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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팬 넘버원!"이라더니…日가전·반도체 어쩌다 몰락했나
기사입력 2020-09-21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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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일 톺아보기-28] ※톺아보기란 '샅샅이 더듬어 뒤지면서 찾아본다'는 순우리말입니다.

한중일 톺아보기는 동북아 에서 일어나는 굵직한 이슈부터 소소한 소식까지 살펴보는 코너입니다.


미국 하버드대 에즈라 보겔 교수가 출간한 `재팬 애즈 넘버원` (Japan as number one)의 표지. 보겔 교수는 일본 제조업이 세계를 재패하자 미국과 세계가 일본을 배워야 한다고 설파했다
소니 워크맨, 코끼리 전기밥솥, 파나소닉 TV…. 한때 세계를 주름잡던 일본 가전의 히트작들입니다.

1970~1980년대는 일본 기업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특히 자동차와 더불어 가전 산업은 일본의 고도성장을 이끄는 견인차 역할을 하며 '가전 왕국' 이라는 명성을 가져다 주었죠. 얼마나 잘나갔던지 1979년 미국 하버드대 에즈라 보겔 교수는 '재팬 애즈 넘버원'(Japan as number one·세계 제일 일본)이라는 책을 통해 가전을 포함한 일본의 제조업을 칭송했고, 일본 경제가 곧 미국을 추월할 것이라 전망하기도 했습니다.

1990년대에도 일본 출장에서 돌아오는 한국인들의 트렁크엔 워크맨, 코끼리 밥솥이 들어 있곤 했습니다.


반도체도 마찬가지입니다.

1980년대 일본은 주로 대형 컴퓨터용 고품질 D램을 생산하면서 한때 세계 시장의 80%를 점유할 정도로 잘나갔습니다.

1989년 NEC, 히타치, 도시바가 세계 반도체 시장 매출 상위 3개사를 석권하고 1990년에도 톱10 기업 중 6개가 일본 회사일 정도로 전 세계 반도체 시장을 일본이 휩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죠.

일본 전자·반도체 제품의 세계 시장 점유율 변화/출처=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그러나 이렇게 대세였음에도 일본 경제의 거품 붕괴 후 내리막만 타온 모습은 격세지감을 느끼게 합니다.

기존 가전뿐 아니라 최근 스마트 가전 분야에서도 일본 제품들은 해외에서 한국, 미국, 중국 제품에 밀려 고전 중입니다.

NEC, 히타치,미쓰비시가 합작 설립했던 반도체 기업 엘피다는 2012년 파산했고, 2017년 도시바는 경영난에 플래시메모리 사업부를 매각했으며, 지난해 파나소닉은 반도체 사업에서 완전 철수한 바 있습니다.

일본 기업들은 많은 특허와 높은 기술력을 갖추고 계속 신제품을 출시했음에도 낮은 시장 점유율과 수익성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연출 했습니다.



'잃어버린 30년' 상징하는 日전자·반도체
30년전 세계 기업 시총 순위에서 일본 전자·반도체 대기업이 있던 자리에는 현재 삼성전자가 있다
1989년 전 세계 기업 시가총액 순위를 보면 상위 20개사 중 14개를 일본 기업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히타치, 파나소닉, 도시바 등 일본 전자·반도체 대기업들도 포진해 있습니다.

그러나 30년 뒤인 2019년 순위에는 상위 20위 안에 일본 전자·반도체 기업은 단 한 곳도 찾을 수 없습니다.

시총 순위의 변화는 일본의 전자·반도체 대기업들이 과거에 비해 존재감을 얼마나 상실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며, 일본 경제의 '잃어버린 30년'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2000년대 이후 이들 기업의 쇠락이 두드러진 것은 체질 자체가 글로벌화와 인터넷 시대에 적응하지 못한 결과였습니다.

TV 시대의 종언과 모바일 네트워크 사회의 도래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던 겁니다.

예컨대 파나소닉과 샤프는 2000년대 들어 일본 내 TV 제조 공장에 대대적 투자를 단행했습니다.

이때는 이미 방송에서 인터넷으로 미디어의 전환을 예견할 수 있는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TV 시대가 계속될 것이라 봤고, 타사보다 성능 좋은 제품을 만들면 팔릴 거라 믿었습니다.


판로에서도 종래 발상을 벗어나지 못해 선진국 소비자를 겨냥한 고품질 TV 제조에 편중됐습니다.

TV 시장에 있어 여지가 많은 곳은 포화 상태인 선진국보다 TV 문화를 접할 성장 인구가 있는 신흥지였지만 신흥국 시장에 대한 판로 개척은 한국의 삼성, LG전자에 크게 뒤져 있었습니다.

일본 회사들은 삼성전자의 신흥국 진출을 의식하면서도 자신들에게 더 앞선 기술이 있다며 결국 시장은 따라올 것이라 봤지만, 그들의 생각은 적중하지 못했습니다.



