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더M M-PRINT GFW CITYLIFE LUXMEN 매경이코노미 MBN골드 MBN 매일경제
로그인|회원가입 |시청자 게시판
종목검색
  • 종목검색
  • 통합검색

헤드라인

광고
프로그램 바로가기
프로그램 바로가기 닫기
가나다순 카테고리순
> 뉴스 > 기사
기사목록|||글자크기 
[매경춘추] 고놈의 직업병
기사입력 2020-12-03 00:09
  • 기사
  • 나도 한마디
공유하기 
229, 154, 345, 765. 이게 무슨 숫자? 지난주 로또 번호? 간첩 교신 암호? 아무리 생각해봐도 알 수 없는 이 숫자는 한국전력 직원들은 누구나 다 아는 대한민국의 전압 단위 숫자다.

마음 편한 한전 직원들은 아파트 비밀번호로 이런 숫자를 섞어 사용하기도 하지만 전기고장 담당 직원은 이 숫자에는 바로 신경을 곤두세운다.


어느 직업이든 오래 일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특이한 습성이 몸에 배게 마련이다.

'한전, 전력그룹사, 협력사 직원'을 포함한 '전기로 사는 사람'들 눈에는 시내에서는 전주(전봇대)만 보이고 외곽에 나가면 송전철탑만 보인다.

지금의 학교에 오기 전 한국전력공사에서 30년 넘게 근무했던 필자도 마찬가지다.

함께 타고 지나온 고속도로에서 다른 사람들은 하늘, 구름, 산과 건물만 봤다고 하지만 필자는 345㎸, 765㎸로 철탑 전압 종류까지 기억하고 있다.

신기한 직업병이다.


문명의 가장 큰 발명품이 된 전기는 우리 일상생활과 한시도 뗄 수 없는 존재가 됐다.

공기 다음으로 가까이 있는 듯하다.

눈만 뜨면 스마트폰을 충전하고 컴퓨터를 켜고 전기를 가지고 논다.

전기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는 듯하다.

하지만 그 전기가 조금만 더 사랑을 달라고 한다.


TV 방송에서 극한 직업으로 소개된 적도 있지만 100m도 넘는 까마득한 765㎸ 철탑 위에도 매달려 일하는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다.

전국 4만2000개 철탑을 타며 사는 그들에게 높이에 대한 무서움은 없다.

여름 더위와 겨울 바람만이 큰 적이다.

전기기구를 꽂고 계신 병실 어머니가 생각난 대원은 철탑 중간에서 챙겨 먹는 간식 시간도 아깝다.


술 한잔 마신 날, 새벽 2시 35분에 잠에서 깨 화장실에 가려고 스위치를 눌렀을 때 불이 켜진다.

술 깨며 웃는 건 발전소, 변전소 직원이 밤샘 일하며 방금 보내온 전기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에는 지구 12바퀴 길이로 쉼 없이 전깃줄이 이어져 있다.

태풍이나 집중호우가 와도 이렇게 빨리 전기를 복구하는 나라도 전 세계에 별로 없다.

민원 전화에 무차별하게 욕먹는 동안에도, 필사적으로 끊어진 전기를 살려 놓고야 마는 사람들이 있다.


지금은 기억 속에 사라진 강남구 삼성동 한전 본사 건물에서는 비상근무로 수없이 많은 야근을 했다.

자장면은 질리도록 시켜 먹었다.

회사 근처 S반점 나무젓가락 포장지에 '태풍이 와도 불러만 주세요'라는 문구가 인쇄돼 있었다.

물론 요즘 같으면 배달 근로자 안전을 위해 써서는 안 되는 표현이지만 그때는 그들까지도 우리와 함께 근무하는 '비상 대기조'였다.


흉물이라 천대받고 뽑아내라 욕먹는 철탑에서, 묵묵히 일하는 동료들의 진한 땀 냄새를 맡는다.

힘은 들지만, 끊기지 않는 에너지에 실낱같은 희망을 실어 보내겠다고 꿋꿋하게 버티는 전기줄을 보면 푸근해진다.

고놈의 직업병이란 지독하다.


[장동원 수도전기공업고등학교 교장]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대원 #한국전력

기사목록|||글자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