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일 동맹에 잇따르는 이상징후
日, 2+2 회담·나토 연속 ‘노쇼’
車관세율 조정 두고 갈등 격화
美, ‘방위비’ 민감 이슈 건드려
참의원 선거에 초조한 이시바
대미외교 강경 전략으로 선회
일본과 미국의 밀착 수위는 한국에 위기와 기회의 두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양국 관계가 심상치 않습니다.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후 5개월간 돌출된 사건을 모아보면 양국 외교사에 기록될 파탄적 양상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점잖던 일본이 미국 대통령, 국방·외교부 장관과 예정된 만남에 ‘노쇼’를 결정하고 “동맹이라도 할 말은 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두 나라가 급랭하는 이유를 한 줄로 표현하면 ‘특별 대우’를 바라는 이시바에게 트럼프가 ‘냉소와 조롱’으로 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에 일본은 특별 대우가 아닌 호주머니를 더 털어도 부족할 이익 재조정의 대상입니다.
더 극단적으로 말하면 트럼프 우선순위에서 ‘동맹’은 ‘돈’보다 아래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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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미국 백악관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악수를 나누는 이시바 총리 <AFP 연합뉴스> |
미일 관계가 심상치 않게 전개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이달 초 열릴 것으로 예상됐던 워싱턴 ‘외교·국방장관(2+2) 회담’ 취소 건입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 보도에 따르면 트럼프의 핵심 안보 참모인 엘브리지 콜비 국방부 정책 담당 차관은 지난달 일본에 국내총생산(GDP) 대비 방위비를 기존 요구액인 3%보다 더 높인 3.5%로 올려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단기 증액 목표를 2%로 설정하며 노력하는 일본에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목표치를 제시한 것입니다.
이미 이시바 시게루 총리는 콜비 차관이 후보자 시절이던 지난 3월 미 상원 청문회에서 일본이 방위비를 GDP 대비 3%로 올려야 한다는 주장을 듣고 “조잡한 논의를 할 생각이 없다”고 일축한 바 있습니다.
그럼에도 콜비 차관이 한술 더 떠 3.5%라는 수치를 제시하자 분노가 극에 달한 것으로 보입니다.
FT는 이 사안으로 인해 7월 1일 워싱턴DC에서 미국과 개최할 예정이었던 2+2 회의를 취소 통보했다고 보도했습니다.
미국과 일본의 불편한 관계가 거칠게 포착된 또 하나의 사건은 일본 재무상의 ‘미국 국채’ 발언입니다.
가토 가쓰노부 일본 재무상은 지난달 2일 도쿄TV에 출연해 미 국채를 매각하지 않는다는 일본의 입장이 대미 무역협상 도구가 될 수 있냐는 질문에 “카드로 존재한다”고 수긍했습니다.
일본은 세계 1위 미 국채 보유국으로, 지난 2월 말 기준 1조 1300억 달러(약 1600조원) 규모에 이릅니다.
가토 재무상의 발언에 글로벌 매체들은 일본이 트럼프 2기와 벌이는 무역협상에서 자국에 유리한 카드로 미 국채를 활용할 수 있음을 시사한 발언으로 해석해 보도했습니다.
파문이 확산하자 가토 재무상이 그런 의도가 아니라고 선을 그었지만 세계는 미일 간 무역협상이 진흙탕 싸움으로 악화했음을 직감했습니다.
그리고 6월 말 미국과 7차 고위급 무역협상을 위해 출국한 일본 측 협상 대표인 아카자와 료세이 경제재생상은 협상 파트너인 스콧 베선트 재무부 장관과 워싱턴에서 만나지 못하는 굴욕을 겪었습니다.
베선트 장관과 면담을 위해 체류 일정을 하루 더 늘렸음에도 회동에 실패했다는 것은 베선트 장관이 의도적으로 아카자와 경제재생상 면담을 외면했을 가능성을 시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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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미국 백악관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며 악수를 나누고 있는 이시바 총리. <AP 연합뉴스> |
뒤이어 터진 미일 간 파열음은 더 컸습니다.
이시바 총리가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정상회의 참석을 취소한 것입니다.
