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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사업을 접고
기사입력 2021-02-27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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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어지는 역병의 시대, 다들 지치고 인내심도 바닥이 나려 한다.

그런 때라 내가 지키는 서원을 -마스크를 단단히 쓰고- 찾아오는 사람들 면면이 더 각별하다.

특히 두 젊은이의 모습이 뚜렷한데, 어려움과 변화가 유난할 수밖에 없는 여행 관련 직종에 있는 분들이라 그렇다.


동남아시아에서 여행사를 하던 한 분은 몇 해 전에 지인을 따라 밤에 잠깐 서원에 들렀는데 그다음 날 다시 혼자서 또 온 일이 있다.

무얼 잊고 가서 찾으러 온 줄 알았더니, 대문 앞에 가로놓인 거름 포대를 날라주러 일부러 다시 온 것이었다.

내가 혼자 나르다가 힘에 부쳐서 그만 통로에다 팽개쳐 둔 것을 눈여겨보고 갔던 것이다.

그렇다고 어쩌자고 먼 길을 다시 왔느냐고 했더니, 자기가 외국을 나돌아다니는 동안 나처럼 넓은 땅을 혼자 가꾸던 어머니가 병이 나셔서 남의 일 같지 않아 그랬다고 했다.


그랬던 사람이 최근에는 여행업을 접고, 서원 근처 마을로 아주 이사를 왔다.

나는 또 왜 그러시냐고 물었다.

아이를 서원 그늘에서 키우고 싶어서라고 했다.


본격적으로 귀농 채비를 해가면서 그는 가끔 아내와 아이를 데리고 식사 시간 직전에 서원을 찾아온다.

간단한 요리를 자기가 후딱 해서 함께 먹고는, 내 일에 방해가 되면 안 된다면서 곧바로 떠난다.

그 짧은 시간, 이곳이 낯설고 물선 그 아내와 아이에게 내가 서툰 영어로 무엇을 줄 수 있겠나 자문하지만, 서원 마당에서 걸음마를 떼는 아이를 보면서 저렇게 뛰놀고 서원 안 어린이도서관에서 책을 읽으며 커 갈 것을 생각하면, 그 부모의 삶도 그만큼 튼튼하게 새 뿌리를 내릴 것 같다.


그리고 바로 어제 서원을 찾아오신 또 한 분은 여행 관련 청년 창업으로 큰 성공을 거둔 젊은 사업가였다.

며칠 전 어떤 모르는 분이 놀랍게도, 서원 소식들을 지켜보다가 서원에서 추진하는 좋은 일 한 가지가 난관에 부딪혔다는 것을 알게 되어 도움을 드리고 싶다는 글을 보내더니 직접 찾아왔다.


내 이야기를 말없이 듣는데, 서원을 지은 뜻이며 하려는 일들에 대해 이미 상세히 알고 있는 게 느껴졌다.

떠나기 전에야 잠깐 자기 이야기도 했다.

성공한 사업을 이런 때에 오히려 접고 한 1~2년 쉬면서 다음 사업을 기획하고 있다고 했다.

각별한 인문학 공부도 그 '쉼'의 일환인 것 같았다.

그런데 그 공부의 깊이가 얕은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사람에 대한 깊은 이해와 사려 깊음, 매사의 적절한 처리라는 게 언행 하나하나에서 배어나왔다.

기부의 실천도 몸에 밴 것 같았다.

업(業)은 쉬어도, 쉬지 않으며 표를 내지 않는 기부였고, 도움이 필요한 뜻있는 곳을 직접 찾아내서 받는 사람의 입장과 심정을 깊이 헤아리는 조용한 기부였다.

받는 이가 가질 수 있는 부담을 미리 차단하며 사업가이기에 줄 수 있는 실무적 도움까지 제안했다.

바로 내가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국내에서 아직 본 적 없는 유형의 인물, 빛나는 젊은이였다.

이제 우리나라에도 저런 사업가들이 나오기 시작하는구나 싶어 설레기까지 했다.

그때 우연히 자리를 함께했던 이웃분도 저녁에 글을 보내 왔다.

"제 아들 나이 또래입니다.

사업으로 성공을 거둔 것만이 아니라 그의 인생 목표와 목적은 제가 살아온 게 부끄러울 정도로 반듯하고 아름다웠습니다.

다시 한 번 어떻게 살아야 될지 생각하게 한 만남이었습니다.

"
정말이지, 저 나이에 어찌 저럴 수가 있을까 싶을 만큼 반듯했다.

그런 사람을 만난 것만으로도 좋아서, 나는 겨우 책 한 권을 건네면서도 이런 글을 써 넣었다.

"큰길 가는 분을 지켜볼 수 있어 기쁩니다.

" 그이와 같은 나이에, 마흔이 되기 전에 공부 좀 해야겠다며 누리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이탈리아로 가서 큰 체험을 하고 돌아와 자신의 인생에는 큰 도약을, 독일 문학사에는 전기를 만든 젊은 괴테의 모습이 겹쳐 떠올랐기 때문이다.

세상이 아무리 어려워도, 이런 젊은이들이 어딘가에 있음을 확인하려고 내가 서원을 세워 지키나 싶다.


[전영애 서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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