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나라한농복구회 해외농업’ 브라질서 ‘대농의 꿈’ 이룬 정경래 씨 “열악한 환경 속 새로운 가치창조에 집중”

경제, 산업 분야와는 달리 정부의 농업분야 소외현상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많습니다. 우리의 먹거리를 생산하는 중요한 산업이지만, 1960년대 이후 도시를 중심으로 공업이 빠르게 성장하면서 경제 분야에서의 농업 비중이 크게 줄며 소외현상은 더 심화돼 왔습니다.

여기에 인력 부족과 고령화, 휴경지 증가, 경지 이용률 감소마저 농업 분야의 사회적 문제로 지적되고 있습니다. 이에 인공지능과 빅데이터 등 4차산업혁명 시대에 농업이 직면한 인력부족 등 현안들을 극복하고 생산성과 부가가치를 제고하기 위한 디지털 대전환에 속도를 내야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고질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와 지자체는 지원 방안 모색과 정책 확대를 위한 논의를 지속적으로 이어가고 있습니다. 농식품산업 해외진출지원 사업을 통해 민간의 해외농업 진출과 정착을 지원하고 있고, 불안정한 국제곡물시장에 의존도가 높은 곡물도입방식에서 탈피해 안정적 해외공급선 확보하는데도 집중하고 있습니다.

해외농업 진출을 도와 농식품 산업의 저변확대와 국제경쟁력을 확보하고 미래 해외 식량 확보 기반을 마련하려는 움직임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이미 민간 차원에서 해외농업을 진행중인 사례가 의미있는 결실을 맺으면서 성공모델로 자리잡아가고 있습니다. 문화와 언어, 기후 등 지리적, 환경적 제약을 뛰어넘어 새롭게 ‘개척’해야 하는 해외농업의 도전에 초석이 되고 있다는 평가입니다.

(사)돌나라 한농복구회 브라질 해외농업팀이 콤바인으로 벼를 추수하고 있다.
돌나라통상(주)은 해외현지법인인 브라질의 ‘봉아미고’를 통해 우리나라 농업의 성공적인 해외시장 진출에 일조하고 있습니다. 봉아미고 농장에는 벌써 10년 전 30-40대 젊은 농부들이 주축이 돼 ‘해외농업’을 개척해 왔습니다.

브라질은 경작가능한 면적과 물 공급, 기후, 열대농업기술 등에서 곡물 생산을 위한 큰 장점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규모 농업회사와 가족농 간에 곡물 재배에 사용하는 기술격차가 커 한편에서는 선진 영농이 이루어지는 반면, 아프리카 지역에서나 볼 수 있는 낙후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도 봉아미고 농장의 젊은 인력들은 차별화된 아이디어를 실행으로 옮기는 추진력을 통해 해외농업의 난관을 극복하고 현지의 최적화된 비즈니스 모델을 구축하고 있습니다.

봉아미고 농장에서 컨트롤타워 역할을 하고 있는 정경래(45)씨는 올해로 11년차를 맞았지만 아직도 브라질로 건너왔던 당시의 첫 인상을 잊을 수가 없다고 말합니다. 농지로는 사용할 수 없는 토양환경과 전기도 들어오지 않던 상황은 또 다른 추억이 됐다는 설명입니다.

정경래 씨는 “어떻게 해외농업에 대한 의지 하나만으로 고향과 삶의 터전을 떠나 만족한 삶을 살수 있을까 후회하지 않을까라는 의구심이 들었다”면서도 “11년간의 과정 속에서 얻는 짜릿한 보람이 행복처럼 느껴졌고 열악했기에 개척할 수 있었고, 아무도 내딛지 않은 발걸음이었기에 새로운 것을 창조해낼 수 있었다”고 전했습니다.

다음은 정경래 씨와 일문일답.

