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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능에서 불가피로…글로벌 경영의 新文法 'RE100' [Big Picture]
기사입력 2021-03-04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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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5월 SK하이닉스는 단 한 줄짜리 외신에 뜨끔했다.

대부분 언론은 보도조차 하지 않았던 뉴스였다.

대만의 반도체 회사인 TSMC가 미국 애리조나주에 공장을 짓겠다는 발표. 대만 반도체의 아버지인 모리스 창이 세운 국가적 자존심이자 세계 최대 파운드리 회사인 TSMC가 15조원 규모의 반도체 공장을 짓는데 그 장소를 미국으로 선택한 데 대한 의미를 SK는 꿰뚫고 있었다.


배후엔 애플이 있었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 때 환경청장을 지낸 리사 잭슨을 부사장으로 영입한 애플은 기업 경영에 환경 코드를 입히기 시작한다.

그리고 우리에겐 용어조차 생소했던 2016년 RE100(용어설명·오른쪽 그래픽 참고)에 가입했다.

애플에 반도체를 팔아야 하는 TSMC엔 무언의 압박이었다.

재생에너지를 사용하지 않으면 협력관계를 끊을 수 있다는 위협으로 다가온 것이다.

애플은 이미 글로벌 협력업체들에 재생에너지 사용 동참을 요청해왔다.

아이폰 껍데기인 알루미늄 제재를 공급하는 대만의 캐처테크놀로지가 2018년 말 100% 재생에너지 사용을 달성했고 아이폰에 안테나 부품을 공급하는 솔베이가 그 뒤를 이었다.


TSMC의 미국 공장 건설은 이런 차원에서 결정됐다.

대만에서 도저히 재생에너지 100%를 달성하기 어려우니 재생에너지 공급이 원활한 미국으로 옮겨, 거기서 RE100을 맞추겠다는 복안이었다.

이 뉴스가 SK하이닉스에 충격으로 다가온 것이다.

하이닉스 매출의 10%는 애플에서 온다.

자칫 애플의 공급망에서 탈락되는 날엔 기업의 운명이 바뀔 수 있다는 절박감이 있었다.


5개월 뒤 최태원 SK 회장은 제주도 디아넥스호텔에서 계열사 최고경영자(CEO)들을 한자리에 불러 "환경 문제를 기회라고 생각하면 우리가 주도권을 잡을 수 있다"며 역발상을 주문했다.

대기업으로서는 처음으로 SK 산하 7개 계열사가 RE100 캠페인에 동참한 건 이런 맥락에서다.

SK그룹에서 사회적가치(Social Value)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는 이형희 사장은 "비용을 생각하면 절대 못 한다.

안 할 이유를 찾으면 100개는 된다.

그러나 당위성을 생각하면 가야만 하는 길"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해변은 좋은데 파도가 무섭다면 둘 중 하나다.

해변을 떠나든지, 아니면 파도타기를 배우든지"라면서 "이왕 할 거면 빨리 해 그 과정에서 문제점이 드러나면 그걸 수습하는 길을 택했다"고 말한다.


애플 같은 제조업체만이 아니다.

스타벅스도 RE100 멤버다.

스타벅스는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에 풋볼경기장 285개 규모의 태양광 농장을 만들어 직접 전력을 생산키로 했으며 미국과 캐나다에 소재한 점포는 태양광·풍력 에너지를 구입해 가동한다.

그러면서 커피 공급자들에게는 용수를 재활용하고, 우유를 공급하는 농가에는 메탄가스를 줄일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달라고 요청했다.


글로벌 유통업체인 월마트도 그렇다.

2017년부터 '기가톤 프로젝트'를 시행하고 있다.

2030년까지 무려 10억t의 이산화탄소를 감축하는 게 목표인데 월마트가 무슨 전력을 그리 많이 쓴다고 이런 무지막지한 감축 계획을 내놓았겠는가. 납품 협력업체 모두의 탄소 절감을 합쳐 그렇게 하겠다는 것이다.

당연히 월마트에 물건을 대는 업체들에 불똥이 튄다.


RE100이 몰고 올 파장을 가늠하기 힘들다.

그건 세계 굴지 반도체 회사의 공장을 미국으로 옮기게 한 무기가 됐으며 신재생에너지 산업의 폭발을 가져올 계기가 됐다.

이래저래 이들 기업과 공급망으로 엮인 납품 기업들은 자칫 감당하기 힘든 비용 부담을 떠안게 됐다.


2019년 6월 28일 폴란드 브로츠와프에 소재한 LG화학(현 LG에너지솔루션) 배터리 공장은 폭스바겐그룹의 이사회 멤버이자 최고구매책임자(CPO)인 슈테판 조머로부터 한 통의 메일을 받는다.

메일의 핵심 역시 재생에너지를 사용한 경우에만 부품을 공급할 수 있다는 것. LG화학은 관련 자료를 제출해야 하며 이를 제3의 기관을 통해 검증하겠다고 했다.

