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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신문으로 보는 `김우중과 대우` 영욕의 세월
기사입력 2019-12-11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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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지난 9일 별세했다.

향년 83세. 고인이 일군 대우의 흥망성쇠는 한국 경제의 커다란 한 축이다.

매일경제신문은 고인과 대우를 어떻게 지켜봐 왔을까. 그 궤적을 따라가보자. 70년대부터 1999년까지 매경에서 다룬 대우 관련 주요 기사를 살펴봤다.


1970년 5월 28일자 8면에 작은 단신이 하나 실렸다.

'대우실업(대표이사=김우중) 27일 충무로 성빈빌딩으로 사무실 이전. 전화번호는 종전과 같은 (22)4327'
故 김우중 회장이 대우실업을 창업한 게 1967년이니, 창업 3년을 맞아 회사를 옮긴 모양이었다.

매경에서 대우의 첫 등장은 '사무실 이전' 단신이었다.


사무실을 이전한 해 12월 크리스마스 이브 지면에 대우가 또 등장했다.

다음해 수출 목표를 2000만 달러로 잡았다는 내용이다.

비록 1단 정도의 작은 크기 기사였지만, 당시만 해도 지면이 많지 않아 작은 회사 매출 목표를 게재하기 쉽지 않았을 턴데, 매경은 될성부른 나무의 '떡잎'을 알아봤던 거 같다.


이듬해인 1971년 12월 부쩍 커진 대우 기사가 눈에 들어 왔다.

'수출의 날' 동탑산헙훈장 수상자 인터뷰 기사다.

대우가 쿠웨이트 등 새 시장 개척에 큰 공헌을 했다는 내용이다.

당시 대우실업 김우중 사장의 나이는 36세. 기사는 "김 사장은 오늘도 부산, 미아리 등 국내 공장을 두루 돌면서 내년도 수출을 위한 정지작업에 여념이 없다"고 했다.


1972년 3월 24일자 매일경제 3면에 대우 기사가 나왔다.

대우실업이 대한방직과 함께 인도네시아에 종합섬유공장을 건설한다는 내용이다.

고 김우중 회장의 '세계경영'은 그렇게 차곡 차곡 성장하고 있었다.


1973년 3월 고 김우중 회장이 매경 '기업과 인물' 코너에 등장했다.

고인이 '한국의 경영자'로 선정되면서 인터뷰를 한 모양이다.

당시 대우는 해외지점 9곳, 수출 5000만 달러를 기록하는 건실한 중견기업으로 성장해 있었다.


1974년 11월 말 고 김우중 회장의 대우는 또 다시 수출 역군으로 매경에 등장한다.

11회 수출의 날 수상자인데, 이번에는 1억불 수출의 탑을 받았다.

좌우로 함께 수상한 한국 경제의 거목들이 눈에 띈다.

지금은 사라진 연합물산, 한국 섬유산업을 이끌었던 한일합섬과 함께 당시 현대조선 정주영 사장, 대우실업 김우중 사장이 1억불 수출의 기염을 토했다.


1976년 11월 5면에 대우의 기사가 크게 실렸다.

대우가 중공업에 본격 진출한다는 내용이었다.

기사에 따르면 대우그룹은 지금까지의 기반 확충을 토대로 77년부터 중공업화를 본격적으로 실현해 나가기로 방향을 정했다.

대우센터 사진이 실린 것을 보니, 지금은 서울스퀘어로 변신한 대우빌딩이 이때 이미 완공돼 있었던 거 같다.


1979년 1월 당시 김우중 대우그룹 사장이 매경 '필승 사장학' 코너에 등장했다.

고인은 "일에 대한 집념, 의지가 성장을 좌우한다.

따라가는 자세로는 경쟁에서 뒤쳐진다"고 강조했다.

그가 말한 사장학은 '개척'과 '도전정신'이었다.


1980년 3월 대우그룹이 매경 1면을 장식했다.

석유탐사 사업에 진출하기 위해 미국, 홍콩 기업들과 제휴했다는 내용이다.


1982년 12월 9일 매경 7면. 대우그룹이 미국 GM사로부터 새한자동차 경영권을 인수했다는 내용의 기사가 실렸다.

대우의 자동차 산업 진출 기사다.

대우는 그 3년전인 1979년 새한자동차 지분 50%를 인수하면서 자동차 사업화를 본격화했다.


1984년 4월 9일자 매경 7면에 고인이 대학생들과 자유토론을 했다는 내용의 기사가 실렸다.

잠깐 기사를 통해 고인의 말을 다시 보자 '1년의 3분의 2를 해외에서 지낸다.

그때마다 느끼는 게 바로 나라가 강해야 한다는 것이다.

부강은 곧 생존이기 때문이다.

재벌의 문어발식 경영형태는 자연이 없어질 것으로 본다.

