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사장 사진 들이밀고 첫 수주 … 맨땅서 대형유조선 만든 뚝심

◆ 기업가 정신을 찾아서 ◆
1974년 6월, HD현대중공업 1호 선박 '애틀랜틱 배런호' 앞에 선 정주영 회장(왼쪽). 2024년 울산 1도크에서 건조되고 있는 메탄올 추진 컨테이너 운반선과 정기선 부회장(오른쪽). HD현대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해낸다.

의심하면 의심하는 만큼밖에 못하고, 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 할 수 없다.

"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에게 1971년 가을은 난관의 연속이었다.

전년에 수립한 '대형 조선소 사업계획'을 완수하기 위해선 6300만달러라는 막대한 자금 조달을 선결해야 했다.


이 중 4300만달러는 해외에서 끌어와야 했지만, 개발도상국 건설기업 대표에게 국제 금융시장의 벽은 높았다.

현대가 기술집약적인 조선업에 진출해 경쟁력 있는 대형 선박을 만들기 어려울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었다.


차관을 구하기 위해 정 회장은 백방으로 뛰었다.

영국 런던에서 선박 컨설턴트 회사 애플도어의 찰스 롱보텀 회장을 만나 거북선이 그려진 500원짜리 지폐를 내밀며 추천서를 받았고 이를 기반으로 영국 바클레이스 은행으로부터 차관 제공 결정을 받아냈지만, 영국 수출신용보증국의 최종 승인을 얻기 위해선 배를 사겠다는 선주를 찾아야 했다.


1971년 10월, 정 회장은 그리스 해운 재벌 조지 리바노스 회장을 스위스에서 만났다.

조선소가 들어설 울산 미포만 백사장 사진과 유조선 설계도를 들고 정 회장은 세계 최대 해운사로부터 유조선 2척을 수주하는 데 성공했다.

배 지을 도크 하나 없는 상태였던지라 수주 조건은 불리했다.

국제 선가보다 16% 싼 가격으로 배를 만들 것, 계약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을 경우에는 원리금을 전액 변상할 것. 공기를 단축하면 문제없다는 게 정 회장 판단이었다.


조선소 기공식으로부터 2년3개월째 되던 1974년 6월, 울산 미포만에는 길이 330m, 너비 52m, 높이 27m에 달하는 초대형 유조선 애틀랜틱 배런호의 뱃고동 소리가 울려 퍼졌다.

조선소 건설과 함께 선박 건조를 시작하는 세계 조선업 역사상 전무후무한 방법으로 조선업에 뛰어든 현대중공업의 노력이 결실을 맺는 순간이었다.

이때 정 회장은 건조 기술뿐 아니라 핵심 설계 기술까지 내재화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1호 선박을 물에 띄운 지 50년이 지난 올해 8월 말. 애틀린틱 배런호를 지었던 HD현대중공업 1도크에는 초대형 컨테이너 운반선 한 척이 흘수선 위로 짙은 하늘색을 빛내며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오는 12월 울산 조선소 역사상 2490번째로 인도될 이 배는 반백년 사이에 달라진 HD현대의 위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선박 설계는 물론 탑재하는 엔진까지 핵심 기술이 모두 HD현대 것이다.


이 배에는 대형선 중 세계 최초로 메탄올 추진 이중연료엔진이 탑재됐다.

또 초대형 컨테이너선 최초로 선실을 선박 뱃머리인 선수에 배치해 화물 적재 효율성과 운항 가시성을 동시에 개선했다.

선형은 망망대해에서 최소한의 저항을 받으며 바람과 파도를 헤치고 나갈 수 있도록 설계됐다.

HD현대는 세상에 없는 배를 만들기 위한 미래 기술을 착실히 준비했다.

세계 최대 해운사 머스크가 HD현대에 메탄올 추진 초대형 컨테이너선 총 18척을 발주한 배경이다.


정기선 HD현대 부회장은 할아버지인 정 회장의 산업보국·기술보국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정 부회장은 세계 1등 조선사라는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신기술·신시장을 개척하는 데 힘쓰고 있다.

친환경 선박을 필두로 스마트 선박, 스마트 조선소 등 조선업 혁신을 이끌어내는 것이 정 부회장이 추진하고 있는 과업이다.


HD현대는 정 부회장 주도로 중후장대 대표 업종인 조선업을 첨단 산업으로 발전시키고 있다.

2030년까지 스마트 조선소 전환을 위해 추진하고 있는 FOS(Future of Shipyard·미래 첨단 조선소) 프로젝트가 대표적 사례다.

설계부터 생산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을 실시간으로 네트워크에 연결해 작업 관리 효율성을 극대화한다는 게 FOS 프로젝트의 골자다.


HD현대는 친환경·디지털 등 패러다임 변화에 발맞춘 기술 혁신을 통해 '초격차'를 실현한다는 목표다.

조선업 후발 국가인 중국이 도저히 따라올 수 없는 경지로 기술 수준을 끌어올리겠다는 것이다.


김성훈 울산대 경영대학 교수는 "한국의 경제 발전을 일으킨 전통적 제조업이 과거 위상을 잃어가고 있지만, 정 부회장은 새로운 기술을 도입하며 조선업을 고부가가치·첨단산업화하고 있다"면서 "어떻게든 해낸다는,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다는 정 회장의 기업가정신이 창업 3세대에 이르러 새로운 형태로 발전하고 있다"고 말했다.


[울산 문광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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