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티이미지뱅크】

한 투수가 있다.

평소 공을 던지면 시속 140㎞ 정도 나온다.

어느 시즌 기록을 재봤더니 구속이 시속 130㎞밖에 안 나왔다.

구속이 실력에 비해 느려진 것. 당장 할 일은 구속을 평상시대로 끌어올리는 것이다.

보약도 먹고 체력훈련도 평소보다 한층 강화한다.

그렇게 해서 구속이 140㎞까지 올라가면 그땐 제 컨디션을 찾은 것이다.

어떨 땐 구속이 시속 150㎞가 나왔다.

그렇다고 마냥 좋아할 일은 아니다.

실력이 늘지 않았는데 억지로 속도를 높인 것이라면 한두 시즌 지나면 어깨가 탈이 난다.

그럼 실력은 곧 곤두박질치고 선수 생명도 위협받는다.

이럴 땐 오히려 힘을 빼는 훈련을 해야 한다.

투수들은 평균 구속을 유지하면서 점진적으로 속도를 높여나가는 것이 최선이다.

그래야 선수 생명도 길고 전체적으로 좋은 성적을 낼 수 있다.


경제도 비슷하다.

매년 3% 정도 성장하는 경제가 어느 해 1%대 성장을 했다면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이다.

성장률을 1%포인트 이상 끌어올리기 위해 돈을 풀고 국가 재정을 투입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정책이다.

이 경제가 연 5% 성장을 했다고 해서 좋아할 일은 아니다.

경제 기초체력보다 과하게 높은 성장률은 경기 과열과 물가 상승이라는 부작용을 낳는다.

이땐 돈줄을 죄어서 성장률을 평균 수준까지 끌어내리는 것이 장기적으로 국가 경제에 도움이 된다.

평소 실력보다 과도한 성장을 추구하는 것은 운동선수가 매번 스테로이드 주사를 맞고 시합에 나가는 것과 비슷하다.

올해는 유독 경제의 기초체력이 중요한 해다.

미국이 돈줄을 죄는 긴축을 본격화하면서 전 세계가 긴장하고 있다.

미국 긴축에 동참하는 나라가 있는가 하면 이와는 반대로 돈을 푸는 나라도 있다.

긴축에 동참하는 나라도 긴축을 할 만해서 하는 나라가 있고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억지로 따라가는 나라도 있다.

우리는 어떤 상태일까.


2022년 들어 11월까지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는 기준금리를 상단 기준으로 3.75%포인트 올렸다.

한국은 같은 기간 기준금리를 2.25%포인트 인상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두 나라의 긴축 기조는 비슷하다.

하지만 경제의 기초체력과 금리 정책 간의 관계를 돋보기로 들여다보면 한국과 미국은 비슷한 듯 다르다.

경제의 기초체력은 잠재적 국내총생산(GDP)으로 평가된다.

잠재 GDP는 한 경제의 물적·인적 자원을 총동원해 물가 상승의 압력 없이 달성할 수 있는 생산가치를 말한다.

잠재 GDP는 실제 GDP와 같을 수도 있고 다를 수도 있다.

잠재 GDP가 실제 GDP보다 높다면 경제는 자원을 효율적으로 이용하고 있지 못한 것이고, 실제 GDP가 잠재 GDP보다 높다면 경제는 과열 상태다.

경제 상황을 진단하는 지표로 실제 GDP에서 잠재 GDP를 뺀 다음 이를 잠재 GDP로 나눈 GDP 갭률이 활용된다.

국제통화기금(IMF)이 측정한 GDP 갭 비율을 활용해 코로나19 충격을 전후한 각국의 경제 상황과 이들 나라가 취한 경제 정책을 살펴보면 몇 가지 중요한 포인트를 확인할 수 있다.


먼저 미국을 보자. IMF 데이터에 따르면 2018년 GDP 갭률은 0.0009%로 집계됐다.

두 지표 간 차이가 거의 없다.

이 비율은 2019년에는 0.655%로 올라간다.

이는 1만개의 물건을 만들 수 있는 실력을 갖춘 미국 경제가 2019년에는 1만65개를 만들었다는 얘기다.

경제 기초실력보다 65개나 많이 만든 것이어서 경제는 과열 징후를 보였다.

과열을 진정시켜야 할 즈음 미국 경제는 코로나19로 직격탄을 맞았다.

2020년에는 GDP 갭 비율이 -3.163%로 뚝 떨어진다.

1만개 만들 수 있는 실력의 경제가 이제는 9683개밖에 못 만든 것이다.

시속 140㎞를 던지던 투수가 100㎞도 못 던진 것과 비슷한 충격이다.

미국은 이 시기 기준금리를 연 1.75%에서 0.25%까지 1.5%포인트나 내렸다.

경제에 보약을 준 것은 물론 스테로이드 주사까지 맞혔다.

그러자 경제가 힘을 발휘했다.

2021년 GDP 갭률은 0.521%로 반전됐다.

실력보다 훨씬 많은 물건을 만들어내면서 경제가 과열 국면으로 바뀐 것이다.



이때부터는 물가가 문제였다.

2021년 초 1%대에 불과했던 미국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2021년 말에는 7%까지 튀어올랐다.

코로나19로 미국 정부가 재정과 금융을 통해 막대하게 돈을 푼 것이 부메랑으로 돌아온 것이다.

경제가 과열되고 물가가 오르니 기준금리를 올려 돈줄을 죄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2021년부터 금리를 점진적으로 올리는 것이 바람직한 정책이었지만 미국은 이 시기에는 금리를 인상하지 않아 정책이 실기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그러자 2022년 들어 미국이 급속히 금리를 올렸다.

