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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 같았던 `세계경영`…재계 2위 올랐지만 외환위기 덮쳐 몰락
기사입력 2019-12-10 2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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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우중 1936~2019 ◆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왼쪽 넷째)이 1992년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왼쪽 다섯째)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 제공 = 대우세계경영연구회]

대우그룹은 한국 경제 압축 성장기의 한복판에 있었던, '한강의 기적'을 상징하는 기업이다.

33㎡(약 10평) 남짓한 사무실에서 직원이 5명에 불과한 사업체로 출발했지만 1970년대 수출로 비약적인 성장을 이뤘다.

이후 정부 주도의 중화학공업 육성 정책에 적극 호응하며 단기간에 재계 서열 2위까지 올랐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고(故) 김우중 전 회장 철학에 따라 세계 경영에 나서 동유럽과 신흥 시장을 적극 개척했지만, 1997년 IMF 외환위기 충격을 극복하지 못하고 몰락했다.


대우그룹의 시작은 김 전 회장이 만 30세가 되던 1967년 자본금 500만원을 들고 설립한 대우실업이다.

대우실업은 셔츠, 내의류 등을 동남아시아에 판매하며 규모를 키웠다.


1969년 한국 기업 최초로 호주 시드니에 해외 지사를 설립한 데 이어 창립 5년 만인 1972년 국내 2위 수출기업으로 성장했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1998년 미국을 방문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당시 트럼프 주식회사 회장)과 악수하고 있다.

[사진 제공 = 대우세계경영연구회]

김 전 회장은 1973년 대우건설 전신인 대우개발을 설립했으며 1974년에는 대우전자를 출범시켰다.

1976년 한국기계(대우중공업), 1978년에는 새한자동차(대우자동차), 대한조선공사(대우조선해양) 등 부실 기업을 잇달아 인수한 뒤 단기간에 경영 정상화를 이뤄내며 한국 중화학 산업화를 선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대우는 1990년대 들어 '세계 경영'을 기치로 내걸고 해외 시장 공략에 집중했다.

1995년 세계 굴지의 자동차기업 제너럴모터스(GM)와 경쟁해 폴란드 국영 자동차 기업 FSO를 인수한 것은 대우그룹의 세계 경영을 상징하는 일화로 꼽힌다.

FSO 인수전에는 GM을 비롯해 유럽의 내로라하는 자동차회사들이 모두 덤벼들었다.

당시 대우는 '부분인수'와 '구조조정'을 인수 조건으로 내건 다른 회사들과 달리 공장과 종업원 전체를 인수하겠다고 나서 인수에 성공했다.

당시 FSO 경영진은 "대우만이 우리 요구를 받아들였다"고 밝히기도 했다.

루마니아와 체코에 이어 FSO까지 인수하면서 대우는 동유럽에서 최대 58만여 대의 생산능력을 갖게 됐고, 이러한 공격적 경영은 유럽 자동차 업계에서 주목 대상이 됐다.

현재도 우즈베키스탄 등 동구권 일부에선 파산한 지 20년이 지난 '대우' 브랜드의 영향이 아직 남아 있을 정도다.


이 같은 세계 경영으로 철저히 현지화를 추구하면서 대우그룹은 1998년 41개 계열사와 400여 개 해외 법인을 확보했다.

직원 규모도 국내 10만명, 해외 25만명에 달했다.


대우그룹의 양적 팽창은 멈출 줄 모르고 계속됐다.

1997년 말 발생한 외환위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매물로 나온 쌍용자동차를 인수했다.

그 결과 대우는 1998년 삼성을 제치고 재계 서열 2위까지 뛰어오른다.


10일 오후 경기도 수원시 아주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빈소에서 조문객들이 조문하고 있다.

[사진 = 연합뉴스]

하지만 이것이 마지막 불꽃이었다.

거침없이 몸집을 불리던 대우그룹은 순식간에 허망한 결말을 맞았다.

외형 확대에 치중하느라 다른 그룹에 비해 구조조정이 늦었던 것이 결정적 패착이었다.


김 전 회장은 구조조정에 부정적이었다.

구제금융 신청 이후 유행처럼 번졌던 대규모 정리해고와 인력 구조조정에 대해 "직원이 잘리는 것이 무서워 열심히 일하도록 만드는 것은 비인간적인 일이다.

경영자는 고용을 줄이지 않고 위기를 극복하는 법을 연구해야 한다"고 강조했으며 "사람을 잘라서 이익을 내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일갈하기도 했다.

이 같은 맥락에서 "구조조정보다는 수출 확대로 외환외기를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대우그룹은 국가신용등급 추락 여파로 해외 채권자들의 상환 압력이 거세지고 해외 자산가치가 추락하면서 유동성 위기에 빠졌다.

1997년 말 한국에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금리가 연 30% 수준으로 뛰어오르자 대우그룹의 이자 부담은 눈덩이처럼 커졌다.

외환위기와 함께 국내 대기업의 연쇄 부도가 이어지고 금융권이 대출금 회수를 서두르면서 대우그룹은 경영난이 급속도로 악화됐다.


결국 대우의 부채 60조원이 금융권 부실로 남으면서 금융권 구조조정, 협력업체의 연쇄 도산을 일으켰다.

이를 수습하기 위해 공적 자금 30조원이 투입되기도 했다.

김 전 회장 사표가 1999년 11월 23일 이사회에서 정식 수리되며 '김우중 신화'는 32년 만에 막을 내렸다.


[노현 기자 / 원호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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