기업공시 항목에 이를 반영하자는 의견도 제시됐다.

포괄적으로만 공시했던 출산·육아휴직 항목을 상세히 밝히자는 것이다.

출산·육아휴직 사용률, 휴직기간, 복직자 규모, 복직기간 등을 공시할 필요가 있다는 취지다.

일본은 종업원 1000명 이상 기업에 대해 남성 육아휴직 현황을 공시하게 한 이후 남성 육아휴직 사용률이 30%대를 넘어섰다.


이인실 한미연 원장은 "시대 변화에 따라 최고디지털책임자(CDO)나 최고인공지능책임자(CAIO) 같은 새 직책이 생겨나듯 기업에 최고인구책임자(CPO)를 만들고 인구위기 대응 전담 부서를 설치하는 방안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라며 "근본적인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성승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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