같은 해 GDP 갭률은 0.028%로 줄어든다.

금리 인상 여파는 2023년까지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IMF가 전망한 2023년 미국의 GDP 갭률은 -0.824%로 코로나19 충격 이후 잠재 GDP와의 차이가 가장 큰 수준이다.

2023년 미국 경제의 경기침체(recession)가 온다고 예상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물가를 잡으려고 경기침체를 감수하는 것이다.

GDP 갭률이 마이너스일 때는 금리를 내리고 이 비율이 플러스일 때는 금리를 올려 경기를 조절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경제 정책의 수순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상황은 미국과 사뭇 다르다.

한국의 2018년 GDP 갭률은 -0.316%였다.

잠재 성장률보다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이때 한국은행은 기준금리를 0.25%포인트 올렸다.

경제 기초체력보다 성과가 나오지 않으면 '금리 인하'라는 스테로이드 주사를 일시적으로 맞는 게 일반적인데 한국은 오히려 경제의 힘을 더 빼는 처방을 했다.

그러자 다음해인 2019년에는 GDP 갭률이 -0.701%로 더 떨어진다.

경기가 안 좋은데 힘을 더 빼는 처방을 했으니 경제논리로 보면 당연한 수순이다.

그제야 한국은행은 2019년에 기준금리를 0.5%포인트 낮춰 경기 둔화에 대응하는 모양새를 취했다.

하지만 2020년 코로나19가 본격화하자 정책 처방은 무용지물이 됐다.

그해 GDP 갭률은 -2.643%로 한층 더 급락한다.


2020년 한국은행은 금리를 0.75%포인트 더 낮췄다.

코로나19 충격에 대응해 금리를 낮춘 것은 한국과 미국이 유사하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한국은 금리를 낮췄음에도 경기가 살아나지 않아 2021년 GDP 갭률은 여전히 -0.917%를 기록했다.

2022년에도 -0.611%를 기록할 것으로 예상된다.

경제는 여전히 기초체력만큼의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2021년 한 해 동안 기준금리를 0.5%포인트 올렸고 2022년에도 2.25%포인트나 인상했다.

미국이 기준금리를 급속히 올리자 자본 유출과 환율 방어를 위해 금리를 올리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러다 보니 GDP 갭률은 만성적으로 마이너스를 기록 중이다.

2023년에는 경기 부진에 금리 인상에 따른 효과까지 맞물려 GDP 갭률이 -0.892%를 기록할 것으로 예상된다.

물건 1만개를 만드는 실력을 갖췄지만 실제로는 9910개밖에 못 만드는 경기침체 상황이 2022년보다 한층 더 심해진다는 예측이다.

경제가 비실비실한데 금리 인상으로 힘을 더 빼는 처방을 했으니 2023년에는 경기침체가 더 심해질 것임은 충분히 예상된다.

GDP 갭률은 만성적인 마이너스를 기록하고 있지만 우리는 미국처럼 스테로이드 주사를 맞힐 수 없는 상황이 상당 기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우리 경제에 스태그플레이션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얘기가 설득력 있게 들린다.


일본의 경우는 한국 또는 미국과 상황이 많이 다르다.

일본은 2000년 이후 2006년, 2007년 두 해를 제외하고 언제나 GDP 갭률이 마이너스를 기록하고 있다.

경제의 실력보다 항상 적은 물건을 만들어냈다는 얘기다.

2009년에는 이 비율이 7.09%까지 떨어지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일본 경제의 통화 정책은 언제나 확장 일변도다.

2000년대 들어 연 0.1~0.5% 사이를 오가던 일본의 기준금리는 급기야 2016년부터는 ―0.1%까지 떨어졌다.

돈을 맡기면 이자를 받는 것이 아니라 돈을 줘야 하는 시스템으로 바뀌었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돈을 쓰지 않는다.

아무리 정부가 돈을 풀어도 경기는 만성적인 침체 국면이 이어지고 있다.

일본은 2022년 미국이 금리를 급격히 올리는 와중에도 마이너스 금리를 계속 유지하고 있다.

일본의 실물경제 상황을 이해한다면 이런 정책 방향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GDP 갭률은 이처럼 각국의 경제 상황을 한눈에 볼 수 있는 효율적인 지표다.

이 비율과 정부의 경제 정책 간의 흐름을 보면 정책에 대한 평가도 가능하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미국은 기축통화국의 이점을 최대한 누리면서 나름대로 현실을 진단하고 이에 대해 적절한 대책을 수립하는 것처럼 보인다.

2022년 11월에도 미국은 0.75%포인트 금리를 올렸고 2023년 경기침체를 방어하기 위해 12월에는 금리 인상폭을 0.5%포인트로 줄일 태세다.

반면 한국은 만성적인 경기침체에도 기준금리를 올리면서 침체의 정도를 더 심하게 만드는 정책을 펴고 있다.

그러면서도 미국처럼 공격적인 금리 인상이 어려워 향후 미국과 한국 간 금리 차가 벌어져 금융시장이 불안해지는 것을 감수해야 할 상황이다.

그러다 보니 우리 경제 정책은 효과도 미진하고 정책 타이밍도 맞추지 못한다는 비판이 따른다.

경제적으로 미국이 기침을 하면 한국은 독감에 걸리는 상황도 반복된다.

경제 규모가 작고 개방도가 높은 우리 경제의 숙명이라고 변명할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다.

우리 경제 상황에 맞는 정책 툴을 만들어야 하지만 아직까지 그 길이 보이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노영우 국제경제전문기자]
※기사 전문은 매경엠플러스(www.money-plus.co.kr)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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