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여년 아나운서로 지낸 강재형 작가는 ‘음성(소리)에 기운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전했습니다. 말과 글에 천착하며 지낸 방송 생활을 통해 ‘문자에도 기운이 있을까’ 궁금하여 시작한 작업이 ‘텍스토그램’이라는 설명입니다.
위 궁금증을 풀기 위해 시작한 작업이 ‘훈민정음_108’ 시리즈로 뜻은 같으나 문자가 다른 ‘훈민정음 서문’을 텍스트로 작업한 것입니다. ‘나랏말씀이 중국과 달라...’(한글 108자)와 ‘國之語音...’(한자 54자)의 뜻은 하나이나 문자가 다르니, 문자를 겹친 이미지에 그 문자(텍스트)의 ‘기운’이 다를 것이다는 가설 세우고 작업에 임했다는 설명입니다.
이에 강재형 작가는 ‘동주_2021’로 윤동주의 시 세계를 다룬 ‘2인전’을 개최하고 있습니다. 함께하는 작가는 박종호(오일 파스텔, 캔버스 작업)입니다.
‘동주_2021’ 2인전은 지난 5일 개막해 오는 22일까지 서울 연희동 ‘아터테인’에서 열립니다.
다음은 강재형, TexToGram, 작가 노트.
시인(詩人) 윤동주(尹東柱) 열사(烈士)
“우리말 인쇄물이 앞으로 사라질 것이니 무엇이나 악보까지라도 사서 모으라”
동주가 고향의 동생들(혜원惠媛, 일주一柱, 광주光柱)에게 당부한 말이다. 1942년 7월 릿쿄(立敎) 대학 1학년 첫 학기를 마친 여름방학에 남긴 말이다. 살아생전 최후의 귀향이었고, 이때 동생들에게 한 말은 곧 유언이 되었다. 동주의 조선어(한국어), 한글 사랑을 한마디로 웅변하는 장면이다.
왜 동주인가.
탄생 100주년을 보냈고, 그가 떠난 지 일흔 여섯 해가 된 지금 그를 소환하는 게 어떤 의미인가. 작가로서, 아나운서로서, 치열했던 그의 삶을 곱씹기 위해서이다. ‘지사(志士)’ 보다 ‘열사’가 어울리는 윤동주. 사후 45년이 흐른 1990년 광복절에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이 추서된 독립운동가 동주. ‘시인’ 윤동주를 ‘열사’라 부르자 청하는 까닭이다. 죽은 뒤 독립운동가가 된 윤동주 열사. 그 이전에 동주는 시인이 되었다. 고향 용정(龍井)에 있는 묘비엔 ‘시인윤동주지묘(詩人尹東柱之墓)’가 큼지막하게 남아 있다. 동주가 죽고 난 뒤 아버지와 할아버지에게서 처음으로 ‘시인’으로 인정받은 셈이다.
왜 동주인가.
아나운서인 작가는 그의 조선어(모국어) ‘사랑’을 넘어선 ‘집착’에 주목한다. 시인들은 말한다. ‘詩는 삶과 꿈을 가꾸는 언어의 집’이라고. 여기서 ‘언어’는 모국어, 곧 조선어였지만 그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당시 ‘국어(國語)’는 일본어였으니까. 그 시절, 태평양 전쟁에서 패색이 짙어가는 일제 강점기 후반 ‘조선어 말살 정책’이 본격화되면서 ‘조선어 사용’이 사실상 금지되었음에도 ‘조선어’를 고집한다. ‘우리말 책을 모아두라’는 당부도 따지고 보면 ‘목숨 건 일’이었을 것이다. 일본 도시샤(同志社) 대학 재학 중 ‘체포 혐의’는 ‘조선어로 시를 쓴’ 것이었다. 조선어가 뭐라고, 詩가 뭐라고….
동주가 태어난 지 100년이 되던 2017년에 작업을 시작했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의 영인본이 쏟아져 나올 즈음이었다. 텍스토그램 작업을 하는 작가에게 동주의 육필(肉筆) 원고와 시집 초판본의 텍스트는 그냥 둘 수 없는 자산이었다. 학창시절에 ‘서시(序詩)’를 암송하며 동주의 시를 들락거리던 작가에게는 더더욱 그러했다. 1955년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 증보판의 여러 판본을 모아 작업을 시작했다. 동주의 친필원고 영인본과 ‘윤동주 자필 시고전집’을 비롯한 여러 판본의 텍스트를 바탕으로 작업했다. 작업은 순조로웠다. 2017년 이른바 ‘촛불정국’이 본격화 되면서 회사 안팎의 형편이 여의치 않게 되기 전에는 그랬다. 이듬해부터 2년여를 그렇게 보냈다. 그리고 2021년 비오는 어느 날 작업을 마무리했다.
동주의 시 120여 편을 훑었다. 동주의 시를 읊조리고 필사(筆寫)하는 얼마간 우울하기도 했다. 우울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동주의 맑은 영혼과 굽히지 않는 기개가 답답함과 억눌림을 깨쳐 주었던 까닭이다. 동주의 시와 습작 노트를 꼼꼼히 챙겨보며 작가(동주-재형)의 뜻을 새길 16편을 추려서 작업했다.
연모가 바뀌었다. 원고지와 습작 노트에 글을 쓰던 동주, 사진으로 작업하는 작가. 2011년 첫 전시 때 사용한 카메라는 ‘똑딱이’였다. 대포 렌즈에 무거운 몸체는 작가에게 어울리지 않는 거 같았다. 2016년 ‘텍스토그램’ 작업에는 ‘고화소(高畫素) 카메라’를 사용했다. 암실(暗室)의 인화용 확대기처럼 생긴 ‘접사대(接寫臺)’에 당시 최고 화소의 DSLR 카메라를 ‘장착’해 촬영했다. 세상이 바뀌니 연모도 바꾸었다. DSLR 카메라가 굳이 필요하지 않았다. ‘카메라 하나 사는 셈 치고’ 호사부린 스마트폰이 정말 ‘카메라 몫’을 톡톡히 해냈다. 동주가 현재를 살고 있다면 어느 걸 고를까. 왠지, 작가와 같은 선택을 하지 않을까 싶다. DSLR 카메라 화소는 3600만이었는데 폰 카메라는 1억 3백만 화소. 게임 끝.
‘강가에서 말 달리던/조국을 찾겠노라 맹세하던’ 선구자의 북간도, 용정. 동주가 태어난 곳부터 연희전문 시절의 일제 강점기 경성, 일본 유학 시절 머물렀던 교토(京都)와 도쿄(東京)까지 그의 자취를 더듬었다. 일본 유학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야 했던 창씨개명의 아픈 마음을 담아낸 ‘참회록’, 릿쿄대 영문과의 짧은 한 학기 동안 써서 경성(京城)에 보냈던 시 다섯 편의 하나인 ‘쉽게 씌어진 詩’, 별 하나의 추억과 사랑과 쓸쓸함과 동경과 詩와 어머니를 읊은 ‘별헤는 밤’의 동주 육필을 한참이나 들여다보며 작업했다. 하나하나 작업을 마무리할 때 ‘탄식’과 ‘놀라움’이 함께 했다. 더딘 작업에 날개를 달아준 ‘신의 손’ 전민수 작가, 중요한 전시를 코앞에 두고 있음에도 ‘찰떡같은’ 작업으로 ‘동주 작업’을 빛나게 해 준 유용선 작가의 손과 머리와 가슴이 매우 ‘유용’했다. 시인, 윤동주 열사에게 진 이번의 ‘전시 빚’은 내 삶 앞날에 두고두고 갚아나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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