셧다운 공장을 AI 전초기지로...한몸으로 뛰는 日기업·정부의 무서움 [★★글로벌]

내년부터 첨단 AI 데이터센터로 탈바꿈할 예정인 오사카부 사카이시의 쇠락한 LCD 패널 생산공장 일대.
국내 매체에 거의 보도가 되지 않았지만 지난달 21일은 일본 디스플레이 산업에서 슬픈 이정표가 된 날입니다.

그런데 AI 시대에서 새 먹거리를 준비하는 기업들에 역설적으로 희망의 출발점이기도 합니다.


오사카부 ‘사카이 공장’에 대한 얘기입니다.


2007년 쿵 하는 굉음과 함께 사카이시에서 대규모 착공식이 열렸습니다.


세계 최초로 액정표시장치(LCD)를 개발한 기업 샤프가 첨단 공정으로 글로벌 리더십을 강화하기 위해 이곳에 세계 최대 규모의 LCD 패널 공장을 구축한 것입니다.


당시 TV를 만드는 전 세계 주요 가전 기업들이 샤프로부터 LCD 평면 패널을 공급받았죠.
그런데 착공 후 글로벌 금융위기가 닥쳤고 경기 침체가 확산하면서 패널 수요가 급감했습니다.

이는 가격이 저렴한 중국산 패널의 새로운 도약을 의미했습니다.


중국 제품이 세계 시장에 풀리면서 일본 패널 제품과 ‘치킨게임’이 가열됐고 사카이 신공장은 샤프에 순식간에 애물단지가 됐습니다.


이 공장의 터빈 소리가 사라진 지난달 놀랍게도 이곳은 일본의 AI 패권 도전을 상징하는 공간으로 변신이 시작됩니다.


아시아 최대를 목표로 2개의 초거대 AI 데이터센터가 들어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뒤에는 AI 패권을 잡으려는 일본 정부의 치밀한 지원이 있습니다.


대체 이곳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요.

‘모노즈쿠리’ 쇠락 아픔의 공간, 사카이 공장
2007년 하반기 샤프는 사카이시에 TV용 첨단 LCD 패널 공장을 짓기로 하고 여기에 수 조원의 대규모 투자를 단행합니다.


그러나 신공장 투자와 동시에 리먼브러더스 파산 사태로 글로벌 금융위기가 닥쳤고 급격한 수요 감소와 엔고 여파로 2009년 공장 가동과 동시에 위기를 맞습니다.

디스플레이 시장의 중심도 스마트폰 등 중소형 패널로 이동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공장 가동 이듬해인 2010년 8월 가동률을 20% 이상 낮추는 감산에 돌입한 뒤 2012년 상반기에는 전체 생산량의 절반을 감산합니다.


급기야 그해 샤프는 일본 가전기업 최초로 해외 동종업체를 최대주주로 지분을 매각하는 결정을 내립니다.

아이폰 제조사로 유명한 대만 폭스콘의 모회사인 홍하이에 지분 일부를 매각하고 자금 수혈에 나선 것입니다.


글로벌 금융위기 발발 수 년만에 닥친 샤프의 몰락을 당시 언론은 ‘모노즈쿠리 정신’ 위기로 조명했습니다.


혼신을 다한 최선의 제품으로 사회에 기여하겠다는 일본의 장인정신을 뜻하는 모노즈쿠리를 상징하는 대기업이 바로 샤프였기 때문입니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지기 전 일본 기업들은 장인의 자존심으로 역내 생산을 고집해왔습니다.


그런데 금융위기 발발 후 엔고가 만든 고통과 중국발 가격인하 압력 속에서 일본 내 생산만을 고집했던 기업들이 하나둘씩 원가 절감을 위해 중국과 다른 나라로 생산기지를 전환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샤프도 2010년 중국 내 패널 생산을 결정하면서 사카이 공장은 모노즈쿠리 정신의 쇠락을 상징하는 공간이 된 것이죠.

2016년 4월 일본 오사카에서 샤프와 대만 홍하이정밀공업이 인수합병 계약에 합의하는 장면. <사진=블룸버그>
그리고 2016년, 주력사업 경쟁력을 상실한 샤프는 7조2800억원에 대만 홍하이에 팔리게 됩니다.


이후 8년이 지나 홍하이는 생명력이 다한 사카이 공장 가동을 지난달 멈춘 것입니다.


쇠퇴한 공장을 첨단 데이터 센터로 전환···“전력 냉각 조건 다 갖췄다”
그런데 올해 상반기부터 사카이 공장을 둘러싼 새로운 뉴스가 터져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이 공장이 소프트뱅크와 일본 통신사인 KDDI가 짓는 2개의 아시아 최대 규모 AI 데이터센터로 바뀔 것이라는 전망이었습니다.


이와 함께 류양웨이 홍하이 회장이 샤프 회장을 겸직한다는 결정도 나왔습니다.

샤프의 AI 관련 사업을 키운다는 게 그의 겸직 배경입니다.

그만큼 사카이 공장의 변신이 홍하이에도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는 뜻입니다.


사카이 공장은 세계 최대 패널 공장이라는 수식어답게 자체 발전과 냉각 시설을 갖추고 있습니다.

전력 수요가 막대한 데이터센터에 반드시 필요한 기반시설로 이미 LCD 패널 공장 시절부터 자급자족 생태계가 갖춰진 것이죠.
사카이 공장 지대 남쪽으로는 10km 이내에 간사이전력(KEPCO)이 운영하는 대규모 화력발전소가 가동 중입니다.


데이터센터로 최적의 자급자족 조건을 갖춘 사카이 공장의 가치를 알아본 소프트뱅크는 2025년까지 이곳 시설 일부를 폭스콘으로부터 사들여 첨단 AI 데이터센터로 탈바꿈시킨다는 구상입니다.


