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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환위기로 몰락한 `세계경영` 신화…김우중은 누구인가
기사입력 2019-12-10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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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9일 오후 11시 50분 수원 아주대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3세.
김우중 전 회장은 약 1년여 간 투병 생활을 하는 가운데, 연명치료는 하지 않겠다는 평소 뜻에 따라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화롭게 영면에 들어갔다.


장례는 가족장으로 치뤄지며 빈소는 아주대병원 장례식장 1호실이다.

영결식은 12일 오전 8시 아주대병원 별관 대강당에서 거행될 예정이다.

장지는 충남 태안군 소재 선영. 유족으로는 미망인 정희자 전 힐튼호텔 회장, 장남 김선협 ㈜아도니스 부회장, 차남 김선용 ㈜벤티지홀딩스 대표, 장녀 김선정 (재)광주비엔날레 대표이사, 사위 김상범 이수그룹 회장 등이 있다.


김 전 회장은 지난해 8월말 베트남 하노이 소재 GYBM(Global Young Business Manager·청년사업가) 양성 교육 현장을 방문하고 귀국한 이후 건강이 안 좋아져 통원 치료를 하는 등 대외활동을 자제해오다 12월말부터 증세가 악화돼 장기 입원에 들어갔다.


김우중 전 회장은 1936년 대구 출생으로, 경기고와 연세대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만 30세인 1967년 대우를 설립한 후 1999년 그룹 해체 직전까지 자산규모 기준으로 현대에 이어 국내 2위의 기업을 일군 대표적인 1세대 기업인이다.

1990년대 세계경영을 기치로 해외시장 개척에 주력해 신흥국 출신 최대의 다국적기업으로 대우를 성장시켰다.

1998년 당시 대우의 수출규모는 186억 달러로, 한국 총 수출액 1323억 달러의 14%에 달했다.


김 전 회장은 1963년 한성실업에 근무하면서 국내 최초로 섬유제품 직수출을 성사시켰다.

창업 후 수출만으로 회사를 초고속으로 성장시켜 샐러리맨들의 우상으로 떠올랐다.

1967년 원단생산업체인 대도섬유의 도재환씨와 손잡고 대우실업을 창업했다.

대우(大宇)는 대도섬유의 대(大)와 김우중의 우(宇)를 따서 만든 것으로 전해졌다.


당시 자본금 500만원으로 출범한 대우실업은 첫해부터 싱가포르에 트리코트 원단과 제품을 수출해 58만 달러 규모의 수출실적을 올린 데 이어 인도네시아, 미국 등지로 시장을 넓혀 큰 성공을 거뒀다.


대우실업은 1968년 수출 성과로 대통령 표창을 받으며 급성장 가도를 달렸다.

1969년 한국 기업 최초로 해외 지사(호주 시드니)를 세웠고, 1975년 한국의 종합상사 시대를 연 이후 김 전 회장이 이끈 대우는 국내 중소기업의 수출창구가 됐다.


1976년 한국기계(대우중공업)와 1978년 새한자동차(대우자동차), 대한조선공사(대우조선해양) 등 부실기업을 인수, 단기간내 경영정상화를 이뤄 한국의 중화학산업화를 선도했다.


같은 시기 에콰도르(1976년)에 이어, 수단(1977년), 리비아(1978년) 등 아프리카 시장진출을 통해 해외사업의 터를 닦았다.

해외영업에서 남다른 수완을 발휘한 김 전 회장은 박정희 정권에서 가장 두드러진 기업인으로 주목받았다.

박 전 대통령이 김 전 회장의 부친이 대구사범 은사라는 것을 알게 된 이후 절친한 사이가 된 것으로 재계에서는 전해진다.


김 전 회장은 1982년 무역·건설부문을 통합해 그룹의 모기업 격인 ㈜대우를 설립해 룹화의 길에 들어섰다.

이후 자동차·중공업·조선·전자·통신·정보시스템·금융·호텔·서비스 등 전 산업의 내실을 갖춰 세계진출을 본격화했다.


1989년에는 에세이집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를 펴내 6개월만에 100만부를 돌파하며 최단기 밀리언셀러 기네스 기록을 달성하기도 했다.

김 전 회장은 자신이 저서에서 강조한 대로 세계경영에 매진했다.

특히 1990년대 동유럽의 몰락을 계기로 폴란드와 헝가리, 루마니아, 우즈베키스탄 등지에서 자동차공장 등을 인수하거나 설립하며 세계경영에 박차를 가했다.


1999년 해체 직전, 대우는 41개 계열사와 600여개의 해외법인·지사망, 국내 10만명, 해외 25만명의 고용인력을 토대로 해외 21개 전략국가에서 현지화 기반을 닦고 있었다.

1998년 당시 자산총액은 76조 7000억원, 매출은 91조원(1998년)에 달했다.

김 회장은 당시 연간 해외 체류기간이 280일을 넘기는 것으로 유명했다.


대우그룹 몰락의 계기는 1997년 11월 닥친 외환위기였다.

당시 정부 경제관료들과 갈등을 빚으면서 붕괴가 빨라졌다.

특히 1998년 3월 전경련 회장을 맡은 김 전 회장은 '수출론'을 집중 부각했지만, 관료들과 갈등은 여전했고 오히려 개혁의 대상으로 내몰리는 상황을 맞았다.


1998년 당시 그룹 구조조정의 최우선 핵심사안으로 꼽혔던 대우차-제너럴모터스(GM) 합작 추진이 흔들렸고, 금융당국의 기업어음 발행한도 제한 조치에 이어 회사채 발행제한 조치까지 내려져 급격한 유동성 위기에 빠졌다.


대우그룹은 1999년 말까지 41개 계열사를 4개 업종, 10개 회사로 줄인다는 내용의 구조조정 방안을 내놨지만, 1999년 8월 모든 계열사가 워크아웃 대상이 되면서 그룹은 끝내 해체됐다.

김 전 회장은 대우그룹 분식회계를 주도한 혐의로 2006년 징역 8년 6월과 벌금 1000만원, 추징금 17조9253억원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2008년 1월 특별사면됐다.


2014년 신장섭 싱가포르국립대 교수가 집필한 대화록 '김우중과의 대화-아직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통해 대우그룹의 해체는 경제관료들의 정치적 판단 오류 때문이라는 '기획 해체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노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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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국 #대우조선해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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