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이 이렇게 많이 팔린 것도, 젊은 손님이 이렇게 많은 것도 처음입니다.

"
지난해 코로나19로 고전하던 미술 시장이 극적으로 살아났지만 미술품 경매사와 화랑 주인들은 대놓고 웃지 못한다.

2007년 악몽이 떠올라서다.

당시 노무현정부의 강도 높은 부동산 규제로 몰려온 '복부인'들이 그림을 사들여 호황이 왔지만 이듬해 금융위기와 기업의 그림 비자금 사건 등으로 오랫동안 내리막길을 걸었기 때문이다.


경매에서 30억원대 작품을 낙찰받은 한 기업인은 세무조사 끝에 탈세 혐의로 250억원을 추징당하는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이후 수집가들은 국세청의 표적이 될까봐 그림 구입을 숨기게 됐다.


돈이 몰리는 곳에는 어김없이 정부 규제도 따라왔다.

2007년 6045억원으로 정점을 찍었던 국내 미술 시장 규모는 2013년 미술품 양도소득세 부과 이후 4000억원대로 쪼그라들었다.


뒷걸음치던 미술 시장에 코로나19는 위기이자 기회가 됐다.

'집콕'으로 인테리어에 눈을 뜬 20~40대가 그림에 관심을 가지고 됐고, 외국 여행을 못 가서 모으게 된 목돈을 들고 경매사와 화랑으로 왔다.

부동산 규제로 갈 곳 잃은 유동자금에 비트코인과 주식으로 번 돈까지 몰려오면서 미술 시장이 다시 활기를 찾았다.


한 갤러리 대표는 "20대 남자가 '미술품 100점을 보관할 수장고를 만들어놓고 그림을 사러 왔다'고 해서 깜짝 놀랐다.

요즘 돈을 투자할 데가 그림밖에 없다고 하더라. 인기 작가 작품 가격은 상승 여지가 높아 동이 났다"고 말했다.


실제로 젊은 '큰손'들이 한국 추상화 거장 이우환, 박서보, 정상화, 이건용 작품을 싹쓸이하는 바람에 예약을 해도 언제 작품을 살지 기약하기 어렵다.

우국원, 문형태, 김선우 등 젊은 작가 작품도 폭발적인 인기를 끌어 품귀 현상이 일어났다.


전문가들은 지금의 미술 '불장'이 여러모로 2007년과 비슷하다고 분석한다.

그때도 젊은 작가 작품이 1억원을 넘기며 날개 돋친 듯 팔렸고, 복부인들이 그림을 쓸어담는 '묻지마 투자'가 성행했다.

하지만 세무당국의 '칼날'과 젊은 인기 작가의 작품 과잉 공급 등 체계적인 관리 실패로 미술 시장은 불황으로 접어들었다.

과열된 경매에서 산 억대 작품의 폭락을 경험한 고객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도 그나마 2007년과 다른 점은 젊은 수집가들의 수준이다.

미술 전문가 못지않은 지식을 가지고 체계적인 투자를 하는 MZ세대가 많다.

한 갤러리 대표는 "전 세계 미술 시장 흐름을 화랑 주인보다 더 잘 아는 젊은 손님이 늘었다"고 말했다.

이들이 장기적인 안목을 갖고 작가들의 성장을 돕는 투자를 계속한다면 미술 시장 미래가 밝아질 것으로 기대된다.


아시아 미술 중심이었던 홍콩이 정치 불안으로 흔들리면서 세계적 갤러리들이 한국에 분점을 내고, 내년에 한국화랑협회와 세계 3대 아트페어인 영국 프리즈가 서울 코엑스에서 미술품 장터를 공동 개최하는 것도 고무적이다.

외국 유명 갤러리들이 국내 작가들의 가능성을 발견할 기회가 온 것이다.


14년 만에 불씨를 살린 미술 시장 규모를 더 키우려면 정부 정책도 필요하다.

한국 작가들의 외국 전시를 전폭적으로 지원해 드라마·영화·가요에 이은 미술 한류를 뒷받침해줘야 한다.


지원이 어렵다면 중견기업 매출도 안되는 국내 미술 시장에 '찬물'을 끼얹는 규제를 자제해야 한다.

아트프라이스가 2019년 집계한 세계 순수미술(골동품 등 제외) 경매 시장은 미국(46억1400만달러) 중국(41억200만달러) 순으로 한국(5500만달러)보다 각각 84배, 74배 많다.

요즘 국내 경매사와 화랑은 통장과 카드를 통한 투명한 거래를 하고 있어 '검은돈'이 흘러올 가능성도 예전보다 덜하다.


[전지현 문화스포츠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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