이런 형태의 경영은 한 시기의 역사적 단계에 불과한 것이다.

나는 부자로 이름을 남기기보다는 멋진 경영인으로 평가받고 싶다.

'
1986년 6월 대우가 새로 개발한 승용자 '르망'을 발표했다는 내용의 기사다.

2년 전 착수한 이른바 '월드카' 개발 프로젝트의 결과물이다.

이날 신차 발표회는 당시 김만제 부총리, 금진호 상공부 장관, 워커 주한미국대사 등 각계인사 5000여명이 참석할 정도로 큰 행사였다.


1987년 4월. 대우가 창업 20주년을 맞아 계열사 독립경영체제 확대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그룹 경영 청사진을 밝혔다는 내용이 주요 기사로 다뤄졌다.

29개 계열사중 (주)대우를 제외한 28개사를 종업원 지주제로 전환해 자립경영의 기반을 마련한다는 내용이다.


1989년 1월 7일자 3면에 당시 김우중 대우 회장의 전면 인터뷰가 게재됐다.

신년 기획 '21세기를 연다 - 기업재구축' 시리즈의 일환인 것 같다.

이 인터뷰에서 고인은 공산권과의 교류 확대에 주력하겠다며 특유의 '세계경영'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또 자동차·전자·항공·금융에 주력하며 대우조선 정상화 의지도 밝혔다.


1990년 11월 24일자 15면. 안타까운 소식이 사회면에 작은 1단 자리를 차지했다.

고인의 장남이 미국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는 내용이다.


1991년 12월, 대우가 자동차사업 파트너인 미국 GM과 결별한다는 내용이 실렸다.

자동차 해외 사업을 독자적으로 추진하고 군산공장에서 상용차와 승용차 동시 생산을 검토한다는 내용도 담겨 있다.

대우의 자동차사업 홀로서기 선언이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출발한 대우자동차는 외환위기를 거치며 다시 GM에게 넘어가게 된다.


1992년은 대통령 선거가 열린 해였다.

이 선거에는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통일국민당 후보로 정치 참여를 선언하면서 정계와 재계 일대 혼란이 가중되던 시기였다.

고인도 정치 참여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매경은 대선을 불과 한달여 남긴 1992년 10월 28일자 1면에 '김우중 파문 재계 강타'라는 톱기사를 실어 당시 상황을 전했다.


파문은 바로 가라앉았다.

당시 김우중 회장은 사태가 일파만파 확산되자 기자회견을 열고 경제에만 전념하겠다는 뜻을 밝히며 정치 참여설을 일축했다.

그해 치러진 대통령 선거는 김영삼 민주자유당 후보가 당선됐다.


1993년 1월 1일. 대선이 끝나고 새해가 밝았다.

매경은 신년호에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의 새아침의 당부'를 1개면 전체를 할애해 실었다.

고인은 기고문에서 "제조업을 키우지 않으면 선진국에 진입할 수 없다"며 제조업 확장에 공을 들였다.


1996년 3월 15일자 매경 1면. 대우의 '유럽 경영'이 본격화한다는 기사가 헤드라인에 올랐다.

일본, 프랑스 기업과의 제휴, 영국 자동차업체 인수 등 굵직 굵직한 내용이 담겨 있다.

대우의 '세계 경영'이 정점을 향해 질주하는 상황이었지만 그 이면에 '유동성 위기'라는 그림자가 점차 짙어지기 시작했다.


1997년 4월 22일자 13면. 김우중 대우 회장의 인터뷰가 실렸다.

당시 김 회장은 "부실기업 도산과 수출부진 등으로 우리 경제가 위기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곧 수출경쟁력이 회복돼 내년에는 국제수지가 정상화할 것"이라며 우리 경제에 대한 낙관과 강한 자신감을 피력했다.


1997년 9월 17일자 매경 1면에 김우중 회장이 다시 등장했다.

대우그룹 회장이 아니라 전경련 회장으로서였다.

고인은 "국가적 경제위기 속에 중책을 맡게 돼 막중한 사명감을 느낀다"고 소감을 밝혔다.

일각에서는 고인이 전경련 회장으로 있으면서 당시 김대중 정부 경제 관료들과 갈등하며 '대우 해체'의 골을 키웠다고 보는 이들도 있다.


1999년 11월 2일자 매경 1면. 김우중 대우 회장이 사퇴하고 경영 일선에서 완전히 물러난다는 내용의 기사다.

1년의 3분의 2를 해외에서 보낼 정도로 열정적으로 일에 매달리고, 조선소 노사분규 때는 현장에서 머물며 노동자들의 이해를 구하던 의지의 경영인은 급작스레 닥친 외환위기의 파고를 넘지 못하고 그렇게 역사의 전면에서 허망하게 퇴장하고 말았다.


[최용성 매경닷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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