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출이 80% 나온다고 했는데 대출도 안 나오고 팔리지도 않네요. 할 수 있는 게 소송밖에 없어요."
경기도 수원시 한 오피스텔을 분양받은 김 모씨는 "시행사에 계약 취소를 요청했지만 거절당했고 잔금을 치를 수 없는데 방법이 없다"며 시행사를 상대로 계약 취소 소송을 준비 중이다.


수익형 부동산 시장 침체가 장기화하는 가운데 상가·오피스텔·생활형숙박시설(생숙) 등 수익형 부동산을 분양받은 사람들(수분양자)이 분양권 계약을 취소해달라는 소송을 제기하고 있다.

분양 당시 시행사가 약속한 조건이 이뤄지지 않았다며 계약 취소를 요구하지만, 부동산 시장 악화에 소송으로 내몰리는 측면도 크다.

수익형 부동산이 고금리와 수익성 악화로 '마피(마이너스 프리미엄)'여도 팔리지 않다 보니 수분양자들은 소송을 거쳐 계약 취소를 시도하고 있다.

소송을 당한 시행사와 시공사는 잔금 납부가 지연되면서 자금난이 커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걸핏하면 소송을 부르는 선분양 제도의 고질적 문제를 개선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최근 분양계약 취소·해제 소송이 급증한 수익형 부동산 대표 상품은 생숙이다.

대부분 2020~2021년 분양한 곳으로 거주가 가능하다는 말에 분양받았는데, 정부가 '거주 불가'를 명확히 한 뒤 계약 취소 소송이 쏟아지고 있다.

26일 한국레지던스연합회에 따르면 현재 전국 생숙 수분양자 1000여 명이 분양계약 취소를 요구하는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한 상황이다.

서울 강서구 '마곡 롯데캐슬 르웨스트'와 중구 '세운 푸르지오 G-팰리스', 경기 안산시 '힐스테이트 시화호 라군 인테라스', 충남 아산시 '한화포레나 천안아산역' 등 전국 주요 생숙 수십 곳에서 분양 취소 소송이 진행 중이다.


상가는 설계 변경, 임대수익률 보장, 과장 광고, 대출 한도 축소로 인한 계약 취소 소송이 주를 이룬다.

경기 시흥시 거북섬 복합쇼핑몰 보니타가는 상가 438실 중 140실이 계약 해제 및 분양대금반환 청구 집단소송을 진행 중이다.

계약자들은 잦은 설계 변경으로 분양 당시 설명과 다르고 상가 가치도 크게 훼손됐다고 주장한다.

이곳은 전체 상가 가운데 약 3분의 1이 소송 중이라 준공 1년이 넘었지만 대부분이 공실이다.


오피스텔은 부실 시공, 할인 분양 등으로 계약 취소 요구가 잇따르고 있다.

수원 금호 리첸시아 오피스텔 수분양자들은 벽에 금이 가고 누수가 생기는 등 부실 시공에 따른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도시형생활주택인 서울 영등포구 '신길 AK 푸르지오' 계약자들도 소송을 준비 중이다.

이들은 시행사가 잔여 가구에 대해 할인 분양했다며 기존 계약자들에게도 이에 상응하는 할인과 지원을 요구하고 있다.


분양받은 사람들은 경기 침체로 분양권이 팔리지도 않으니 소송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

잔금을 내고 싶어도 대출이 안 나와 '울며 겨자 먹기'로 소송에 매달리게 된다.

경기 침체로 수익형 부동산 시세가 급락하면서 담보 가치가 떨어지다 보니 대출 한도가 축소돼서다.

지지옥션에 따르면 전국 상가 경매 낙찰가율은 2년 전 72.8%였으나 올해는 59.3%로 떨어졌다.

은행권 관계자는 "상가나 생숙은 낙찰가율이 떨어져 감정가가 낮게 나오고 취급을 안 하는 은행도 늘고 있다"면서 "상가나 생숙 사업장은 전국적으로 (잔금을 못 내) 난리"라고 했다.


이를 틈타 '계약 취소 전문' 로펌이나 컨설팅업체들은 적극 영업 중이다.

"수백 건 계약 취소를 받아낸 경험이 있다"고 밝힌 한 법무법인 사무장은 "소송은 수단일 뿐"이라며 "소가 진행되는 동안 시행사에 잔금 낼 여력이 없음을 설명해 우리가 계약 취소를 받아내고 수수료를 받는다"고 했다.


과장 광고나 부실 시공 등 피해가 명백한 상황에서 소송을 제기하는 사례도 있지만, 요즘 수익형 부동산 계약 취소 소송은 '시행사 합의용'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분양업계 관계자는 "통상 계약 취소 소를 제기할 때 채무부존재 확인 소송도 함께 제기하는데, 이렇게 되면 채무상환 의무가 중지돼 소송 기간 중 신용(등급)에 영향을 안 미친다.

그사이 잔금 마련과 전매 가능 시간을 확보할 수 있다"고 했다.


소송에 걸린 시행사, 시공사는 자금난이 가중된다.

소송이 장기화할수록 분양대금 납입이 지연되기 때문이다.

건설사는 대금 미납으로 공사비를 못 받고, 책임 준공으로 부실을 떠안아야 한다.

한 시행사 관계자는 "2년 전 준공한 상가 호실 수십 개가 소송에 걸려 아직도 잔금을 못 받고 있다"며 "올해 준공한 상가도 분양자들이 소송하겠다고 나서는데, 이러다 파산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수분양자들은 패소했을 때 리스크가 크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통상 법원에서는 중대한 하자나 설계 변경, 명백한 시행사 책임이 보이지 않는 한 계약 취소를 인정하지 않는다.

패소 시에는 그동안 치르지 않은 중도금과 잔금, 이에 대한 연체 이자, 소송 비용까지 내야 한다.

집합건물 분쟁 소송 전문 법무법인 라움의 부종식 변호사는 "임대 100% 보장이라고 분양 상담사가 말했어도 계약서에 명시돼 있지 않으면 보장받기 힘들다.

긴 싸움 끝에 승소하더라도 그새 시행사가 파산해 보상을 못 받는 경우도 있다"며 소송에 신중하라고 조언했다.


전문가들은 후분양제가 정착돼야 한다고 지적한다.

최진환 법무법인 정세 변호사는 "선분양제는 허위·과장 광고, 부실 시공, 부동산 시장 변화에 따른 리스크가 계속 발생하고 있다"며 "후분양을 하면 수요자들이 명확하게 상품을 확인할 수 있으니 분쟁이 줄어들 것"이라고 말했다.


[이선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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