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나라한농복구회 해외농업’ 브라질 300만평 대농에 도전한 젊은 농부 ‘정여래 연구팀장’…“진인사 대천명 신념으로 일궈냈다”

우리나라 농촌의 고령화 문제는 지속적으로 심화되고 있습니다. 갈수록 젊은층의 인력이 줄어들고 있는데다, 코로나19에 따른 외국인 근로자의 입국마저 제한되면서 영농철 인력난은 가중되고 있습니다.

지난 4월 발표된 '2020년 농림어업총조사 결과(잠정)'에 따르면 국내 농림어가의 65세 이상 고령 인구 비중은 42.1%로 직전 조사인 2015년(37.8%)보다 4.3%포인트 늘었습니다. 특히 농가 인구 중 60대는 5년 전보다 7.5% 증가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최근 농업의 새로운 대안으로 해외농업이 각광받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농업의 발전을 위해 고국을 떠났던 젊은 농부들이 지난 6년간 나름 잔뼈가 굵은 대농(大農: 큰 규모로 짓는 농사. 또는 그런 농가나 농민을 뜻)들로 자리 잡은 것. 이러한 해외농업 사례는 젊은층이 기피하는 업종 중 하나인 농업 업계의 새로운 자극이 되고 있습니다.

(사)해외농업자원개발협회에서는 해마다 해외인턴 지원 사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해외농업 개발에 대한 지원 사업 뿐 아니라 지속적인 교육과 인력양성에 대한 투자의 일환으로 해외인턴 지원 사업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효과로 해외농업에 대해 생소했던 젊은층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고, 해외농업을 진행하는 기업들에게 활력소 역할도 톡톡히 하고 있습니다.

해외현지법인인 브라질의 ‘봉아미고’를 운영하고 있는 돌나라통상(주)를 통해 그 파급력을 엿볼 수 있습니다. 봉아미고 농장에는 30-40대의 젊은 농부들 30여명이 지난 10년간 꿈을 이루기 위해 구슬땀을 흘려왔습니다. 최근 코로나19 여파로 락다운(LOCK_-DOWN)과 사업축소 등 여러 난관에도 불구하고, 농장 내에서 모든 것을 자급할 수 있는 시스템 개발해 위기를 극복하고 있는 것. 돌파구의 선봉에는 젊은 인력들의 아이디어와 실행력이 돋보였다는 평가입니다.

그 중심에는 정여래 연구팀장(41)이 작물 ‘대두’의 생산과 수확을 담당하며 구심점 역할을 톡톡해 해냈습니다. 6년 전, 한 밤중에도 트랙터에서 야참을 먹으면서 일하던 정 씨가 대농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작물 ‘대두’의 생산, 수확을 담당하는 팀장이 된 것입니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농사가 싫었지만, 지금은 돌나라한농복구회 해외농업 프로젝트를 수행하며 부농(富農)을 이뤘습니다. 햇볕에 그을려 많이 거무스름하지만, 표정만큼은 맑은 정여래 팀장을 만나봤습니다.

다음은 정여래 팀장과의 일문일답.

형 정경래씨와 한 꿈을 갖고 일하게 된 정여래(오른쪽)씨


Q : 워낙 농사는 싫어했다고 들었는데 왜 싫었나요?

A :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농사를 아주 싫어했죠. 농사 일 자체가 싫다기보다는 농사를 지으며 사시는 부모님의 삶이 싫었어요. 고생하셨으니까요. 저는 기계 만지는 것을 좋아했어요. 기계를 수리하고 조작하고 만들고 하는 것을요. 제 꿈은 기계를 아주 잘 다루는 멋진 엔지니어가 되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부지런히 배우고 익혀서 제법 숙련되었죠. 재능기부라고 해서 러시아 등 해외로 자원봉사를 다녀오기도 했어요.

Q : 그런데 어떻게 농사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A : 아, 그런데 기계를 만지면 만질수록 흥미가 없어지는 거예요. 만지는 것이 다 생명이 없는 기계잖아요. 기계 만지는 것을 좋아하기는 했지만 하루 종일 기계들과 생활하다보니 좀 재미가 없어지더라고요. 그 당시 형이 농사에 대해서 크게 관심을 갖고, 농업대학에 다닐 때였는데, 저도 농사에 대해서 배워보고 싶은 생각이 조금씩 생기게 되었어요. 생명공학이라고 말하는 농사를 배워보고 싶은 호기심이 생겼어요. 그래서 진로를 바꾸어 22살에 돌나라 천연농업대학에 입학하게 되었죠.

1천 헥타르 벼밭


Q : 그러면 형 경래씨와 한 학교를 다니면서 어떠했나요?

A : 네. 그때 형은 2학년 선배였어요. 같은 학교에 다니게 된 것이죠. ‘생명공학’이라는 농사에 흥미를 갖고 우리 두 형제는 열심히 공부했어요. 그런데 농사는 배울수록 재미가 생기더라고요.

종자용 훼이종콩을 직접 채종하는 모습


Q : 어떤 면에서 농사가 재미있었나요?

A : 살아있는지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작은 씨앗을 땅에 심어요. 그런데 그것이 지력과 물과 태양의 힘을 받아 싹이 틉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하루하루 다르게 자라는 거예요. 날마다 달라요. 날마다 자라나요. 그러면서 열매가 맺히는데 수십 배, 수백 배를 가져다 줘요. 아, 너무 신기하지 않나요. 파종부터 시작해서 결실하는 모든 과정을 통해서 생명의 신비로움에 사로잡히게 되요. 희열, 재미, 보람을 느꼈다고나 할까요?

