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 상태론 韓서 빅테크 못 나와 …'제2 벤처붐'으로 생태계 혁신


'창업보다 수성이 더 어렵다'는 중국 당 태종 이세민의 말처럼 벤처기업은 오래 생존하는 것 자체가 큰 목표다.

1980~1990년대 수많은 벤처기업이 생겨났지만, 지금까지 살아남은 기업과 1세대 벤처기업인은 손에 꼽을 정도다.

매일경제는 숱한 어려움에도 지금까지 기업을 잘 이끌어 오고 있는 대표 1세대 벤처기업인을 만나 국내 벤처생태계의 문제점과 향후 육성을 위한 해법을 들어봤다.


조현정 비트컴퓨터 회장은 1983년 '대학생 1호 벤처기업'으로 유명한 의료용 소프트웨어 기업 비트컴퓨터를 창업했다.

전자공학을 전공한 그는 당시 일반인에게는 생소했던 컴퓨터를 갖고 놀던 청년이었다.

조 회장은 "정부에서 주요 공대마다 3대씩 나눠줬던 컴퓨터를 아무도 안 쓰고 있길래 그걸로 프로그램 짜는 연습을 자주 해봤다"며 "돈을 벌 수 있는 소프트웨어 개발을 생각하다가 의사였던 친척이 매일 저녁 보험청구 서류 작성에 시달리는 것을 보고 돈이 되겠다고 생각했다"고 회상했다.


비트컴퓨터가 40년 넘게 생존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조 회장은 "아이디어 상품은 오래갈 수 없다"며 "끊임없이 기술을 익히고 새로운 상품과 기술을 개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그는 "기술을 키워 자생력을 갖추는 게 중요하다"며 "지원에 의존하는 기업은 지원이 사라지면 경쟁력이 없어지고 도태하게 돼 있다"고 덧붙였다.


조 회장은 후배 창업자들에게 "유니콘 기업(기업가치 1조원 이상 비상장 스타트업)에 대한 관심이 커지다 보니 최근 창업자들은 너무 큰 것만 바라보는 것 같다"며 "이 때문에 서류를 잘 만들어 큰 자본을 유치하는 것에 집중하는데, 이보다는 하나씩 성장한다는 마음으로 내실을 다지면서 천천히 가는 게 좋다"고 조언했다.

이어 그는 "정부가 바뀔 때마다 '제2 벤처 붐'을 얘기하고 그 기준도 유니콘 기업 수로 말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바뀌어야 한다"고 비판했다.


미국 벤처기업에 비해 한국 벤처기업 경쟁력이 떨어지는 이유를 묻자 조 회장은 미국 나스닥 주가와 한국 코스닥 주가 그래프를 출력해 보여줬다.

그는 "2000년부터 현재까지 24년 동안 나스닥 지수는 4배 가까이 올랐지만, 코스닥 지수는 2000년(2500대)에 비해 현재 800대로 대폭 떨어졌다"며 "이래서는 젊은이들이 회사를 창업해 부자가 되겠다는 꿈을 꿀 수 없다"고 지적했다.

조 회장은 코스닥 시장을 살려야 벤처 붐이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얘기를 수차례 강조했다.


조 회장은 "민간 자본이 많이 들어와 벤처생태계가 활성화할 수 있게 정부가 세제 혜택 같은 인센티브를 대폭 늘릴 필요가 있다"면서 "현재 상태로는 한국에서 구글·아마존과 같은 글로벌 기업은 나오기 힘들다"고 강조했다.


1988년 설립된 디지털가전 메인보드 모듈업체 노바스이지의 이영남 회장은 여성 벤처 1세대 대표 주자다.

이 회장은 2001년부터 4년간 한국여성벤처협회 2·3대 회장을 맡으며 벤처생태계의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 법과 제도를 만드는 것에 기여했다.


이 회장은 "창업자들이 해외 시장을 경험할 수 있는 자리를 자주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당장 결과가 나오지 않더라도 정부와 유관기관이 자주 창업자들을 해외 투자설명회 등에 데리고 가 해외를 경험하게 하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해외 시장 진출을 준비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해외 출장 때마다 이전보다 한국 이미지가 훨씬 좋아졌다는 것을 느낀다는 이 회장은 "K컬처 붐이라는 좋은 기회를 살려 벤처·스타트업이 해외로 진출할 수 있게 육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과거에 비해 지금 창업자들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이 회장은 "지금은 투자자도 많고 한국이라는 국가 밸류도 올라가 있어 요즘 창업자들은 복을 받았다고 생각한다"며 웃었다.

그는 "창의적이고 도전적이며 시스템에 잘 적응하는 모습은 좋은데, '헝그리 정신'은 부족한 것 같다"고 지적했다.

과거 회사가 어려울 때는 석 달 내내 집에 가지 않고 공장에서 주야로 머물면서 문제 해결에 매달렸는데, 요즘 창업가들에게도 이 같은 헝그리 정신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이 회장 역시 다른 벤처 1세대와 마찬가지로 원천기술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창업자들이 자기만의 아집이 강해 협력하는 것에 약한데, 네트워크를 넓혀 여러 창업자와 협력할 줄도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예를 들어 한 창업자가 원천기술을 갖고 제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하드웨어는 물론 소프트웨어도 있어야 하는데, 이를 모두 다 잘하려면 능력과 자본에 한계가 있는 만큼 자신을 도울 수 있는 인적 네트워크를 가져야 한다는 얘기다.


이 회장은 "투명경영과 신뢰, 열정이 있어야 오랫동안 생존할 수 있다"며 "업계에서 신뢰를 쌓아야 어려울 때 지원을 받을 수 있다"고 조언했다.

특히 그는 "성공한 벤처기업인들이 후배 창업가들을 위한 멘토 역할을 많이 해줘야 한다"고 당부했다.


이 회장은 "정부나 투자자들이 자금 지원만 하면 '모럴해저드'(도덕적 해이)가 일어날 수 있다"면서 "지원은 하되 잘못을 저지른 창업가에 대해선 제재도 가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박준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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