사카이 LCD 공장 지대 내 소프트뱅크가 홍하이로부터 매입해 구축할 데이터센터 부지 규모(붉은선 테두리). <이미지=소프트뱅크>
올해 가을 착공에 들어가 내년 150MW 규모로 시작해 향후 400MW 규모로 확대될 것이라는 전망입니다.


이 여정에서 소프트뱅크는 9조원 이상을 투자할 것이라고 발표했습니다.


KDDI도 이와 유사한 첨단 AI 데이터센터 구축을 샤프와 손잡고 추진하고 있습니다.


AI 모델을 고도화하기 위해 이 데이터센터에는 엔비디아 최신 서버랙(GB200 NVL72)이 적용될 예정입니다.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 보도에 따르면 이 데이터센터에는 최대 1000대의 서버가 호스팅될 예정으로 아시아에서 가장 큰 AI 데이터 센터가 될 것이라는 전망입니다.


지난 6월 정기 주총 자리에서 주주들에게 소프트뱅크의 미래 사업 전략을 설명하고 있는 손 마사요시(한국명 손정의) 회장. <사진=소프트뱅크 영상 캡처>
“데이터센터는 AI 경제·안보의 린치핀”···AI 주권 시동 건 일본 정부
지난 2월 일본 규슈 구마모토현에서는 옛 양배추 밭 일대가 들썩였습니다.


이곳에 축구장 29개 크기의 TSMC 반도체 공장 준공식이 열렸습니다.

일본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22개월만에 초고속으로 지어진 이 공장은 첨단 제조업의 부활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습니다.

TSMC는 공장 건설비용의 40%에 해당하는 4조원을 일본 정부로부터 지원받았죠.

양배추 밭 옆에 자리잡은 일본 구마모토현의 TSMC 첨단 반도체 공장. 일본 정부의 신속 지원과 보조금 혜택으로 TSMC는 공기를 크게 단축하며 올해 상반기 역대 최단기 완공 기록을 세웠다.

<사진=타이완플러스 영상 캡처>

반대로 한국인들은 상반기 분노의 라인야후 사태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소프트뱅크가 일본 정부라는 뒷배를 이용해 라인야후의 네이버 지분 축소를 압박한 사건입니다.


과거 개인정보 유출 사건을 빌미로 일본 총무성이 행정지도를 통해 네이버를 상대로 라인야후 모회사인 A홀딩스(네이버와 소프트뱅크 합작사)의 지분까지 소프트뱅크에 매각하도록 압박을 한 것이죠.
이 과정에서 정부 비호 아래 라인야후의 새 이사진이 친(親) 소프트뱅크 일본측 인사들로 바뀌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일본 정부가 얼마나 열성적으로 순혈적 AI 주권 확보를 위해 뛰고 있는지를 목격했습니다.


만성적 관료주의에서 각성하고 AI 패권을 위해 뛰는 일본 정부는 하드웨어(반도체 첨단 공정) 뿐 아니라 소프트웨어(AI 학습 슈퍼컴퓨터) 분야에서도 아낌없는 보조금 정책을 펼치고 있습니다.


소프트뱅크의 AI 개발을 지원하기 위해 일본 경제산업성은 최대 3700억원을 지원할 예정입니다.

일본 정부가 원하는 독자적인 생성형 AI 개발의 일환으로 소프트뱅크가 개발 중인 계산 기반 슈퍼컴퓨터에 정부 보조금을 지급하는 방식입니다.


KDDI도 AI에 최적화한 슈퍼컴퓨터 개발에 약 8900억원을 투입할 계획인데 이 사업에도 30% 안팎의 일본 정부 보조금이 들어갑니다.


두 회사의 공통점은 사카이 공장에 아시아 최대 규모의 AI 데이터 센터를 지으려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일본 통신사 KDDI가 지난 6월 사카이에 아시아 최대 데이터센터를 세우기 위해 파트너사인 슈퍼마이크로컴퓨터, 샤프, 데이터섹션 측과 합의서를 작성한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KDDI>

일본 정부는 확실히 바뀌었습니다.

과거 느릿한 산업 지원 행보와 달리 양배추 밭을 첨단 반도체 공장으로 바꾸는 데 20개월밖에 소요되지 않았습니다.


쇠락한 사카이 공장 역시 일본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초거대 AI 데이터센터로 확장될 것으로 보입니다.


대만에서 TSMC가 ‘호국신산(나라를 지키는 지키는 신령스러운 산)’으로 통하듯이 일본 정부는 특히 AI 시대에서 소프트뱅크를 앞세워 호국신산처럼 키우려는 의지가 엿보입니다.


반면 윤석열 정부에서 AI 주권의 정책 컨트롤타워가 될 대통령 직속 국가인공지능위원회는 말만 많고 아직까지 출범도 못 한 느림보 걸음 상태입니다.


현 정부 들어 정부와 기업이 합심해 아시아 최대 데이터센터, 그리고 최고 성능의 AI 슈퍼컴퓨터를 만들어보자는 외침이나 결기를 목격한 적은 한 차례도 없습니다.


국부로 연결되는 AI 주권 확립에서 데이터센터는 최고 수준의 생성 AI 모델 개발을 위한 린치핀 역할을 합니다.


제대로 각성하고 기업과 함께 뛰는 일본 정부의 달라진 태도가 부럽고 아찔합니다.


지난 4월 방미 당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왼쪽 첫째)가 워싱턴DC에서 마이크로소프트(MS) 경영진과 만나 일본 내 4조원 규모의 데이터센터 투자 약속을 얻어내는 세일즈 외교를 펼치며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마이크로소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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