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고 복잡한 도시가 오히려 지속가능한 성장의 열쇠가 될 수 있을까.
전 세계 주요 도시들이 도시 확장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해법으로 '컴팩트시티(Compact City)' 전략을 택하고 있습니다.
이제 면적 중심의 팽창 정책에서 벗어나 밀도 중심의 도시 재구성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 '팽창'의 역사, 확장의 딜레마
"주택이 부족하면 땅을 넓히면 된다."
그 동안 부동산 정책은 "수요가 있으면 그만큼 공간을 넓히면 된다"는 '팽창'의 논리에 기반해 설계돼 왔습니다.
대표적으로 1980년대 후반, 서울의 주택난과 집값 급등을 해결하기 위해 '1기 신도시' 개발 정책이 도입됐습니다.
분당, 일산, 평촌, 산본, 중동 등 수도권 외곽에 대규모 택지를 조성해 대량의 주택을 공급함으로써 서울의 인구 과밀을 해소하려는 시도였습니다.
단기간 주택 공급에는 성공했지만, 이후 서울과 신도시간의 통근 거리 증가, 교통 혼잡, 중심지 상실 문제를 동반했습니다.
1기 신도시의 효과가 한계에 도달할 무렵인 2000년대 초반, 정부는 판교, 김포한강, 위례, 동탄, 파주운정 등 2기 신도시를 개발했습니다.
이들도 주택 공급 확대에는 기여했지만, 여전히 서울 중심지로의 출퇴근 수요가 커 통근 부담과 교통난이 가중됐습니다.
2000년대 중반에는 수도권 과밀과 지방 소멸 문제를 동시 해결하기 위해 지방에 '혁신도시'와 '기업도시'를 조성하는 정책이 시행됐습니다.
공공기관 이전을 중심으로 공공기관과 대학, 연구기관, 일부 기업들이 지방으로 이전했지만 생활 인프라와 일자리 부족으로 실제 거주 인구 유입은 제한적이었습니다.
물리적 공간은 확장됐지만 사람과 일자리, 산업 기능은 충분히 응축되지 못한 채 불균형 심화로 이어진 것입니다.
최근에도 정부는 남양주 왕숙, 하남 교산, 인천 계양, 고양 창릉, 부천 대장 등 3기 신도시 개발을 발표했습니다.
이 역시 서울의 집값 안정을 위해 외곽에 새로운 주택 단지를 추가 공급하는 전략이지만 기존 신도시가 '베드타운'화하고 자족 기능 부족·중심지 이탈 현상이 반복될 수 있다는 우려를 낳고 있습니다.
◇ 세계 주요 도시는 '컴팩트시티'로 전환중
이러한 확장형 도시계획의 한계를 넘기 위해 전 세계가 주목하는 개념이 바로 '컴팩트시티'입니다.
이는 단순한 물리적 축소가 아닌, 사람과 산업, 삶의 질이 밀도있게 응축된 도시를 지향합니다.
'컴팩트시티'라는 개념은 지난 1973년 미국의 수학자 조지 단치그(George Dantzig)와 토머스 사티(Thomas L. Saaty)가 공동 저술한 『컴팩트시티(Compact City): 살기 좋은 도시 환경 계획(A Plan for a Liveable Urban Environment)』에서 처음 사용됐습니다.
이들은 도시의 효율성과 자원 활용 극대화를 목표로 하는 이상적인 도시 모델을 제시하며 고밀도 주거, 혼합 용도 개발, 대중교통 중심의 도시 구조를 강조했습니다.
이후 이 개념은 기후 위기와 코로나19 팬데믹을 계기로 다시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에너지 소비와 탄소 배출을 줄이는 지속가능한 도시 모델이자, 팬데믹 이후 도시 재설계 필요성을 절감한 정책 전문가들에게 지역 밀착형 구조로 주목을 받았습니다.
전 세계 주요 도시들은 컴팩트시티 전환을 본격화하고 있습니다.
프랑스 파리는 '15분 도시(15-minute city)' 개념을 도입해 주민들이 주거지 15분 이내에서 일상생활에 필요한 모든 기능을 이용할 수 있도록 도시를 재설계하고 있습니다.
안 이달고(Anne Hidalgo) 시장의 주도로 추진된 이 정책은 도시의 지속가능성과 주민 삶의 질 향상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오스트리아 빈은 약 22만 개의 시영 아파트와 20만 개의 보조금 지원 주택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빈 모델(Vienna Model)'로 알려진 사회주택 정책을 통해 전체 인구의 약 50%가 공공 또는 보조금을 받는 주택에 거주하고 있어 사회적 통합과 주거 안정성을 높이는 데 기여합니다.
