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3위 車반도체 기업 르네사스
신사업 ‘SiC 전력반도체’ 개발 포기
SiC 웨이퍼 시장 장악한 中 굴기에
기존 1위 美 울프스피드 파산 위기
10년 치 先주문한 르네사스도 충격
SiC 신사업 키우는 K반도체 위기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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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르네사스> |
“환경이 극적으로 변하고 있다.
중국 경쟁업체와 정면 승부에서 이기기가 어렵다.
”
일본이 자랑하는 세계적 차량용 반도체 기업 ‘르네사스’(Renesas)가 통렬한 반성문을 썼습니다.
한국의 글로벌 일류 기업이 직면한 것과 같은 고민입니다.
‘중국발 충격’입니다.
‘반도체 국가대표’, ‘마지막 반도체 희망’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이 회사의 시바타 히데도시 사장은 오는 2030년까지 기업 가치를 6배 키워 10조엔(약 95조원)을 달성하겠다는 성장 목표를 5년 뒤인 2035년으로 미룬다고 27일 발표했습니다.
중국과 정면 승부에서 이기기 어렵다는 이날 고해성사에 담긴 키워드는 ‘중국’ 그리고 ‘실리콘 카바이드’입니다.
르네사스는 네덜란드 ‘NXP’, 독일 ‘인피니언’과 함께 세계 차량용 반도체 시장을 이끄는 트로이카입니다.
회사는 고전압에 강한 전기차용 실리콘 카바이드(SiC) 전력 반도체에서 미래 성장 동력을 키우고 있었는데 최근 급변한 시장 상황에 급브레이크를 밟은 것입니다.
이날 발표 내용으로 보면 SiC 개발은 중단되고 사업 책임자도 곧 물러날 예정입니다.
SiC를 제외한 질화 갈륨 등 다른 화합물 반도체 개발은 계속됩니다.
르네사스는 불과 2~3년 전까지 이 반도체 수요가 급증할 것으로 보고 대규모 투자 계획을 내놓았지만 중국의 영향으로 모든 시장 역학이 바뀌었습니다.
중국 EV 기업들이 세계 시장을 장악하는 가운데 트럼프 2기 등장, 그리고 유럽과 미국의 전기차 보조금 종료, 중국 자체 웨이퍼와 칩 생산 증가가 동시다발적으로 밀려왔습니다.
르네사스는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에 “SiC는 ‘레드오션’, 즉 경쟁이 치열한 시장이 됐다”고 말합니다.
르네사스의 실패 선언은 다른 첨단 산업처럼 ‘중국의 기술 약진→미국의 쇠락→미국과 연대한 일본 동시 충격’이라는 격류 속에서 표출되는 SOS 구조 신호입니다.
중간 단계인 미국의 세계 1위 SiC 반도체 기판(웨이퍼) 생산 기업인 ‘울프스피드’가 중국 기업과의 경쟁에서 밀려 파산을 준비하면서 울프스피드 웨이퍼를 기반으로 차량용 반도체 신사업을 준비하던 르네사스가 연쇄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1987년 노스캐롤라이나에서 설립된 젊은 기업인 울프스피드는 기존 실리콘보다 고열·고전압 환경에 강한 SiC를 활용해 웨이퍼를 공급해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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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콘 카바이드 웨이퍼 <이미지=울프스피드> |
글로벌 1등 공급사로 떠오른 울프스피드는 최근 수년 새 중국 업체들이 더 저렴하고 높은 수율을 바탕으로 한 고품질 SiC 웨이퍼 공급자로 등장하면서 휘청거렸습니다.
특히 시장의 탄탄한 수요를 확신하고 대규모 설비 투자를 단행했다가 갑자기 수요가 줄자 재정이 악화한 것입니다.
그 불똥이 르네사스로 튀었습니다.
회사는 지난 2023년 울프스피드와 10년간 SiC 웨이퍼 장기 공급 계약을 맺고 20억달러(약 2조7000억원)를 선지급했습니다.
울프스피드가 파산하면 르네사스는 이 거액을 허공에 날리게 됩니다.
국내 일부 업체들이 SiC 웨이퍼 공급망에 합류할 예정인 가운데 울프스피드의 파산은 최근 미중 간 희토류·영구자석 분쟁처럼 미래 차량용 반도체 사업에서 중국의 공급 패권이 확대될 것으로 보입니다.
관련해서 매일경제는 지난 12일 <하버드대보다 산둥대 석박사가 ‘S급’될 수도···생존하려면 바꿔야 할 기업의 해외인재 영입 공식> 보도를 통해 SiC 소재 분야에서 중국의 대약진을 조명했습니다.
SiC를 포함한 화합물 반도체 사업은 최근 2~3년 사이 한국의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미래 먹거리 사업으로 도전하는 분야입니다.
그런데
삼성전자 사업보고서를 보면 이 사업을 이끄는
CSS사업팀장(부사장) 재직 기간이 22개월, 또 다른 사업 담당 임원(상무)은 12개월에 불과합니다.
SK도 2022년 SiC 전력 반도체 기업 한 곳을 인수하는 방식으로 이 분야에서 새 도전을 시작했습니다.
세계 3위권 공급사인 르네사스의 실패는 우리 기업들의 후속 움직임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입니다.
중국은 어떨까요. 미래 반도체 사업인 SiC 분야에서 지난 20년간 오로지 이 분야에만 천착한 쉬샹강 산둥대 교수가 있습니다.
산둥대는 쉬샹강 교수 연구팀의 특허가 중국 기업들에 이전돼 첨단 전투기와 유도 미사일, 대형 군함 등에 적용되는 레이더 시스템의 현저한 도약이 가능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지방의 한 대학에서만 20년을 파고든 연구진이 존재하는 중국의 역량을 고려할 때 미국 울프스피드 파산 위험, 일본 르네사스의 사업 포기 선언은 예고된 재앙입니다.
경력 2년 안팎의 전문가가 사업을 이끄는 한국의 대표 기업과도 대조되는 인적 역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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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바타 르네사스 CEO <이미지=시바타 히데도시 소셜미디어> |
시바타 르네사스 CEO는 사업 철수 발표에서 “기본으로 돌아가겠다”고 강조했습니다.
자사의 강점 중 하나인 마이크로 컨트롤러(MCU)를 다른 칩 및 소프트웨어와 번들로 묶어 단일 시스템으로 판매해 고객사에 더 많은 가치를 제공하겠다는 설명입니다.
“기본으로 돌아가겠다”는 시바타 CEO의 발언은 역으로 중국의 압도적 선두 국면에서 이전 선두였던 일본과 한국 기업이 고를 신사업 ‘선택지’가 얼마나 협소한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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