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대선 좌우하는 ‘체감경기’...연준 ‘빅컷’에 숨은 정치 효과 [★★글로벌]

미 대선 향방 가르는 경제 심판론
견조한 물가·고용 데이터 많지만
유권자들은 미국 경제 확신 약해

예측정확도 높은 ‘고통 지수’ 기준
트럼프보다 해리스 당선 가능성↑
연준 빅컷, 체감경기 강화 효과 커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It’s the economy, stupid)”
지난 1992년 대선에서 빌 클린턴 후보가 현직 조지 H.W. 부시 대통령을 상대로 공격했던 이 문구는 매 대선 국면에서 경제의 중요성을 환기시켰다.


올해 대선이 40일밖에 남지 않은 가운데 ‘해리스 vs 트럼프’ 중 누가 승리할지 여부를 두고 역시나 유권자들의 경제 심판론이 작동할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요즘 상황이 묘하다.

최근 미국 중앙은행인 연준은 미국 경제가 안정적인 인플레이션 관리 국면에 들어갔다고 자평하며 고용 시장을 떠받치기 위해 전격적인 금리 인하를 단행했다.


시장 예상을 깬 0.5%포인트 과감한 ‘빅컷’이었다.


고용과 소비자물가 등 하드(숫자로 표출되는) 데이터는 미국 경제의 건강한 흐름을 가리키고 있음에도 연준은 “경제는 괜찮지만”이라며 공격적인 금리인하를 단행했다.

그것도 미국 대선을 코앞에 두고서 말이다.


또 하드 데이터가 양호한 가운데 설문조사 방식으로 시장 심리를 읽는 소프트 데이터에서 최근 이변이 발생했다.

소비자들의 미래 경기 자신감을 나타내는 대표 지표인 ‘소비자 신뢰지수’ 9월 수치가 기준선 아래로 미끌어졌다.


기준선 밑이라는 건 경제 상황이 나쁘다고 보는 소비자들이 낙관하는 이보다 많다는 뜻이다.

하드 데이터는 양호한데 소프트 데이터에서는 체감 경기가 위험하다는 신호가 나온 것이다.


그렇다면 세 가지 질문이 연속으로 떠오른다.


1. 하드 데이터 상 미국 경제는 양호한데 심리 지표를 나타내는 소프트 데이터는 왜 다를까(=왜 유권자들은 미국 경제가 좋다고 쉽게 확신을 하지 못 하는 것일까).
2. 데이터와 유권자 심리에서 발생하는 괴리는 무엇 때문일까.
3. 이번 연준의 빅컷은 체감 이 괴리를 줄이는 데 어떤 영향을 미칠까(=유권자 심리를 개선하는 정치적 효과가 있을까)
라는 물음이다.

과연 경제 지표와 유권자 심리의 격차, 그리고 연준의 과감한 빅컷은 어떤 연관성을 가지는 것인지 석학들의 눈으로 들여다본다.


실업률+물가=고통 지수, 체감 경기와 판세 분석 정확도 높아
과거부터 미국 대선 판세를 예측하는 가장 유용한 경제 지표는 ‘고통 지수(misery index)’다.


선거 전 이 데이터의 상하향 움직임 여부가 유권자들의 ‘경제 심판론 ’과 잘 맞아 떨어진다는 평가다.


고통 지수는 1970년대 미국 경제학자 아서 오쿤이 실업률과 소비자물가지수(CPI)를 더해 만든 공식으로, 1976년 대선에서 고통 지수는 13을 넘어서는 상황이었다.

당시 민주당 대선 후보인 지미 카터는 재선에 도전한 현직 제럴드 포드 대통령의 경제 실패를 집요하게 파고들었고 승리를 거뒀다.


실업률과 소비자물가지수를 더해 산출하는 체감경기 지표인 ‘고통지수’ 흐름. 대선을 앞두고 기준점인 7.3 구간 밑까지 떨어지며 미국 경제에 대한 고통 수준이 완화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자료=스트래티거스>

역으로 1980년 대선에서는 로널드 레이건 공화당 후보가 현직인 카터 대통령을 상대로 고통 지수를 언급하며 경제 실정론을 펼쳤고, 당시 고통지수는 21을 넘어섰다.


카터 대통령은 이 선거에서 레이건 후보에게 패배했다.


이번 대선을 앞두고 리서치 회사인 스트래티거스는 10월에 고통 지수가 7.35보다 낮게 형성돼야 해리스의 선거 승리가 유력해진다고 예상한다.