만약 허위가 있으면 수주에서 탈락시키겠다는 경고였다.

조머 CPO는 그러면서 점잖게 한마디 했다.

"우리는 지속가능한 공급망이 기업의 장기적인 성공을 보장한다고 확신한다"고.
신학철 LG화학 부회장이 작년 7월 업계에서는 최초로 탄소 중립을 선언한 배경의 하나였다.

2050년까지 탄소배출량을 2019년 수준에서 유지하겠다는 것. 단순히 문재인정부의 친환경 정책에 부응하자는 차원은 아니었다.

LG화학 역시 글로벌 트렌드에 기업 경영을 맞추고 이 물결을 타지 않으면 기업의 지속가능 성장이 담보될 수 없다는 차원에서였다.

2050년까지 탄소중립을 한다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LG화학의 현재 탄소배출량은 약 1000만t. 2050년이면 어림잡아 이 수준의 4배인 4000만t이 된다.

이걸 1000만t으로 줄이려면 3000만t의 탄소 배출을 삭감하는 담대한 계획이 뒤따라야 한다.

화석연료 차량 1250만대를 없애야 하는 분량이며 소나무 2억2000만그루를 심어야 상쇄할 수 있는 분량이다.


글로벌 기업인 3M에 재직 시 지속가능경영을 담당했던 신 부회장은 세 가지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첫째, 탄소중립 이슈는 최고경영자가 지휘해야 한다.

조직원에게 맡겨 놓을 일이 아니다.

둘째, 그것도 우선순위에 놓아야 한다.

후순위로 밀려나는 순간, 실천은 좌절된다.

셋째, 조직에 이익을 가져온다는 확신을 심어줘야 한다.

유행과 패션으로 할 일이 아니다.

손에 잡히는 성과물을 내놓아야 한다.


기본적으로 화학회사에서 탄소 줄이기는 하늘의 별 따기다.

그런데 LG화학은 과감하게 도전장을 냈다.

나름 배경이 있다.

현재 LG화학의 매출 구성을 보면 석유화학 비중이 50%를 넘는다.

배터리 등 에너지는 28%. 이 비중이 5년 후면 180도 역전된다.

LG화학 입장에선 RE100 달성에 기회가 온 것이다.


그리고는 중국 사업장부터 시동을 걸었다.

작년 12월에는 중국 우시에 위치한 양극재 공장에서 RE100을 선언했다.

양극재는 리튬이온 배터리를 만드는 4개의 중요한 소재 중 하나. 나머지 셋은 음극재, 전해질, 분리막이다.

중국에선 우리나라와 달리 전력의 직접 구매가 가능하다.

LG화학 우시 공장은 태양광, 풍력 전력판매사인 '윤풍신에너지'로부터 연간 140GWh 규모의 재생에너지를 공급받는 계약을 체결했다.

이 양극재의 중간재로 사용되는 게 전구체다.

전구체는 니켈, 코발트, 망간 등 3가지 원료를 배합해 생성한다.

이 원료의 영문 이니셜을 따서 NCM이라고 한다.

여기에 리튬을 추가하면 그게 양극재다.

LG화학은 2018년 중국의 화유코발트란 회사와 합작으로 전구체 공장을 저장성 취저우에 세웠다.

올해는 취저우 공장도 RE100을 위한 전력 구매 계약을 맺을 예정이다.


한국 RE100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는 진우삼 가천대 교수는 RE100을 '글로벌 기업들의 새로운 경영문법'이라고 단정한다.

한국RE100위원회는 더 클라이메이트 그룹의 한국 파트너. 국내 기업들의 RE100 가입 창구 역할을 하는 그는 "지금은 300개 조금 안 되는 기업이 자발적으로 RE100에 가입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많은 기업이 동참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며 "여기서 제외되면 1부 리그에서 탈락한 것 같은 소외감을 느낄지 모른다"고 말한다.


MB시절 청와대 녹색성장기획관으로 있었던 김상협 제주연구원장은 "RE100은 삼성전자나 SK 같은 국내 대기업들에 녹색공급망 압력으로 작용할 것"이라며 "RE100은 깨끗한 에너지를 사용하자는 단순한 환경운동을 넘어 세계 무역 질서를 뒤흔들 수 있는 뇌관이 된다"고 말한다.

한발 더 나아가 그는 "테슬라의 기가 팩토리와 태양광 충전 인프라 구축에서 보듯 테슬라는 스스로를 녹색에너지와 모빌리티 회사로 규정하고 있다"며 "그런 점에서 글로벌 녹색 압력은 업의 본질까지 바꾸고 있다"고 강조한다.


느닷없이 찾아온 RE100은 재생에너지에 드라이브를 거는 문재인정부로선 축복이다.