덴마크 코펜하겐은 '
핑거플랜(Finger Plan)'을 통해 도시 확장을 제한하고 교통망과 녹지 공간을 효율적으로 배치해 지속가능한 도시 개발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1947년에 수립된 이 계획은 도시를 다섯 개의 손가락 형태로 확장시키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손가락 모양을 따라 철도 노선을 설치하고 각 손가락 사이에는 녹지 공간을 배치했으며 자전거 도로와 대중교통 중심의 도시 구조를 강화해 주민들의 이동성을 높인 것이 특징입니다.
◇ "컴팩트시티, 지속가능한 도시 발전 위한 핵심 전략"
전문가들은 컴팩트시티는 지속가능성을 요구받는 이 시대에 적합한 도시모델이라고 말합니다.
프랑스 소르본 대학교의 카를로스 모레노 교수는 파리를 예로 들며 "15분 도시는 기후 변화에 대응하고 지역 경제를 활성화하며 사회적 포용성을 높이는 도시 모델"이라고 평가했습니다.
호주 커틴대학교의 피터 뉴먼 교수는 "컴팩트시티는 도시의 에너지 소비를 줄이고 대중교통 중심의 구조를 통해 지속가능성을 높이는 데 기여한다"면서 지속가능성을 강조했습니다.
컴팩트시티 모델은 거주민들의 삶의 질 향상이라는 도시 개발의 최종 목표에도 부합합니다.
덴마크 건축가이자 도시디자이너인 얀 겔은 "도시를 사람 중심으로 설계하면 걷기와 자전거 이용이 활성화되고 사회적 상호작용이 증가하며 삶의 질이 향상된다"면서 도시의 본질은 결국 '사람'에 있다고 말합니다.
◇ 국토 균형발전과 부동산 안정, 두 마리 토끼 잡을까
컴팩트시티 전환은 국토 균형발전과 부동산 시장 안정을 동시에 달성할 수 있는 전략으로도 주목받고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이 전략의 효과로 인구 감소 속에서도 도시 기능과 활력을 유지할 수 있는 '스마트 밀도(Smart Density)', 산업과 인재가 모이는 '집적 경제(Agglomeration Economy)', 도시 관리 비용을 절감하고 지속가능성을 높이는 '저비용-고효율 인프라 구축'을 꼽습니다.
컴팩트시티형 개발은 지방 거점 도시에 새로운 투자 기회를창출하고 수도권 외곽의 무분별한 개발 수요를 억제하는 효과를 가져옵니다.
또한 역세권 중심의 주택 공급, 생활SOC 복합화 교통·문화·산업 기능의 다핵화 전략을 통해 부동산 시장의 공급 안정성도 높일 수 있습니다.
◇ 정책 성공 위한 4대 과제는?
컴팩트시티 정책이 성공하려면 규제 정비, 인센티브를 통한 유인책, 지역별 맞춤형 설계, 인프라 선제 구축 등 4가지 과제가 선결돼야 합니다.
우선 용도지역 통합, 복합용도 개발 허용, 건폐율·용적률 상향 등 밀도 개발을 위한 규제 혁신이 필요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입니다.
또 민간 개발 참여 확대를 위한 세제·금융 지원, 중소기업·스타트업 클러스터 유치 인센티브가 요구됩니다.
이와 함께 획일적 정책이 아닌, 지역별 인구·산업·지형에 최적화된 맞춤형 컴팩트시티 모델이 필요합니다.
아울러 대중교통 중심의 이동성 강화, 5G·스마트시티 플랫폼·디지털 트윈 기반의 도시 관리 시스템의 선제적 마련이 중요합니다.
◇ "면적 중심에서 밀도 중심으로"…정책 패러다임 바꿔야
우리나라 부동산 정책은 이제 '면적 중심'에서 '밀도 중심'으로 '확장'에서 '재구성'으로 바뀌어야 할 때입니다.
컴팩트시티는 단순한 도시계획 용어가 아니라 경제·사회·환경의 지속가능성을 담보하는 전략적 해법입니다.
한국 도시의 미래를 바꿀 이 전략의 실현 여부는 정책 전환 의지와 실행력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나라 부동산 정책의 새로운 방향에 대한 보다 심층적인 분석은 매일경제TV가 선보이는 프리미엄 콘텐츠 플랫폼 『CEO인사이트』 제 14호 '압축의 미학, 도시의 미래를 설계하다'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 김하영 기자 / kim.hayoung@mktv.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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