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진그룹은 일가를 부양하고자 했던 어느 장남의 열망으로 세워졌다.

창업주인 고(故) 이상일 회장은 대학을 졸업하고 10년간 근무하던 직장을 그만두고 1973년 7월 봉제 공장인 '일진물산'을 설립하며 사업에 뛰어들었다.

가족 부양을 목표로 시작한 일이지만, 사업이 커질수록 목표는 더 높은 곳을 향했다.

해외 시장 진출과 사업보국.
이상일 회장은 1978년 '일진단조'를 출범시키며 자동차 부품 단조 사업을 시작했다.

여기서 원가·품질 경쟁력을 갖추자 1985년에는 자동차 섀시 부품으로, 1994년에는 휠베어링으로 사업 영역을 확장했다.


휠베어링은 기술 집약적인 영역이었다.

해외 시장은 넘어서지 못할 벽처럼 여겨졌다.

일진그룹은 일본 기업과 2세대 휠베어링 기술 제휴를 맺고 휠베어링 사업을 키웠지만, 당시 해외에선 이미 3세대 제품이 상용화된 상태였다.

3세대 기술 제휴를 해주겠다는 기업도 없었다.


3세대 기술을 독자적으로 개발하고 나서도 일진그룹 제품을 쓰겠다는 기업이 없었다.

현대자동차는 기술력 검증이 필요하다며 일진그룹에 수출 실적을 요구했다.

우여곡절 끝에 실차 테스트 조건으로 2002년 '클릭'이란 모델에 들어갈 제품을 양산했다.

이를 계기로 물꼬가 트이면서 당시 최고급 세단인 '에쿠스'에까지 일진그룹의 3세대 휠베어링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자신감을 얻은 일진그룹은 북미 시장으로 눈을 돌렸다.

현지 기업들은 북미 납품 실적을 요구했다.

일진그룹은 북미 애프터서비스(AS) 시장에서 자사 3세대 휠베어링의 기술력과 성능을 검증받는 길을 택했다.

동시에 미국 미시간주 노바이에 사무소를 설치하고, 연구개발(R&D)과 현지 영업을 병행하는 전략을 펼쳤다.

이동섭 회장은 "2003년 포드 수주를 시작으로 크라이슬러, GM 등 현지 빅3 기업을 고객사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고 말했다.

북미 시장 개척은 당시 30대 나이로 가업에 합류한 이 회장이 주도했다.


일진그룹은 미래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고객사 다변화가 중요하다는 판단하에 2008년 유럽 진출을 추진했다.

'알프스를 넘자'란 구호 아래에서 독일 바이에른주 슈바인푸르트에 연구소를 차렸다.

현지 기업이 요구하는 사양에 맞춰 제품을 개발했다.

BMW를 시작으로 메르세데스-벤츠, 아우디, 폭스바겐 등 유럽 자동차 기업 대부분에 베어링을 공급하게 됐다.


올해로 창립 51주년을 맞은 일진그룹은 100년 기업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이동섭 회장의 좌우명은 '유비무환'과 '진인사대천명'이다.

그는 "최악의 상황뿐 아니라 여러 경우의 수에 대비하고, 최선을 다한다면 어떤 결과든 두려워할 일이 없다"고 말했다.


[문광민 기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늘의 이슈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