2010년 돌나라 한농복구회에서 주최하는 <대한민국 지키기>프로젝트 일원으로 브라질 해외농업에 참여하게 된 정 경래씨


Q. 해외농업에 지원하게 된 동기가 무엇인가요?

A. 한창 농사에 재미 들리다 보니까 좁은 한국을 떠나 좀 더 넓은 세계에 진출해보고 싶은 마음이 생기더라고요. 이왕 농사지을 거면 대규모의 농사를 짓고 싶었어요. 영화에서 보았던 것처럼 광활한 대륙에서 농사짓는 것을 꿈꾸고 있을 때, 한농복구회에서 주최하는 <대한민국 지키기> 프로젝트를 알게 되었어요.

호기심 반, 열정 반으로 지원을 했어요. 그 일에 동참해서 젊을 때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해보고 싶었어요. 수입에 의존하는 한국의 식량난에 대해서도 익히 알고 있었던 터라 장래에 있을 식량난의 돌파구를 찾고 싶었고요. 그래서 해외농업을 지원하여 이곳 브라질에 오게 되었는데, 그때 제 나이가 서른네 살이었어요.


(사)돌나라 한농복구회 브라질 해외농업팀이 콤바인으로 대두를 추수하고 있다.


Q. 젊은 나이에 해외농업에 종사하게 되었는데, 쉽지는 않았을 거 같은데요.

A. 2010년 7월에 좀 더 넓은 대륙에서 크게 농사지어보겠다는 꿈과 열정을 갖고 이곳 브라질에 오게 되었어요. 막상 와보니 무엇 하나 좋은 조건이 없었어요. 집은 낡아서 폐허가 되었고, 땅은 사토(沙土)로 농사짓기에는 적합하지 않았고요, 지금은 전기가 들어왔지만 그때는 전기도 없었고, 지금은 날씨가 아주 쾌적한 날씨로 바뀌어 생활하기에 너무 좋지만, 그때는 아열대기후로 너무나 더웠어요.

농지는 개간이 되지 않은 채로 버려진 상태였고, 중장비라고 해봤자 다 낡은 75마력 트랙터와 95마력 1대가 전부였어요. 캐빈이 없는 트랙터로 밭을 갈다 보니 온몸이 먼지로 뒤집어썼고요.

또한, 이곳은 바헤이라스 도시에서 3시간 떨어진 곳인데, 인터넷도 안 되었고 날씨에 대한 데이터가 없었어요. 평균 강우량, 건기 우기에 대한 일반적인 정보를 전혀 입수할 수 없었어요. 우리가 사는 바이야 주에는 한인이 전혀 없어서 어떤 정보도 얻을 수가 없었어요.
관행 농법으로 대농을 하는 곳은 있지만, 우리 지역과는 멀리 떨어져 있어서 기후 조건이 다르기 때문에 그들의 데이터를 사용할 수가 없었어요.

한국과는 너무도 다른 조건과 환경 속에서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정말 막막했지요. 몸으로 뛰며 모든 것을 체험하면서 터득해야 했죠. 강우량이 적고 하루하루 기온을 적어가며 데이터를 만들어 갔어요. 그래서 시작 후 몇 년은 시행착오도 많았어요.

브라질은 기후가 건기와 우기로 나뉜다. 10월부터 6개월간 시작되는 우기가 농사의 한 작기이다. 대규모 유기농 농사에 있어서 기계 제초는 필수이다. 제초기계를 점검하고 있는 정경래 씨.


Q. 어떤 어려움이 있었나요?

A. 처음에는 환경과 조건을 너무 몰랐기 때문에, 언제 파종해야 하는지, 언제 수확해야 하는지도 잘 몰랐어요.

종자를 구하는 것에서도 많은 어려움이 있었어요. 지금은 non-GMO를 전혀 구할 수 없지만, 그때는 그런대로 non-GMO를 구할 수 있었어요. 작기가 시작되기 전에 종자를 빨리 사야 하는데, 그 적기를 놓치면 한 해 농사를 짓지 못해요. 그래서 종자를 구하기 위해 많이 뛰어다녔어요.

