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오펜하이머’ 덩자셴, 문혁 박해에 암까지 굴곡진 일생 주목

SCMP, 탄생 100주기 맞아 집중 조명
中 ‘양탄일성(兩彈一星)’ 개발 주역
프로젝트 성공에도 문혁 광풍 휩쓸려
이후 연구 중 방사능 노출돼 암 발병

생전의 덩자셴. [중국 광명일보 캡처]
중국 핵무기 개발의 아버지로 통하는 덩자셴(鄧稼先)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25일(현지시간)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가 그의 굴곡진 삶을 집중 조명했다.


그는 중국의 ‘양탄일성(兩彈一星) ’ 독자개발의 주역으로 알려져 있다.

양탄일성이란 1960∼1970년대 개발된 중국의 원자폭탄과 수소폭탄, 그리고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일컫는 말이다.

핵무기 개발 성공 이후엔 문화대혁명의 광풍에 휩쓸려 박해를 받았고, 이후 핵무기 실험 과정에서 암에 걸리는 등 굴곡진 삶을 살았다.

‘중국의 오펜하이머’로 통하는 인물이다.


그는 1924년 6월 25일 중국 안후이성 지식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이후 중국 내에서 학부 과정을 마치고 미국 퍼듀대로 유학해 2년 만인 1950년 박사 학위를 딴 후 귀국했다.

국공내전 끝에 1949년 공산당 승리로 마오쩌둥 주도의 중화인민공화국이 설립된 지 만 1년이 되는 시점이었다.


이후 덩자셴은 1958년부터 중국 핵무기 프로그램인 ‘프로젝트 596’팀을 이끌기 시작했다.

당시 중국은 우방 소련으로부터 핵무기 기술 전수를 여러 차례 요구했으나 거절당했고 결국 독자개발에 나선 시기였다.


덩자셴은 소련·미국 등 기존 핵보유국들과는 다른 기술적 경로를 거쳐 내폭 폭탄을 설계하기 시작한다.

1964년 중국 신장지역 놉누르 사막에서 첫 원폭 실험을 성공시킨 데 이어 1967년 수소폭탄 첫 단계인 열핵 장치 테스트에 성공해 국제사회를 놀라게 했다.


1958년 프로젝트를 맡기 시작하면서 덩자셴과 그의 가족은 비밀유지를 위해 심혈을 기울여야만 했다.

그의 아내는 가까운 친척들에게까지 남편의 임무를 비밀리에 붙였다.

덩자셴은 프로젝트 기간동안 아픈 노모에게 문안을 갈 수도 없었으며, 1964년 프로젝트가 완수된 이후 간신히 임종을 지켰다.


그러나 이같은 노력에도 덩자셴 가족은 문화대혁명(1966년~1976년)의 광풍을 피해 갈 순 없었다.

미국 유학파 출신 덩자셴을 포함해 온 가족은 서양 학문을 공부한 지식인이라는 이유로 모진 고초를 당했다.

그의 아내는 직장에서 홍위병에 공격당했으며 딸은 시골로 내쫓겼다고 SCMP는 전했다.

덩자셴 자신도 인민들의 공개비판 대상으로 전락했다.


다만 덩자셴은 문혁의 광풍이 지나가자 핵무기 연구에 다시 매진한다.

세계 열강들의 군비 경쟁 속에서 국가 안보를 지킬 유일한 방법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문혁이 끝난 이후인 1979년 그가 수행한 한 실험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 때 덩자셴은 실패 원인을 규명할 부품을 직접 찾겠다고 나섰는데, 이같은 무리한 시도로 그는 유해한 방사능에 노출됐다고 SCMP는 전했다.

그의 사인이 된 암 역시 이 과정에서 발병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그는 1986년 암으로 생을 마감했다.


중국 내에서 덩자셴은 미국의 핵무기 개발 ‘맨해튼 프로젝트’를 주도한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와 비교되는 인물이다.


다만 당시 오펜하이머는 전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반면, 덩자셴의 일생은 오랜 시간 베일에 싸여 있었다는 것은 차이점이다.

SCMP는 “그의 이름이 대중에 알려진 것은 그가 1986년 암으로 사망한 지 불과 1달 전이었다”고 전했다.


천재성이 돋보이고 우월함을 과시하려 했던 오펜하이머와는 달리 덩자셴은 겸손하고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으려 했다는 점도 구별된다.


덩자셴과 미국 퍼듀대에서 함께 공부했던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양전닝은 “덩자셴은 내가 알던 학자 중 가장 중국 농민들의 소박함을 갖춘 사람이었다”라며 “스스로를 ‘세상의 파괴자’로 칭한 오펜하이머와 달리 덩자셴은 실험 성공 이후 ‘목숨을 바칠만한 일’이라는 소박하고 짤막한 말을 남겼을 뿐”이라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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