스트래티거스는 1980년 이후 모든 대선을 포함해 과거 16번의 대선에서 15번을 정확히 예측했다고 평가하며 고통 지수가 이번 대선에서도 상당한 정확도를 보일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좋은 일자리’보다는 ‘나쁜 인플레’ 더 강하게 기억하는 유권자
시민들의 체감 경기를 보여주는 미국 소비자 신뢰지수 흐름과 대선 결과
경제학자인 레이 페어 예일대 교수는 지난 수 십년 간 경제가 미국 대선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연구한 인물로, 이번 대선 판세의 요체로 고통 지수 산식에도 들어가는 CPI 물가 지표를 꼽는다.


그는 국내총생산(GDP)과 CPI 등 하드 데이터를 사용해 투표 결과를 예측해왔는데 지난 7월 말 해리스 부통령으로 민주당 대선 후보가 교체되기 전까지 예측 업데이트에서 당선 가능성을 50대 50 동률로 봤다.


바이든 정부에서 물가와 고용 등 경제성장이 나름 견조함에도 불구하고 레이 페어 교수는 자신의 예측 모델이 ‘박빙’으로 나타나는 이유에 대해 유권자들이 물가에 대한 ‘기억’의 중요성을 설명한다.


유권자들이 대체로 물가 상승을 오래 기억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어 최근의 개선된 물가 수치보다 바이든 정부 기간에 상승했던 더 나쁜 수치를 강하게 기억해 미국 경제가 안 좋다고 인식한다는 것이다.


글로벌 자산운용사 프랭클린 템플턴이 운용하는 경제연구소는 더 적극적으로 행동경제학을 끌어들여 경제 심판론이 어떤 식으로 작동할지 예상한다.


이곳 스티븐 도비 소장은 바이든 정부 집권 후반기에서 견조한 미국 경제 상황을 평가하면서도 유권자들이 데이터보다 나쁘게 미국 경제 상황을 인식하는 현상에 대해 ▲손실회피 성향(얻은 것의 가치보다 잃은 것의 가치를 더 크게 인식하는 것) ▲공정성 심리가 작동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데이터로 나타나는 미국 실업률은 여전히 안정적인 일자리 수준을 확인시키고 있지만 유권자들은 일자리보다 물가를 자신의 불행을 따지는 더 중요한 척도로 여긴다고 그는 설명한다.


특히 유권자들이 가격의 ‘변화’보다는 가격의 ‘수준’에 더 관심을 갖게 돼 현실 지표와 괴리를 키운다고 소개한다.


일례로 식료품이나 휘발유처럼 소비자 구매가 빈번한 상품들은 현재 물가가 2년 전 최악의 상승점 대비 현저히 빠르게 내려왔다.


그러나 소비자 인식에서 재빠른 인플레 하강 속도는 중요치 않다.


이보다는 해당 물품을 구매하는 현 시점에서 ‘어, 아직도 가격이 2년 전보다 많이 비싸네’라는 이른바 현타가 오게 되고, 이는 미국 경제에 대한 심리적 체감도를 악화시키는 요소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지난 총선의 향배를 가른 것으로 평가 받는 ‘대파 가격’ 논쟁부터, 트럼프가 미국민이 사랑하는 식료품인 베이컨 가격이 4~5배 뛰었다며 인상폭을 과장했던 것도 바로 이런 손실회피 성향과 무관치 않다.


지난 4월 총선을 앞두고 윤석열 대통령이 서울 양재동 하나로마트를 찾아 대파를 들여다보고 있다.

이 방문 행사 뒤 ‘875원 대파값’ 논란이 본격화했다.

<사진=대통령실>

데이터와 유권자 심리에서 나타나는 괴리를 설명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키워드는 바로 ‘공정성’에 대한 인식이다.


예컨대 지표 상 미국민 소득 하위 5분위 계층의 실질 임금은 2013년 이후 꾸준히 상승했고, 특히 2022년에 큰 폭으로 올랐다.


그러나 하위 5분위 계층은 상위 10%와 상위 1% 구간에서 소득과 자산 증가폭이 더 높다는 현실에서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며 미국 경제가 잘못됐음을 인식한다는 설명이다.


래리 서머스, “물가 계산서 주담대 이자율 빠진 탓에 체감경기 반영 못해”
그런데 행동경제학으로 파악하는 이 같은 설명을 뛰어넘어 경제 지표와 유권자 심리 간 괴리 현상을 보다 강력한 논리로 분석하는 연구 결과가 최근 나와 눈길을 끈다.


이 연구를 주도한 인물은 저명한 경제학자인 래리 서머스 하버드대 교수다.