그 당시에는 유기농을 하는 곳이 없어서 유기농 종자를 구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일반 종자를 구해서 파종하고, 해를 거듭하면서 종자를 받아서 쌀, 콩, 참깨 등 완전 유기농 우리 종자를 확보할 수 있게 되었지요. 그것이 우리가 이룬 큰 성과 중의 하나입니다.

지금은 유기농이나 non-GMO 종자를 구하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입니다. 바이야 주에는 유기농이 전혀 없어요. 있어도 2~3헥타르(6000평~9000평) 아주 소규모로 경작하는 사람이 몇 있다고는 하지만, 우리처럼 200헥타르(60만평) 대규모 농사를 유기농으로 짓는 데는 우리 농장밖에 없었어요.

콩을 수확해야 하는데 콤바인이 너무 낙후된 거라 수확하는 과정에서 고장이 나서 수확하는 시기를 놓쳐서 수확하기 전에 콩이 밭에서 다 튄 적도 있어요. 그렇게 몇 년은 이 나라의 모든 환경과 조건을 알아가는 단계였어요.

대규모 유기농 농사에서 기계는 필수이다. 한쪽에서 트랙터 두대가 밭갈이를 하고 땅을 다지고 나면, 그 뒤를 따라서 대형 파종기(맨 왼쪽)가 파종을 한다


초기 제초를 위해 만든 아인박 제초기계이다. 콩 포기포기 사이의 풀을 제초한다.


골의 풀을 제초하기 위해 만든 꿀지바도르 제초기계이다.


파종하고 잡초가 발아되기 전에 먼저 초기 제초로 아인박으로 제초를 해 주고, 작물이 어느 정도 자라고 나면 꿀지바도르 제초기계로 제초를 한다.


Q. 대규모 단위의 유기농 하는 곳이 없었는데, 어떻게 유기농으로 정착하게 되었나요?

A. 브라질의 대농은 관행농법입니다. 경비행기로 제초제, 살충제, 화학 비료 등을 살포하죠. 그러니 유기농으로 대농을 한다는 것은 꿈도 못 꿀 일이었어요. 이 나라는 파종기는 발달하였지만, 제초기가 없는 거예요. 미국이나 유럽 쪽으로는 제초기가 있는데 이 나라는 없어요.

그렇지만 우리는 유기농 단체니까 유기농을 성공시켜야 했어요. 그래서 유럽에 있는 제초기 사진을 보고, 몇 센티 몇 센티 그대로 자로 재서 기계를 만들었는데 그게 바로 꿀지바도르(쟁기)와 아인박이었어요. 한국의 쟁기와 비슷한 날을 만든 거죠. 꿀지바도르로 고랑과 고랑 사이사이의 풀을 긁었더니 되는 거예요. 그리고 콩 포기와 포기 사이의 풀을 제초하는 기계인 아인박을 또 만들었어요. 수입할 여건이 못 되어서 견본을 보고 만들었죠. 써레 같이 생겼는데 한 번도 사용해 본 적이 없어서 콩만 다치는 것이 아닐까 우려했는데 처음에는 별 효과를 볼 수 없었어요.

아인박을 하는 시기가 아주 중요한데. 처음에는 그걸 몰라서 잡초가 나온 다음에 아인박으로 긁으니 큰 효과를 볼 수 없었던 거죠. 나중에는 잡초가 나오기 전에 아인박으로 긁어주었더니 효과가 아주 좋았어요. 그렇게 3~4차례 긁어주어서 확실한 제초를 할 수 있었어요. 사토(砂土)라 땅에 영양이 부족하여 영양제를 줘야 하는데, 이 나라에는 천연 약제도 없었어요. 유기농이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우리가 연구하여 갖고 있던 기술로 천연 영양제를 만들어 영양을 공급하였지요.

환경과 조건이 한국과는 달라도 너무나 다른 완전히 생소한 이국땅에서 이렇게 맨땅에 헤딩하며 지금은 안정선에 들어갔다는 것은 큰 쾌거겠죠.

