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융시장 혼란 ◆
영국중앙은행인 영란은행(BOE)이 국채 매입을 통해 시장 안정에 나선 28일(현지시간) 한 여성이 런던의 BOE 앞을 지나가고 있다.

[로이터 = 연합뉴스]

글로벌 금융시장의 뇌관이 된 영국 채권시장이 28일(현지시간) 영국중앙은행인 영란은행(BOE)의 긴급 국채 매입이라는 처방으로 일단 최악의 위기 상황은 모면했다.

하지만 수습책마저도 인플레이션을 자극하는 양적완화 정책이라는 점에서 불안감을 잠재우기에는 역부족이라는 평가다.


BOE는 이날 금융시장 안정을 위해 다음달 14일까지 20년물 이상 장기 국채를 무제한 사들이겠다고 발표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BOE가 국채를 하루 50억파운드씩 13일간 총 650억파운드(약 100조원)어치 매입하겠다는 약속을 했다고 보도했다.

또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사들인 국채에 대한 처분 일정을 10월 말로 한 달가량 연기한다고 밝혔다.

당초 다음주부터 국채를 매도해 양적긴축으로 돌입할 예정이었으나, 이를 번복하고 국채 매입을 약속한 것이다.


이러한 긴급 처방으로 치솟던 영국 국채 금리는 급락했다.

영국 10년물 국채 금리는 BOE의 국채 매입 공개 전 4.5%에서 발표 이후 4.08% 선까지 뚝 떨어졌다.

같은 날 5%를 돌파해 20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한 30년물 금리도 BOE 발표 직후 1%포인트 떨어졌다.

추락을 거듭하며 1.0541달러까지 추락하던 파운드화도 1.0889달러까지 회복했다.


BOE가 이날 긴급 대응에 나설 수밖에 없던 배경에는 영국 연기금이 자리 잡고 있다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이 28일(현지시간) 보도했다.

국채 장기물 가격이 급락하면서 연기금이 갖고 있던 금리 파생상품에 마진콜(추가 증거금 요구)을 받았다는 것이다.

연금 컨설팅 업체 XPS의 벤 골드 투자 헤드는 23일 예산안 발표 이후 영국 연기금이 최소 10억파운드(약 1조5000억원)의 마진콜을 받았다고 추정했다.

그는 WSJ에 "자문해주는 400개의 연금 가운데 약 3분의 2가 영향을 받았다"고 말했다.

채권 금리 상승은 채권 가격 하락을 의미하는데, 보유 자산 가치가 급락하면서 24시간 이내에 자금을 수혈해야 하는 상황에 몰렸다는 것이다.

현금 마련을 위해 연기금이 국채를 던져야 하는 상황이 계속되면 악순환의 고리가 형성돼 연기금 파산도 우려되는 긴박한 상황이었다.


BOE의 시장 개입으로 일단 한숨을 돌리긴 했지만 영국 정부의 신뢰 문제가 제기된 데다 인플레이션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이 제시되지 않아 시장 불안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앞서 대규모 감세안을 발표한 정부와 기준금리 인상을 통해 물가를 잡으려는 중앙은행의 정책이 엇박자를 내고 있는 점도 가장 큰 문제다.

FT는 29일자 사설을 통해 "이번 혼란 사태는 영국 정부가 스스로 자초한 위기"라고 꼬집었다.


영국이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을 받은 1976년 상황과 비슷하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예측한 누리엘 루비니 전 뉴욕대 교수는 최근 "정부의 감세 정책으로 결국 영국은 IMF 구제금융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언 골딘 옥스퍼드대 세계화 및 개발 교수는 "영국이 세계 10대 경제권에서 빠지는 건 시간문제"라고 말했다고 뉴욕타임스(NYT)가 전했다.


제1야당인 노동당의 키어 스타머 대표는 리즈 트러스 총리가 영국 경제에 위험 요인이라며, 감세 계획 철회를 요구했다.

IMF도 전날 영국 정부에 정책 변경을 촉구하며 이례적으로 주요 7개국(G7) 회원국의 정책에 대해 경고했다.

보수당 내부에서도 쿼지 콰텡 재무부 장관 사임설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영국 정부는 감세 정책 철회를 고려하지 않고 있으며, 콰텡 장관도 사임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NYT는 도박을 하는 트러스 총리가 다음 선거 전 교체될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고 분석했다.


미국 행정부도 영국 정부에 대해 감세 정책 철회를 압박하고 있다고 블룸버그가 이날 복수의 소식통을 인용해 보도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이날 경제 부처 장관들에게 세계 시장 급변 상황에서 동맹국들의 상황을 면밀히 파악하고 긴밀히 소통할 것을 지시했다고 백악관이 밝혔다.

지나 러몬도 미국 상무장관은 "감세와 재정 지출 확대를 동시에 하는 것은 단기적으로 인플레이션과 싸우는 게 아니며, 장기적으로 경제성장에도 도움이 안 된다"고 말했다.


영국 경제가 이미 경기 침체에 접어들었다고 국제 신용평가사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는 밝혔다.


이날 CNBC에 따르면 S&P는 보고서를 통해 "영국 가계가 9.9%에 달하는 물가상승률에 직면해 있고 물가는 겨울에 더 올라 향후 민간 소비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며 "영국이 지난 2분기부터 1년 동안 이어질 경기 침체에 진입했다"고 설명했다.

S&P는 영국의 올해 경제성장률을 3.3%로 예상하고, 내년은 -0.4%를 기록할 것으로 내다봤다.

영국의 지난 2분기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0.1%였다.


29일 유럽 주요국가 증시는 하락세를 보였다.

이날 영국 FTSE100지수는 전일 대비 1.58% 떨어진 모습을 보였다.

독일 DAX지수와 프랑스 CAC40지수도 각각 -1.49%, -1.32%에 거래됐다.


[김덕식 기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늘의 이슈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