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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영등포구 콘래드 서울호텔에서 후버트 핑크 랑세스그룹 부회장이 매일경제와 인터뷰하고 있다. 이충우 기자 |
"랑세스는 한국 석유화학 기업들보다 먼저 중국 저가 공세를 겪었지만, 스페셜티 전환을 통해 이 같은 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했습니다.
앞으로의 10년 동안 사업규모는 작은 대신 부가가치가 높은 특수화학 제품으로 사업 전환을 완성할 것입니다.
"
지난달 28일 랑세스 창립 20주년을 맞아 방한한 후버트 핑크 랑세스 부회장은 영등포구 콘래드서울 호텔에서 한 매일경제와의 인터뷰에서 이같이 말했다.
랑세스는 현재 세계 1위 특수첨가제 공급 기업이다.
특수첨가제는 플라스틱, 윤활유, 고무 등 다양한 제품의 내구성과 난연성을 향상시키는 고부가가치 제품이다.
다만 랑세스가 처음부터 이 같은 고부가가치 제품에 뛰어든 것은 아니다.
유럽의 '강소' 스페셜티 기업으로 꼽히는 랑세스의 주력 사업은 10년 전까지만 해도 다름 아닌 합성 고무였다.
랑세스의 전신은 120여 년 전에 세계 최초로 합성고무를 개발·양산한 바이엘이다.
2005년 바이엘은 합성고무를 포함한 화학·폴리머 사업부문만 떼어내 분사했는데, 이것이 지금의 랑세스다.
핑크 부회장은 "랑세스는 120여 년 전통의 합성고무 사업을 이어받은 회사"라며 "세계에서 가장 오랫동안 합성고무 사업을 해온 1등 기업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고 말했다.
120여 년간 축적된 기술 노하우를 바탕으로 랑세스는 10년간 합성고무 사업 1위로 군림했다.
특히 '부틸 고무(Butyl Rubber), 에틸렌프로필렌디엔 고무(EPDM) 등의 특정 제품군에서 글로벌 1위 공급업체로 꾸준히 자리매김해왔다.
다만 2013년 전후로 중국 기업들이 합성고무 시장에 대거 뛰어들자 랑세스의 주력 사업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핑크 부회장은 "세계 1위 자리에 있던 합성고무 사업부는 랑세스의 꾸준한 수익원이 돼 준 탄탄한 사업이었다"면서도 "중국발 공급과잉, 큰 원가 변동성, 높은 탄소배출량 등 명확한 한계점이 드러났다"고 설명했다.
중국 저가 공세의 풍파를 겪은 랑세스가 택한 방향은 '자산 경량화' '스페셜티 전환'이었다.
랑세스는 지난 9년간 총 5개의 주요 석유화학 사업을 매각했다.
사업의 최전성기에 있던 합성고무 사업은 2018년 사우디아람코에 모두 매각했다.
핑크 부회장은 "결코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고 회고했다.
합성고무 사업부는 매우 탄탄한 수익원으로, 사실상 최전성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범용제품 사업은 더 이상 랑세스가 추구하는 미래 전략과 부합하지 않다는 판단에 이 같은 대수술을 단행했다.
사업매각을 통해 랑세스는 약 62억유로의 유동성을 확보했고, 이 중 42억유로를 투입해 특수첨가제, 고기능 중간체 등을 생산하는 스페셜티 기업 10여 개사를 인수했다.
미국계 첨가제 기업 켐추라 인수가 대표적이다.
핑크 부회장은 "특히 여러 첨가제 중 화재·안전 표준을 강화하는 세계적 추세에 따라 수요가 커질 난연제 시장을 공략했다"며 "랑세스는 현재 특수첨가제 공급 글로벌 1위로 올라섰다"고 강조했다.
미국 특수화학사 IFF도 인수해 항균제 시장에도 뛰어들었다.
미생물 항균제는 산업용수처리, 페인트 및 코팅 등 다양한 산업에 활용된다.
컨테이너, 선박 선체에도 항균제가 코팅된다.
선체에 조류, 홍합, 박테리아가 붙으면 선박 이동이 느려지는데, 항균 처리로 이 같은 현상을 방지해 에너지 소비(연비)를 줄일 수 있다.
신약개발 공정에 폭넓게 사용되는 살균제 공급도 세계 1위 수준이라고 핑크 부회장은 말했다.
산업용 중간체 포트폴리오도 강화했다.
랑세스는 반도체 제조에 필수적인 불산(HF), 인쇄회로기판(PCB) 제조용 마이크로 에칭제 등을
삼성전자·
SK하이닉스를 포함한 국내외 반도체 기업들에 공급 중이다.
랑세스는 전 세계 산화철 최대 공급 기업이기도 하다.
핑크 부회장은 "산화철은 건설 자재 쪽에서 많이 사용돼왔다"면서 "향후에는
LFP 배터리의 전해액으로의 활용도 더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랑세스의 매출은 63억6600만유로, 상각전영업이익(EBITDA)은 전년 대비 20% 증가한 6억1400만유로를 기록했다.
이 중 특수 첨가제 부문 EBITDA는 전년 대비 8.6% 증가한 2억2700만유로를 기록했다.
고기능 중간체 부문 EBITDA는 전년 대비 73.6% 증가한 2억1000만유로의 성과를 냈다.
모든 사업부에서 영업이익률 10% 이상을 달성하고 있는 점도 고무적이다.
핑크 부회장은 랑세스의 향후 10년간 생존 전략을 '매스(mass)'가 아닌 '클래스(class)'라고 요약했다.
대규모 자본을 투입해 대량생산하는 범용 제품(매스)이 아닌, 차별화된 기술 장벽으로 가격경쟁으로부터 자유로운 고부가가치 제품(클래스)에 집중한다는 요지다.
핑크 부회장은 "생산규모가 작지만 기술 격차를 통해 높은 마진을 낼 수 있는 고부가가치 제품으로 시장은 이미 옮겨가는 중"이라고 말했다.
랑세스 외 유럽 내 유수 화학기업들도 이미 발 빠르게 사업 개편을 진행하는 추세다.
독일의 에보닉은 범용화학 제품 대신 생명과학 제품으로 전환을 성공했다.
현재 스페셜티 매출 비중은 80%에 육박한다.
네덜란드 DSM도 2010년대 초부터 석유화학사업부를 전면 매각한 후 생명과학·영양제 기업으로 완전히 탈바꿈한 상태다.
랑세스는 자사에 남은 마지막 범용제품 사업인 우레탄 사업까지 지난 1일 매각했다.
이로써 랑세스는 지난 20년간 캐시카우 역할을 해왔던 범용제품 사업을 전부 매각하게 됐다.
핑크 부회장은 한국 내 석유화학 업계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조언을 하기는 어렵지만, 한국 석유화학 업계가 직면한 도전 과제는 과거 랑세스가 직면했던 상황과 유사하다"고 말했다.
이어 핑크 부회장은 "지금 이 순간에도 시장은 변화하고 있고, 규제기관의 요구도 달라지고 있다"며 "화학기업들 역시 이 같은 변화에 발맞춰 포트폴리오를 다양화하는 등 유연한 대응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재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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