래리 서머스 하버드대 교수
클린턴 행정부에서 재무장관을 지내고 오바마 행정부에서 백악관 국가경제위원장을 역임한 이 석학은 국제통화기금(IMF) 소속 학자들과 공동 연구를 통해 경제 데이터와 소비자 심리 간 괴리 현상이 발생하는 이유로 “인플레이션 계산에서 돈의 차입 비용인 이자율을 제외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놀랍게도 1970년대 아서 오쿤이 고통 지수를 만들었을 당시 산식에 들어가는 소비자물가지수에는 주택 담보대출 금리와 자동차 할부 금리가 포함됐다.


그런데 1983년(주택 담보대출)과 1998년(자동차 할부)에 미국 노동통계국이 관련 이자율 산정을 제외하면서 수치로 나타나는 인플레와 소비자 체감 수준이 동떨어지고 있다는 비판이다.


CPI 데이터를 생산하는 미국 고용통계국은 주택 담보대출 이자율과 자동차 할부 이자율을 포함하는 산식 때문에 인플레 수치가 과장된다며 이를 제외했던 것이다.


그런데 코로나19 팬데믹과 우크라이나 전쟁 등에 따른 공급망 이슈가 맞물려 2022년 40여년만에 최악의 인플레가 몰아쳤고 이를 진압하기 위해 연준은 초강력 금리 인상을 단행했다.


언론에서 ‘자이언트 스텝’이라고 지칭하는 0.75%포인트 공격적 금리 인상이 네 차례 연속 단행될 정도였다.


1980년대 이래 최악의 인플레와 고금리 환경이 소비자를 덮쳤고, 아직까지 고금리에 신음하는 이들이 많은 상황에서 미국 정부가 유통하는 하드 데이터로는 도저히 이 같은 괴리 심리를 알아챌 수 없다는 것이다.


서머스 교수와 동료 연구자들은 돈의 차입 비용인 이자율이 고통 지수 산식에 포함됐던 1983년 이전의 공식으로 고통 지수를 만들어야 지금의 냉소적인 소비자 심리를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연준의 빅컷, 유권자 ‘체감경기’ 높이는 정치적 효과 부인 못해
종합하면 역대 미국 대선에서 유권자들의 경제 심판론은 승리를 가르는 요소로 강력하게 작동해왔고, 특히 ‘고통 지수’가 대선 결과와 잘 맞아떨어진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런데 2022년 하반기 혹독한 인플레와 고금리 시대가 시작되면서 서머스 교수 분석에 따르면 경제 데이터와 소비자 심리 간 괴리가 커졌고, 인플레 산식에서 차입 비용이 빠져있는 탓에 서민들이 체감하는 고통이 정부 데이터에 제대로 반영되지 않고 있다는 평가다.


그렇다면 가장 민감한 세 번째 질문(이번 연준의 빅컷 금리 인하는 순수한 경제적 결정일까, 아니면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을까)에 대한 답을 할 차례다.


연준의 빅컷은 어느 정도 정치적 계산이 반영된 결정으로 볼 수밖에 없다.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은 잘 고정된 미국의 인플레 심리를 앞세우며 0.5%포인트의 깜짝 빅컷 인하를 단행했다.


제롬 파월 미국 연방준비제도 의장
과감한 기준금리 인하 결정에 따라 기준금리의 직접 영향을 받는 홈 에퀴티 론(세컨드 모기지)을 비롯해 고정금리 기반의 모기지론 역시 최근 금리 하락 흐름에 가속도가 붙을 것으로 예상된다.

금리가 내릴 때 새로운 상품으로 대출을 갈아타는 재융자 사례가 늘어날 것이라는 전망이다.


빅컷이라는 금리인하 첫 걸음이 이처럼 경기 낙관에 소극적이었던 중도층에 영향을 미쳐 수만, 수십만의 긍정 표로 집결되면 펜실베이니아, 조지아 등 핵심 경합주에서 민주당 후보인 해리스에게 결정적 한방으로 작용할 수 있다.


4년 전 대선에서 조 바이든은 핵심 경합주인 조지아에서 불과 1만2200여표 차이로 트럼프를 눌렀다.

(올해 대선에서 선거 전략가들은 해리스가 반드시 펜실베이니아주를 얻어야 승리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연준이 이번 빅컷 행보에 정치적 동기를 부인한다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공격적 금리 인하는 유권자들이 실제 피부로 체감하는 경기 개선(=차입비용 완화) 효과를 키운다는 점에서 민주당과 해리스에 엄청난 선물을 안긴 것에 다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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