이시바 총리는 6월 20일 발표로 24일부터 열리는 나토 정상회의 참석을 공식화했지만 출국을 하루 앞두고 일정을 전격 취소했습니다.
일본 총리실이 밝힌 취소 사유는 “중동 정세를 고려한 것”이었습니다.
중동 정세와 긴밀한 관계가 없는 일본이 이런 어색한 입장을 내놓았다는 것은 간단히 말해 두 가지 가능성을 내포합니다.
이시바 총리가 트럼프 대통령을 만나고 싶지 않았거나 반대로 트럼프 대통령이 이시바 총리와 양자 회담을 거부했을 가능성입니다.
힘의 우위로 결정되는 정상 외교의 현실을 고려할 때 후자일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이시바 총리의 나토 정상회의 참석 취소, 일본의 2+2 회담 취소 등 일련의 사건이 터지고 트럼프의 대일본 메시지는 저급하고 거칠어졌습니다.
일본을 상대로 “버릇이 잘못 들었다”(very spoiled)며 상호관세율을 더 올릴 수 있다고 경고한 것입니다.
이 발언이 나온 날은 공교롭게도 일본이 미국과 2+2 회담을 예정했던 7월 1일입니다.
트럼프는 무역협상이든 방위비 인상이든 쉽게 양보하지 않고 버티는 일본을 상대로 당근보다는 채찍으로 길들이기를 하려는 모양새입니다.
재집권한 트럼프의 꼼수를 훤히 뚫고 있는 일본 역시 트럼프 2기의 거칠고 예의 없는 태도에 정색하며 ‘국익 수호’를 얘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본 내각과 정계 반응을 보면 트럼프 행정부의 예의 없음에 질색하는 분위기가 역력합니다.
일본 여야는 “미국과 무역협상은 사실상 결렬됐다”는 비판과 함께 “트럼프가 14개국과 동일한 언어로 일본에 편지를 보냈다”고 불쾌해합니다.
미국과 특별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일본에 트럼프가 격식을 존중하지 않고 무성의한 서한으로 모욕감을 줬다는 것입니다.
일본 매체들도 최근 일미 간 이상 기류를 무겁게 보도하고 있습니다.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는 최근 난기류를 보도하는 기사의 리드(첫머리)를 “트럼프 행정부와 미국의 가장 중요한 서태평양 동맹인 일본은 서로 맞지 않는 것 같다”고 썼습니다.
경제와 안보에서 무리한 요구를 하는 트럼프를 상대로 이시바는 “동맹이라도 할 말은 해야 한다”며 잔뜩 힘을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이례적인 일본의 결기가 더 커질지, 아니면 소멸할지 여부가 열흘여 뒤 판가름 납니다.
참의원(상원) 절반(125명)을 뽑는 투표 결과가 20일 나옵니다.
집권 자민당과 연립 여당인 공명당이 과반 의석을 유지하지 못하면 이시바 총리의 정치적 입지는 더 축소될 수밖에 없습니다.
투표 진행 과정에서 이시바 총리가 ‘국익 수호’를 강조하는 것은 대미 저자세 외교에 피로감을 느끼는 여론을 의식한 행보로 보입니다.
부쩍 저급해진 트럼프의 입 역시 일본 여론과 표심에 영향을 줄 외부 요인입니다.
일본과 미국 간 상호관세와 방위비 협상은 한미 간 협상 테이블에도 영향을 주는 벤치마크입니다.
8월 1일로 추가 유예된 무역협상에서 일본은 도요타, 혼다 등 일본 경제의 중추인 자동차 산업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트럼프 행정부와 전면전을 불사할 태세입니다.
트럼프 경제팀도 자동차 관세만큼은 절대 양보하지 않겠다는 입장입니다.
전쟁 같은 협상에서 서로의 손익을 계산하며 이시바와 트럼프는 오는 10월 한국 경주에서 열리는 ‘APEC 정상회의’에서 조우할 것입니다.
과연 누가 더 활짝 웃는 모습으로 기념 촬영을 할지 벌써 주목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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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 <AFP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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