삼성 "팔리는 걸 만든다" vs 파나소닉 "만든 걸 판다"
유노가미 다카시 미세가공연구소 소장은 일본 기업들이 `일본만의 자의식 과잉`에 빠진 것이 경쟁력 하락을 몰고 왔다고 지적한다/사진=유튜브 캡처
히타치 연구원 출신인 유노가미 다카시 미세가공연구소 소장은 일본 기업들이 '일본만의 자의식 과잉'에 빠진 것이 경쟁력 하락을 몰고왔다고 지적했습니다.

단순히 경쟁사보다 고성능·고품질만 추구하다가 고객에게 어필하지 않는 불필요한 기능과 고비용만 초래했다는 겁니다.

예를 들면 1990년대 이후 대형 컴퓨터 대신 PC가 대세가 됐지만 일본 기업들은 저가의 PC용 D램 생산 대신 대형 컴퓨터에 쓰던 고품질·고비용 D램을 PC용으로까지 판매하려 했고 결국 외면받게 됐습니다.

그리고 이 같은 실수는 모바일용 반도체가 대세가 됐을 때도 반복됐습니다.


2018년 삼성전자는 정전이 잦은 인도 환경을 고려해 저전력으로 냉각이 유지되는 제품을 내놔 현지에서 호응을 받았다/사진=연합뉴스
가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삼성전자는 팔리는 제품을 만들기 위해 마케팅에 투자를 많이 했고, 특히 현지 수요자 입맛에 맞는 마케팅 전략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현지에서 어떤 제품을 선호하고 필요로 하는지 우수한 마케터를 통해 시장을 분석하고 이에 맞춘 상품을 내놓은 결과, 시장 창출에 성공했죠. 구체적으로 삼성은 인도 시장 공략 때 크리켓에 열광하는 인도인 성향에 맞춰 TV 화면 구석에 언제든 크리켓 스코어가 표시되도록 만들었습니다.

냉장고 역시 인도의 취약한 전력 사정을 고려해 순간 정전용 배터리나 아이스팩을 삽입하고, 채식주의가 많은 인도 문화를 고려해 냉장실을 더 넓혀 출시하는 등의 아이디어를 구현했습니다.


고성능·고품질 기술이 곧 혁신이고, 마케팅 분야는 혁신이란 단어와 연결시키지 않던 일본 기업들의 마케팅에 대한 경시가 한일 기업 간 성과 차이를 낳았다는게 유노가미 소장의 분석입니다.



日언론 "지나친 완벽주의" 문제?…나쁜 관성 탓
`모노즈쿠리`는 일본이 제조업 강국이 되게 한 원동력 이지만 일본 전자·반도체 대기업들의 쇠락을 몰고온 원인으로 지목되기도 한다
지난 7월 일본 동양경제는 일본 가전이 세계에서 먹히지 않는 근본 원인이 일본 특유의 '지나친 완벽주의'에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일본의 '모노즈쿠리'(최고의 제품을 위해 혼신을 다하는 장인정신)에 따른 완벽함의 추구가 요즘 시장 트렌드와 맞지 않는다는 겁니다.

긍정적 어감을 위해 완벽주의를 언급했겠지만, 결국 시장 변화를 못 따라간 겁니다.

요미우리신문 역시 좋은 제품을 만들면 팔린다는 '기술 신앙'에 빠져 일본 전자·반도체 기업들이 세계에서 소외됐다고 지적했습니다.

이는 일본 IT와 영화산업에 특히 만연한 '갈라파고스화', 즉 상품에 있어 자기들만의 표준을 고집하다 우물 안 개구리처럼 고립되는 경향과도 일맥상통합니다.


특히 반도체의 경우 1990년대부터 수평 분업 구조가 본격화됐지만 일본 기업은 이 흐름과 반대로 갔습니다.

반도체 제조는 '계열'과 '하도급'이라는 일본적 수직 분업 체계에서 각 분야에 전문화한 기업들이 국경 없이 분업해 가는 수평 분업 구조로 변화했습니다.

오랫동안 익숙하던 방식에 근본적 변경이 요구됐지만, 일본 기업들은 설계와 제조의 수직 통합을 고집했습니다.


그러나 일본적 방식은 세계 각지에서 값싸게 부품을 들여와 완제품을 조립하는 수평 분업 방식을 당해낼 수 없었습니다.

해외에서 양질의 제품이 저렴한 가격에 쏟아져 나오는데 가격 경쟁력 없는 일본산이 팔릴 리 만무했습니다.

여기엔 일본 기업들 책임만 있는 건 아니었습니다.

이학 박사인 엔도 호마레 쓰쿠바대 교수는 당시 일본 통상산업성(현 경제산업성)이 이끄는 반도체 산업에 대한 국가 프로젝트가 기업들로 하여금 분업이라는 트렌드를 좇는 것을 되레 방해했다고 지적했죠.


