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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의소통] 황금의 연금술사, 하멜의 청어
기사입력 2021-02-27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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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은 유명해도 읽지 않은 책을 가리켜 고전이라 한다는 우스개가 유효하다면 분명 '하멜표류기'가 그중 하나다.

원래 여행기 목적이 아니며 대중을 위해 쓴 것도 아닌, 건조한 보고서이기 때문이다.

시간의 잔인한 파괴력을 이겨내고 이 책이 지금까지 살아남았던 비결은 뭘까? 왜 리더들은 하멜을 알아야 하나?
첫째, '하멜표류기'는 위기 극복의 교과서다.

스무 살 청년 하멜이 돈을 벌기 위해 배를 탔다가 태풍을 만나 엉뚱한 한반도에 표착한 뒤 무려 13년 28일 동안 억류됐다.

1년 이상 팬데믹 사태로 눈물겨운 고전을 하고 있는 이 시대 사람들에게 용기와 공감을 주기에 충분한 사례다.

하멜의 꿈과 모험, 역경 극복 이야기를 추적하다 보면 트로이전쟁에 나갔다가 20년 만에 귀향한 오디세우스가 연상된다.

공교롭게도 하멜 역시 20년 만에 고향에 돌아갈 수 있었으니 17세기 오디세우스라 할 수 있다.


둘째, 위기 상황에서 소통 능력의 중요성이다.

배에 탔던 64명 중 선장을 비롯한 28명이 태풍에 목숨을 잃은 가운데 하멜은 제주도 해안에 간신히 표착했다.

리더를 잃은 상황에서 하멜이 그 역할을 맡아야 했다.


살벌한 무기를 들고 에워싼 낯선 군인들에게 그가 취한 행동은 놀라웠다.

부서진 배 안에 있던 포도주 통을 가져와 책임자들에게 한 잔씩 권했고 그 결과 군인들은 기분이 좋아져 우호적 분위기로 변했다.

하멜 일행이 광해군의 제주도 유배지에서 살았던 비결이다.

말이 통하지 않는 상황에서 와인은 좋은 의사소통 수단이었고, 때로는 언어보다 비언어적 표현이 더 중요함을 알려주는 사례다.


셋째, 청어와 혁신의 관계다.

하멜의 흔적이 국내에 남아 있는 곳은 전남 강진군 병영마을 돌담길이 유일하다.

이 돌담은 줄마다 서로 엇갈리는 사선 무늬로 돌을 쌓았는데, 이곳을 방문한 네덜란드 대사가 '청어뼈 양식 돌담(herringbone stone wall)'이며 이는 자국의 전통양식이라고 증언했다.


청어는 자연환경에 취약한 작은 나라 네덜란드를 강국으로 키워준 보물이었다.

14세기 선상에서 작은 칼로 배를 가르고 소금에 절여 염장하는 법을 개발한 뒤 청어는 네덜란드의 국민 생선이 됐다.

더 나아가 수산업의 분업화, 조선업, 창고 물류, 금융 등 산업 전반에 가치사슬을 주도한 당대 반도체와 같았다.

세계 최초 상장 주식회사인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설립될 수 있던 토대였고, 하멜은 이 회사 직원이었다.


하멜은 자신의 책에서 청어를 상세히 언급하고 있고, 동료인 에보켄 역시 청어를 소금에 절이는 법을 강진 사람들에게 전수했다고 증언했다.

비린 맛이 나고 가시가 많아 한국에서는 과메기 재료로 쓰이거나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지만, 흉년이 들었을 때 하멜은 청어 덕분에 살아남았다.

청어는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자유와 희망의 상징이다.

그러나 제주도, 강진, 여수 등 하멜이 지나간 곳에 풍차는 서 있지만, 청어와 관련된 행사나 깊은 설명을 찾아보기 어렵다.

스토리텔링을 통한 무형자산의 재발견이 아쉽다.

하멜의 청어는 로컬에 황금을 가져다주는 연금술사 역할을 하기에 충분하지 않을까?
태풍과 전염병, 기근과 학대로 동료들이 죽었지만 하멜은 살아남았다.

운명의 가혹함에 좌절하지 않았다.

섣불리 나서지도 않고 착실히 준비했다.

일본으로 향하는 바닷길 정보도 미리 확보해 뒀다.

마침내 기회가 왔을 때 주저하지 않고 모험을 감행했다.

나막신을 만들고, 땔감을 아껴서 산 배로 자유를 찾아 나선 것이다.

나가사키의 데지마 상관(商館)을 거쳐 바타비아(자카르타)의 동인도회사에 도착해서도 그는 동료들을 본국에 먼저 보냈다.

사고보고서를 쓰고 수습한 뒤에야 가장 늦게 귀국했다.

'리더는 마지막에 먹는다'는 말을 실천한 하멜이었다.


[손관승 리더의 인문학 작가·전 iMBC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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