대형 콤바인으로 수확한 콩을 트럭에 쏟아붓고 있는 장면이다. 아열대기후의 사토에서 관수 시설 없이 대규모 유기농으로 큰 수확을 한 것은 실로 기적이었다.


Q. 다른 좋은 땅도 있을 텐데 왜 하필 그렇게 열악한 환경의 토지를 선택하게 되었나요?

A. 이 나라도 대규모 농사 경영하는 데가 많아요. 그런데 문제는 관행농법이라는 거죠. 그런데 우리 한농은 유기농이잖아요. 관행농법의 해를 받지 않아야 해요. 바람 타고 농약 성분과 GMO 꽃가루가 날아올 수 있으니까요. 그러려면 그런 대규모 농장과 상당히 떨어진 곳이어야 했어요. 그러다 보니 이렇게 아주 멀리 떨어져 후비진 곳에 정착하게 된 것이죠.

우리가 여러 해를 거쳐서 이제는 확실한 노하우를 갖게 되었어요. 기계만 제대로 갖추게 되면 더 큰 대규모 농사라도 쉽게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도 좀 생겼어요. 그것 또한 큰 성과겠지요. 4년 전부터 농지를 더 개간해서 지금은 1000헥타르(3백만 평)의 농지를 확보하게 되었어요.

브라질 현지인과 함께 기계 밭갈이하는 모습


새로운 세계에 뛰어들어 전혀 생각지 못했던 일, 불모지를 개척했다는 것, 한국에서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농법을 터득하고, 농기계를 직접 만들어 농사를 성공시켰다는 것 등이 상당히 뿌듯하죠. 해마다 한국으로 수출할 때 아주 뿌듯하고 보람이 있어요. 그리고 이렇게 젊었을 때 이곳에서 10년 넘게 일했다는 것이 정말 보람되고 나름대로 긍지를 갖게 돼요. 제 인생에 있어서 아주 유익한 시간을 보낸 거 같아 좋아요.

여기서 농사지으면서 크게 배운 것은 진인사 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에요. 아열대기후를 가진 사토(沙土)에서 대농을 유기농으로 한다는 것은 누가 봐도 미친 짓이라고 할 만하지요. 대단위 농토에 파종하고 제초를 하면 추수 때까지 더 할 게 없어요. 적당한 비, 적당한 햇빛을 주시는 것은 하늘의 몫이죠. 하늘에서 돕지 않으면 할 수 없는 농사예요. 사람의 힘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도우심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을 절실히 알기 때문에, 하늘 아래 더 겸허한 마음으로 농사에 임하게 됩니다. 그리고 땡볕에 일하다가 강에 가서 수영하면 너무 기분이 좋았고, 짬짬이 말을 타며 여유 시간도 가지며 재미있게 살았어요. 한 해 한 해 보내면서 생각 드는 것은 정말 농사를 잘 택했다는 것이죠. 역시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입니다.

Q. 이곳 농장에서 한국토종종자, 또는 브라질 토종종자에 대한 연구를 했다고 들었는데 진행은 잘 되고 있나요?
A. 힘든 상황도 있었지만 꾸준한 연구와 노력 끝에 대규모 경작에 대한 매뉴얼을 만들 수 있었고요, 현재는 토종 종자를 확보할 수 있게 되었어요. 어쨌든 인간의 생명은 먹거리와 직결되고, 먹거리의 기본은 씨앗에 있으니까요. 씨앗을 보존하는 것은 전쟁을 앞둔 무기를 준비하는 것처럼 필수적인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한국도 그렇고 이곳 브라질도 그렇고 토종 종자는 점점 사라지고, 대규모 외국 종자회사에 의존하는 이때 저희는 이곳에 정착하는 순간부터 토종 종자의 보존을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그래서 이곳에서만 150가지가 넘는 토종 종자를 확보 생산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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