일본식 계열 유통망 붕괴, 가전 경쟁력 저하 부추겨
빅카메라, 요도바시카메라 등은 일본의 대표적인 가전 양판점이다
국내적으로 유통 구조의 변화에 빠르게 대응하지 못한 점도 일본 가전회사의 경쟁력 저하 원인 중 하나로 꼽을 수 있습니다.

과거 고도 성장기 일본 가전회사들은 제품의 유통 계열화(자사 제품을 위해 도·소매점을 조직화, 배타적 판매망을 조성하는 것)를 기반으로 사업모델을 구축해 전성기를 구가했습니다.

이때 일본 가전회사들의 사업모델은 유통 계열점을 만들고 정가 판매, 전속 거래를 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일본 특유의 생산과 영업 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도 성장기땐 소득이 매년 높아지다 보니 일본 소비자들은 높은 가격도 받아들였고, 때에 따라 부를 상징하는 고가의 제품을 더 선호하기도 했죠. 이때 일본에서 명품과 과시적 소비가 눈에 띄게 늘어난 것도 이 때문입니다.


2010년대 들어 양판점의 일본 내 가전 매출 점유율은 60%에 이른 반면, 계열점은 10%미만으로 떨어진다
그러나 버블 붕괴와 계속된 불황은 일본 가전의 유통 구조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먼저 일본 소비자들은 가격에 민감해졌습니다.

유통계열화는 기본적으로 특정 회사의 제품만 우선 취급하고, 또 그 기업이 원하는 가격에 제품을 파는 폐쇄적 모델이기에 여러 회사 제품을 같이 취급하는 개방형보다 비용면에서 불리합니다.

그 결과 유통계열점보다 저렴한 가격에 제품을 공급하는 양판점(빅카메라 등 여러 회사 제품을 전시해 비교 구매할 수 있는 점포)이 급성장하게 됐습니다.


계열점에는 새 기능이 많이 탑재된 특정 회사의 신제품이 계속 출시될진 몰라도 결국 가격 경쟁 면에서 양판점에 밀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양판점은 계열점처럼 기업이 원하는 가격에 제품을 팔지 않고 소비자의 구매 대리점을 표방해 가격 파괴를 일상화했고, 이는 일본 가전회사들이 의존해왔던 사업모델인 계열 유통망의 붕괴를 몰고왔습니다.

그리고 이는 이익률 하락 등 일본 가전회사들의 경쟁력 저하로까지 이어졌습니다.



日, 여전히 제조업 강국...한국은 반면교사로 삼아야
지난 15일부터 미국의 제재로 중국 화웨이에 대한 전세계 기업의 반도체 공급이 중단되게 됐다.

화웨이가 타깃이 된 배경엔 `중국 제조 2025`의 최전선에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중국은 2025년까지 반도체를 비롯, 첨단 산업 패권을 잡겠단 목표를 세웠다/사진=연합뉴스

일본 가전·반도체 기업이 누리던 영광은 전략과 판단 미스로 퇴색됐고, 이는 헤이세이(平成) 시대가 잃어버린 30년으로 불리는 데 일조했습니다.

일본 기업들은 기술력은 최고였지만 미래 변화에 대한 안목을 갖추진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일본은 핵심 부품과 소재에서 원천기술을 가진 수많은 중소기업을 보유한 제조업 강국입니다.

한국이 자랑하는 삼성전자에 부품과 소재를 공급하는 핵심 파트너 국가이기도 합니다.

한국이 과거에 비해 일본을 많이 따라잡았음에도 여전히 대일 무역 역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도 핵심 부품·소재를 일본에서 들여와야 제품을 만들 수 있는 구조 때문이란 건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중국은 2015년 '중국 제조 2025'란 야심 찬 계획과 함께 제조업 대국을 넘어 강국이 되기 위해 반도체 굴기를 선언하며 독일, 그리고 일본을 목표로 하겠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지난 30년간 일본 기업들의 시총 변화와 함께 IMD 등 국제 경쟁력 지표의 변화는 분명 일본 전체의 경쟁력 저하와 경제 현실을 대변해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수많은 기술 기업이 떠받치고 있는 일본의 제조업 경쟁력은 결코 과소평가할 게 아니며, 이 점을 중국은 정확히 인식하고 있습니다.


전자·반도체는 가장 빠르게 변화하며, 역사상 가장 큰 기술 패러다임의 전환이 일어날 수 있는 분야라고 합니다.

한때 가장 앞서 나갔으나 허망한 쇠퇴의 기로에서 절치부심 중인 일본의 존재는 중국의 맹추격을 받고 있는 한국에 백번 참고해도 좋을 반면교사이자 긴장을 늦추지 말아야 할 이유가 되고 있습니다.


[신윤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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