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을 마실 때 어떤 잔을 선택하는지는 중요한 요소다.
어떤 잔에 담겨있는지에 따라 와인이 가진 본연의 캐릭터가 잘 살아나기도 하고 죽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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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방문해 와인 행사를 진행하고 있는 맥시밀리언 리델. 와인 잔으로 유명한
리델의 CEO이자 리델 가문의 11대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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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저는 와인을 마실 때 잔의 역할에 대해 과소평가하고 있었습니다.
음식점에서 적절한 와인 잔이 없을 경우는 소맥 잔에 마시기도 하고 물잔에 마시기도 했습니다.
샴페인 잔이 없는 경우에는 주로 화이트와인 잔에 마시고요.
적어도 맥시밀리언 리델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랬습니다.
맥시밀리언 리델은 명품 와인 잔으로 유명한 리델의 CEO이자 리델 가문의 11대손입니다.
얼마 전 한국을 방문해 소비뇽 블랑, 샤르도네,
피노 누아, 카베르네 소비뇽 등 각각의 포도품종에 따라 다양한 종류의 와인 잔에 마시며 비교 체험해보는 와인 글라스 익스피리언스(와인 잔 체험 행사)를 진행했습니다.
행사에는 네 가지 종류의 잔이 등장했습니다.
1번 잔은 가장 작은 잔으로 소비뇽 블랑 잔입니다.
샴페인 잔으로도 사용이 가능합니다.
2번 잔은 화이트와인 품종인 샤르도 네 잔입니다.
3번 잔은 포도껍질이 얇은
피노 누아나 네
비올로 품종을 위한 잔입니다.
블랑 드누아 샴페인 잔으로도 어울린다고 합니다.
4번 잔은 가장 인기가 높은 보르도 블렌딩 와인 잔입니다.
카베르네 소비뇽, 메를로가 여기에 속합니다.
리델의 와인 잔이 어떤 포도품종을 위한 것인지 외울 필요는 없습니다.
잔의 베이스(받침)에 포도품 종이 적혀있습니다.
와인 잔에 따라 맛과 향이 가장 극적인 차이를 보인 포도품 종은 소비뇽 블랑이었습니다.
리델은 참관객을 향해 “스월링을 하고 향을 맡아보라. 와인 잔 깊숙이 코를 넣고, 요가라고 생각하며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면서 와인의 깊이와 구조감을 느껴보라”라고 주문했습니다.
1번 잔에선 소비뇽 블랑 특유의 자몽 향이 한가득 퍼졌습니다.
반면 같은 와인이지만 2번 잔에선 향의 집중도가 떨어졌습니다.
아무래도 와인 잔의 입구가 넓기 때문입니다.
1번 잔과 2번 잔을 번갈아 향을 맡고 맛도 보았습니다.
같은 와인일까 싶은 정도로 향도, 맛도 모두 달랐습니다.
1번 잔에 마셨을 때 구조감이 더 좋고 짭조름한 미네랄 풍미가 더 강하게 느껴졌습니다.
2번 잔에 마시니 쌉쌀함이 더 강조 됐습니다.
와인의 질감이 다르게 다가왔습니다.
1번 잔보다 더 실키하고 크리미했습니다.
리델이 “1번 잔과 2번 잔에서 마시다 남은 와인을 플라스틱 잔에 따른 뒤 플라스틱 잔에 담긴 와인의 향을 맡아보라”라고 주문했습니다.
“와우!” 여기저기서 탄성이 쏟아졌습니다.
신기하게도 플라스틱 잔에선 아무런 향이 나지 않았습니다.
무슨 마술과도 같은 경험이었습니다.
반면에 와인을 비운 1번 유리잔에는 와인이 없어도 향이 풍성하게 남아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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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품종에 따라 다른 와인 잔. 왼쪽부터 소비뇽 블랑, 샤르도네,
피노 누아, 카베르네 소비뇽·메를로(보르도 블렌딩) 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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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의 알코올 도수에 따라 잔도 달라져야
리델의 마술은 계속됐습니다.
이번엔 샤르도네 와인입니다.
샤르도네를 1번 소비뇽 블랑 잔에 따라 마셨습니다.
리델은 “샤르도네가 소비뇽 블랑 잔에 갇혀버렸다”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는 “산도가 튀고 미네랄도 느낄 수 없다.
이 와인은 마시지 말고 뱉어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마찬가지로
피노 누아를 4번 카베르네 소비뇽 잔에 따라 마셨더니
피노 누아의 캐릭터를 잃어버렸습니다.
3번
피노 누아 잔에선 아름다운 향과 함께 파워풀한 구조감이 살아 났습니다.
리델은 “
피노 누아를 3번
피노 누아 잔에 마시면 혀끝에서 느껴지는 느낌이 프렌치 키스와 같다”라고 말했습니다.
로맨틱한 것 같기도 하고 어쩌면 에로틱한 것 같기도 합니다.
반면 4번 잔에선 “밸런스가 깨졌다.
위스키를 마시는 것 같다”라고 표현했습니다.
카베르네 소비뇽 와인을 가장 작은 잔인 1번 잔에 마시자 알코올 향이 너무 튀었습니다.
여기에 와인 잔이 점점 커지는 이유가 숨어있습니다.
리델은 “과거에는 숙성잠재력이 긴 와인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오랜 시간을 버틸 수 있는 와인이 고급 와인이라는 평가를 받았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이어 “요즘에는 바로 마실 수 있는 와인을 만드는 추세다.
그러려면 알코올 도수가 높아져야 한다.
알코올은 소고기의 지방과 같다.
맛을 강하게 한다.
와인의 알코올 도수가 높아지면 잔도 달라져야 한다.
와인 자체의 파워풀함을 담아 내기 위해 잔이 커져야 한다는 뜻이다”라고 덧붙였습니다.
리델은 “지금은 아주 얇고 가벼운 잔이 유행”이라고 말했습니다.
모던한 와인에는 모던한 와인 잔이 어울린다는 의미입니다.
어떤 조직에서 일하는지에 따라 그 사람의 역량이 달라집니다.
자신의 그릇에 맞는 조직이면 개인의 역량이 제대로 발현됩니다.
와인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어떤 잔에 담겨있는지에 따라 와인이 가지고 있는 본연의 캐릭터가 잘 살아나기도 하고 죽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잔에 담겨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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