Q : 지금은 해외농업의 프로젝트로 시작된 이곳 브라질에서 대규모 농사 경영을 하고 있으신데 특별한 동기라도 있었나요?

A : 학교를 졸업하고 한농복구회 울진 지부에서 스물여섯 살까지 농사를 지었어요. 어느 날, 우연히 브라질 해외농업이라는 프로젝트가 있는데 지원할 농업인을 모집하더라고요. 호기심이 생겼죠. 한국은 땅이 좁잖아요. 이왕이면 좀 더 넓은 대륙에서 농사를 짓고 싶었어요. 주저하지 않고 바로 지원했죠. 5살 된 딸아이와 적극 지지해 주는 아내를 데리고 2013년 10월, 서른네 살에 이곳 브라질에 오게 된 거예요. 이곳에는 그동안 감히 상상할 수도 없었던 대규모의 농토가 준비되어 있었어요. 처음 접하게 된 넓고 넓은 300헥타르(90만평)의 밭, 끝도 보이지 않는 농토를 대한 첫 마음은 상당히 저를 설레게 했어요. 이야! 이곳은 제 모든 꿈이 다 이루어지는 현장인 셈이죠. 기계 다루는 것을 아주 좋아했던 그 재능도 살리고, 농사도 재미있게 지을 수 있으니 말이죠.


콤바인을 점검하고 있는 모습



Q : 기계VS농사, 엔지니어VS농부 이것이 어떤 관계인지 설명을 좀 해주세요.

A : 대농(대규모농사)은 기계농이에요. 이 넓은 농토를 사람의 손으로 할 수 없잖아요. 기계로 밭을 일구고, 기계로 파종하고, 기계로 제초하고, 기계로 수확을 해요. 우리 농사의 특징은 본질적으로 무제초, 무비료, 무농약으로 완전 유기농법인데, 브라질에는 유기농이 확산이 안 되어 있었고, 더군다나 유기농으로 하는 대농은 이곳 바이야주에는 아예 없었어요.

우리가 원하는 적합한 기계를 찾을 수가 없었어요. 그러니 어떻게 해요? 만들어야죠. 개조하는 거예요. 여기서 재미가 있더란 말이죠. 이 나라에서 구입한 기계를 우리 농법에 맞게 개조를 했어요. 그러니 전 기계도 다루고 농사도 짓고, 투잡을 하게 된 셈이죠(하하하). 그래서 파종기나 제초기 등을 직접 만들어가며 일을 했어요. 제초제를 치면 얼마나 쉽겠어요. 그러나 돌나라 한농은 유기농의 메카 아닙니까?.

Q : 해외에서 농사를 하다보면 힘든 일도 많았을 것 같은데 어떤 점이 어려웠나요?

A : 어려움이 많았죠. 대농에 대한 지식이나 경험도 없었고, 정보도 전혀 없었어요. 처음에는 막막했어요. 게다가 유기농으로 대농을 한다는 것은 정말 불가능한 일이었어요. 이곳 현지인들도 다 그리 말했으니까요. 지금은 농지를 많이 확보해 1천 헥타르(300만평)가 넘는데 제초제나 비료, 농약을 안치고 대농을 한다는 것은 정말 생각도 못하는 일이었죠.

병충해로 인해 갈아엎었을 때도 있었고, 가뭄으로 농작물을 다 태워버린 적도 있었으나, 그 모든 것들은 저에게 큰 경험이 되었고 힘이 되었어요. 무엇보다도 관수시설 없이 대농을 한다는 것은 너무 무모한 짓이죠. 그런데 그런 관수시설 없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최선을 다해서 노력한 다음에 전적으로 하늘의 도움을 바랬던, ‘진인사 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신념이었던 것 같아요.


유치원 교사인 부인 조경아씨와 아들-딸



Q : 많은 어려움을 겪고 지금은 어느 정도 정착한 것 같은데 어떤가요?

A: 6년이 지난 지금, 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성장했고 지금은 기계도 많이 발전했으며, 경험도 생겨서 일이 쉽고 재미있고 보람을 느낍니다. 제초제나 비료를 안 쓰고도 기계를 이용해 충분히 대농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 뿌듯하고 스스로 생각해도 자랑스러워요. 많은 어려움을 자초하면서까지 꼭 유기농을 해야 하는 것은, 생명을 위협하는 불량식품이 만연한 이때에 안전한 먹거리로 세계 인류의 생명을 지킨다는 자부심이 크기 때문에 그래요.

300헥타르로 시작한 농사가 지금은 1천 헥타르로 그 규모가 더 방대해졌어요. 제초기계를 발전시키고 발전시켜 지금은 제초의 완성도도 높아졌고, 처음에는 마땅한 장비도 없이 대농에 대들었었으나 지금은 고가의 장비도 제대로 갖추어져서 대농을 하는 것이 갈수록 쉽고 행복합니다. 또한, 한국에서 냉동설비 엔지니어로 일한 경험이 있는데, 이곳에서 3억원대의 견적 설비를 8천만원대로 저렴한 가격에 직접 대형 저온 냉장창고, 냉동창고를 설치하여 운영하기도 했어요. 인생을 논하기는 좀 그렇지만, 살면서 제가 하고 싶은 일을 다 하고 산다는 것이 정말 행복이 아닐까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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