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 팍팍해진 삶, 선진국 여유가 사라졌다…살인적 물가부담, 강건너 불구경 아냐 [World & Now]

손님을 환대하는 일본 문화
이중가격제·후지산 가림막
외국인 관광객 혐오로 변질

30년간 경험 못한 인플레에
선진국만의 여유가 사라져가

후지산 사진 명소로 유명했던 편의점 [연합뉴스]
‘오.모.테.나.시’
일본 특유의 손님을 환대하는 대접 문화를 말하는 단어다.

일본을 찾는 많은 외국인이 반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오모테나시다.

호텔이나 식당에서 생각 이상의 서비스를 받는 것, 돈이 든 가방을 지하철이나 버스에 두고 내려도 무사히 돌려받을 수 있는 것 등은 오모테나시 덕분에 가능하다.


이러한 오모테나시가 최근 일본에서 도마 위에 오르고 있다.

후지산 사진 명소로 꼽히는 곳에 이를 못 보도록 대형 가림막을 설치하거나, 관광객에만 돈을 더 받는 이중가격제 도입 등이 과연 오모테나시에 걸맞냐는 것이다.


사진 명소에 최근 설치된 가림막 [연합뉴스]
물론 후지산 명소의 경우 차선을 넘나들며 사진을 찍는 일부 관광객의 무질서가 주요 이유로 꼽히기도 한다.

하지만 오피니언 리더들 사이에서 대형 가림막 같은 극단적인 수단은 전혀 일본답지 않다는 평가가 많다.


일본 내부에서는 이러한 오모테나시 실종 배경으로 팍팍해진 삶을 들고 있다.

넉넉했던 곳간은 비어가는데 채워지는 모습은 보이지 않자 선진국의 여유가 사라지고, 남에 대한 배려 또한 줄어들고 있다는 해석이다.


곳간을 비우는 대표 주범으로는 인플레이션(물가상승)이 꼽힌다.

최근 2~3년새 일본 소비자물가는 연평균 2~3% 상승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 30여년 간 디플레이션(경기 침체 속 물가 하락)으로 극심한 경기침체를 겪었던 일본은 경제 회복을 위해 의도적으로 인플레이션에 주목해 왔다.


JR신칸센역에서 도시락을 고르는 사람들 [도쿄 이승훈 특파원]
나라 경제는 물가가 오르며 정상궤도를 찾는 듯 보이지만 국민이 느끼는 물가 부담은 어마어마하다.

30년 가까이 한 끼에 500엔이던 직장인 점심 도시락은 최근 2~3년 새에는 800~1000엔을 주고도 괜찮은 것을 고르기 힘들 정도로 올랐다.


특히 엔저는 여기에 부채질하고 있다.

수입 제품 가격이 뛰면서 일본 슈퍼에서 오렌지주스는 자취를 감췄고, 아이들이 먹는 급식에는 영양가 높은 고기반찬이 사라졌다.

엔저로 수입 쇠고기 가격이 역대 최고치로 치솟은 결과다.


최근에는 수입 문어 가격이 일본이 자랑하는 와규 가격을 넘어섰다.

타코야키(문어 간식)가 야키니쿠(고기 구이)보다 비싸다는 얘기가 농담처럼 나올 정도다.


지지율이 급락하고 있는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
물가는 소비자의 지갑도 닫았다.

기업이 급여를 올렸지만 물가가 더 뛰면서 25개월 연속 실질임금이 마이너스이기 때문이다.


일본의 올해 1분기 개인 소비는 0.7% 감소하며 4분기 연속 마이너스를 이어갔다.

글로벌 금융위기 때 이후 최장 감소세다.

일본 경제에서 소비가 차지하는 비중은 대략 절반이 넘는다.

지난해 한국을 앞섰던 일본 국내총생산(GDP)이 1분기에 마이너스 0.5%로 반전된 것에는 소비 감소의 영향이 크다.


30년간 변동 없던 물가가 오르자 노인들의 불안감은 커지고 있다.

연금과 저축으로 계획했던 돈만으로는 노후를 보장받기 어렵게 됐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65세 이상 10명 가운데 8명은 은퇴 후에도 계속 일하고 싶어한다.

지난해 65세 이상 구직지가 25만6000명으로 25~29세 구직자층의 19만6000명을 앞섰다.


물가는 정부 지지율에도 직격탄을 날리고 있다.

최근 기시다 내각의 지지율은 10% 대까지 떨어졌다.

오는 9월 기시다 내각의 수명 연장이 어려울 것으로 보는 시각도 높다.

국민이 먹고사는 문제에 실패한 총리의 재선 사례는 드물다.


강 건너 불구경 할 일이 아니다.

물가는 이미 우리의 문제이기도 하다.

지난 총선에서 ‘대파’로 상징되는 물가 급등이 중산층의 분노를 일으켜 결과에 영향을 줬다는 분석도 나온다.

먹거리라는 가장 기본적인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는 사람을 리더라고 부르기에는 부끄럽다.


이승훈 도쿄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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