민간기업들이 알아서 재생에너지를 쓰겠다고 나서니 태양광이나 풍력 발전을 늘릴 명분이 생겼다.

더더욱 글로벌 경영의 대세로 잡아가는 분위기니 추동력도 얻었다.

게다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밀어붙이는 어젠다이기도 하다.

그는 이른바 녹색 내각까지 꾸리고 존 케리 전 국무장관을 기후특사에 임명했다.

정책을 준비하는 정부로서도 신난 구석이 있다.

성윤모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정부가 작년 9월 그린뉴딜 정책 간담회를 통해 RE100 지원 방안을 발표한 데 이어 2021년 신년 들어서자마자 이에 대한 제도적 정비 방안을 구체화한 것도 이런 글로벌 추세에 따른 것이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곳곳에 암초가 있다.

대략 세 가지. 가장 핵심적인 건 가격. 재생에너지 비용이 크면 그만큼 기업에 부담이 된다.

소위 '녹색 프리미엄'이다.

대부분 경영자는 "똑같은 전기를 굳이 비싼 돈 내고 쓸 필요 있느냐"며 "적자가 나면 누가 책임질 거냐"고 반문한다.

그러나 제법 진전이 있다.

진우삼 위원장은 "전 세계적으로 RE100을 시작할 때인 2014년만 해도 재생에너지로 전환하는 데 많은 비용이 들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에너지 비용을 절감하는 경우도 많다"며 "글로벌 차원에서 보면 재생에너지는 이미 에너지원의 주류로 자리매김하고 있다"고 말한다.

물론 기술 발전에 따라 발전 단가가 꾸준히 낮아지고 기존의 석탄 발전은 비용이 높아진다는 전제가 따른다.

이 시간을 얼마나 단축하느냐가 숙제다.

이형희 사장은 "최근 녹색요금제 전력 입찰에서 보듯이 10%의 전기요금 인상이 기본"이라며 "기업은 물론 정부도 고민해야 할 지점"이라고 말한다.


가격 못지않게 중요한 건 물량이다.

우리나라가 충분한 재생에너지를 공급할 기반을 갖춰놓았느냐는 점이다.

만약 우리나라에서 재생에너지를 구하지 못하면 대만의 TSMC처럼 공장을 미국이나 유럽으로 옮길 수도 있다.

9차 전력수급계획(2020~2034년)에 따르면 발전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 현재 신재생에너지 비중은 7.5%(2020년 기준)이나 2030년엔 이 비중이 20.8%로 높아진다.

소위 3020 전략이다.

대신 원전이 0.9%포인트, 석탄이 10.5%포인트 준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게 정부의 시각이다.


세 번째는 전력공급 시스템이다.

작년 12월 더 클라이메이트 그룹이 261개 글로벌 기업을 상대로 한 설문 조사 결과 우리나라는 기업이 신재생에너지를 사용하기에 가장 어려운 국가 중 하나다.

기업들이 전력을 직접 구매할 수가 없다.

한전이란 일종의 도매상을 거쳐야 한다.

이번에 정부가 소위 제3자 전력구매계약(PPA·Power Purchase Agreement)제도를 도입한 이유다.

주영준 산업부 에너지 자원실장은 "그래도 충분하지 않다는 업계의 지적에 따라 직접 구매계약이 가능토록 법을 고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는 탄소중립 프로젝트는 불가능한 어젠다에서 이제 불가피한 어젠다로 바뀌고 있다.

그 거대한 폭풍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에 RE100이란 글로벌 경영문법이 끼어들었다.

우리나라 에너지 산업의 지각 변동을 일으키는 동시에 무역에 의존하는 대다수 한국 기업들에 새로운 도전임이 분명하다.

전력 정책을 책임져야 하는 정부도 마찬가지다.


■ <용어 설명>
RE(Renewable Energy)100 : 포천 선정 1000대 기업 등 세계적으로 영향력 있는 기업들이 2050년까지 재생에너지로 생산된 전력을 100% 사용하겠다는 자발적 선언. 국제적인 비영리 환경단체 '더 클라이미트 그룹(The Climate Group)'이 2014년 뉴욕 기후주간에서 처음 발족했다.

이 캠페인에 동참하면 영국 탄소공개프로젝트위원회에 등록해 연도별 이행 계획을 제출하며 이를 점검받을 의무가 부여된다.

현재 300여 개 기업이 참여했으며 우리나라는 SK 계열사 7곳이 동참했다.


신재생에너지 : 신에너지와 재생에너지를 합친 말. 신에너지 및 재생에너지 개발·이용·보급 촉진법에 규정돼 있다.

신에너지는 수소가 대표적이며, 재생에너지에는 태양광, 수력, 풍력, 지열, 바이오, 폐기물 에너지 등이 포함된다.

국제적으로는 재생에너지만 지속가능한 에너지로 분류하므로 신에너지는 RE100에서 인정되지 않는다.


손현덕 주필
[손현덕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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