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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헤비메탈 1세대의 전설, 이 산이 무슨 산 `백두산~~!!!`
기사입력 2019-12-07 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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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쿨오브락-134] 1991년 6월은 음악계와 스포츠계를 깜짝 놀라게 한 대형 이벤트가 벌어졌던 달이다.

'아시아의 인어'라 불리며 당시 톱스타 대우를 받았던 수영선수 최윤희 씨가 그룹 백두산에서 헤비메탈을 하던 가수 유현상과 결혼한 것이었다.

이들도 둘 간 결혼이 낳을 일대 파장을 예측하기라도 한 듯 봉선사라는 절에서 아무도 모르는 극비 결혼식을 올렸다.

당시 배영을 주무기로 아시아 무대를 휩쓸었던 최윤희의 인기는 전성기 피겨선수 김연아를 넘어설 정도였다.

만 15세의 나이로 19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3개나 땄다.

4년 뒤 열린 서울 아시안게임에서도 2관왕에 올랐다.

실력과 미모를 갖춘 그는 CF 스타로도 도약하며 1980년대 한국의 자부심을 드높인 한국의 자랑이었다(조오련 이후 오랜만에 나온 수영 스타였다.

예나 지금이나 수영, 달리기를 비롯한 기초 종목에서 한국은 그렇게 실력이 강한 편이 아니다.

게다가 미모까지 갖춘 상황이었으니 대한민국 전체가 최윤희의 팬이었다고 봐도 무방했을 것이다). 그런데 나이차가 무려 12살이나 나는 38세 노총각 유현상이 최윤희를 데려간다는 소식이 나오니 '이 결혼을 인정할 수 없다'는 공분이 대한민국 전체를 뒤흔든 것이다(가족의 반대도 엄청났다고 한다.

둘이 데이트를 하고 유현상이 최윤희를 집에 데려다줬는데, 당시 최윤희의 어머니가 유현상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고 '윤희야 상대가 돼야지' 하고 손을 잡고 집으로 끌고 갔다고 한다).
이 사태 전후로 음악계를 또 쇼크에 빠뜨린 사태는 또 있었다.

'한국형 헤비메탈'의 개척자로 활동하며 그룹 백두산에서 샤우팅을 질러대던 보컬 유현상이 뜬금없이 트로트인 '여자야'를 내놓고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한국록에 대한 자부심이 컸던 일각에서는 유현상을 '변절자'로 몰아붙이며 비난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이후 세월이 흘러흘러 백두산은 해체와 재결성을 반복하며 한국 록음악계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밴드로 기억된다.


백두산이 처한 위치를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1980년대 '부활' '시나위'와 더불어 한국의 3대 인기 록밴드 중 하나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밴드' 형태의 한국록이 오버그라운드에서 불꽃을 태우고 있을 무렵 백두산은 방송프로그램 등에서 활발히 활동하며 상당한 주목을 받았다.

부활이 서정적이었다면 시나위는 묵직했고, 그에 반해 백두산은 날카롭고 시끄러웠다.

가장 헤비메탈에 근접한 사운드를 들려주던 밴드였다.


그룹의 축이었던 유현상은 사실 기타리스트였다.

유명 밴드 '사랑과 평화' 등에서 기타를 잡을 정도였다(속주 테크니션 기타리스트 성격은 아니었지만 매우 실력을 있었다는 뜻이다). 레코드사 기획부장으로 활동하던 그는 마침 한국에도 헤비메탈 열풍이 상륙하자 본인이 직접 멤버들을 모아 '백두산'을 결성한다.

초기 우여곡절을 거쳐 유현상 김도균 김창식 한춘근으로 라인업이 확정된다.

이 당시 김도균은 밴드 유일의 20대 멤버였다(지금 예능에서 소비되는 김도균의 허당 이미지와 이때는 사뭇 달랐다.

장신이었던 그는 굽이 높은 구두에 짝 달라붙는 검은 가죽바지를 입고 어마어마한 속주를 들려주던 카리스마 있는 최정상급 기타리스트였다).
김도균을 제외한 나머지 멤버들은 소위 '생활형 음악인'이라 부를 만했다.

불러주면 어디든 가서 세션을 하고 돈을 벌곤 했다(30대 중반이었으니 밥벌이는 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다보니 이들의 음악에는 당시 유행하던 음악 조류 모든 것이 다 들어 있었다.

그래서 1986년 6월 나온 이들의 데뷔 앨범은 '헤비메탈의 옷을 입은 한국형 가요'라고 불러도 크게 무리가 없었다.

헤비메탈의 외피를 입었으되 기존 가요계 문법을 상당 부분 계승한 것이 많았다.


그래서 진정한 백두산의 역작은 다음해 나온 2집이라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두 번째 앨범 'King Of Rock'N Roll'의 헤비메탈로 시작해 헤비메탈로 끝난 앨범이었다.

한 곡을 제외하고 가사도 모두 영어로 붙였다.

그런데도 헤비메탈 인기 파도를 타고 500회 넘는 순회공연을 가졌을 정도였다.

이 당시 유현상은 백두산의 '전매특허'로 불릴 만한 '가성 샤우팅'을 본격 탑재한다.

아직까지도 회자되는 'Up In The Sky' 'The Moon On The Baekdoo Mountain' 등의 노래가 담겨 있다.

여기서 보여주는 유현상의 보컬은 마치 주다스 프리스트의 전설 롭 해퍼드를 연상시킨다.

본인이 가진 음역대의 한 옥타브 이상을 올려버리는 괴성을 곡 내내 발산한다.

당연히 가성 샤우팅이었지만 나름의 공명을 잘 이용해 '알맹이'가 있는 듯 단단하게 느껴진다(보컬로서의 유현상 스토리는 후배 신해철과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유현상과 신해철 모두 기타리스트를 꿈꾸던 기타 키드였다.

보컬을 하는 게 목표는 아니었는데 어쩌다보니 마이크를 잡게 된 스토리도 비슷하다.

그리고 본인이 가진 음악을 폭을 넓히기 위해 치열한 노력을 위해 '두성 가성'을 익힌 것도 꼭 닮았다).
하지만 백두산의 전성기는 짧았다.

이후 이내 부활의 리더 김태원이 대마초 사건에 연루돼 매스컴을 타면서 흉흉한 분위기를 등에 업은 록음악계는 급속히 위축된다.

백두산 역시 해체의 길을 걷게 되고 유현상은 트로트 가수로 전향한다.

김도균은 임재범과의 컬래버레이션 앨범 개념인 밴드 '아시아나'를 조직해 활동하고, 그가 리드보컬을 맡은 백두산 후속 앨범을 내기도 한다(두 앨범 모두 역사적 의미가 있다.

아시아나의 앨범은 전성기 '글로벌 넘버원' 수준이었던 임재범의 절창을 감상할 수 있는 앨범이다.

김도균이 리드보컬을 맡은 백두산 앨범에 담긴 '사랑할거야' 등의 곡에서는 생각보다 꽤 훌륭한 김도균의 목소리를 감상할 수 있다).
이후 백두산은 2008년 재결성에 들어선다.

유현상의 고향인 동두천에서 열린 록 페스티벌에 참가해 올드팬들의 함성을 이끌어냈다.

2009년에는 네 번째 앨범, 2011년에는 다섯 번째 앨범을 각각 낸다(이러는 와중에도 유현상은 여러 프로그램에서 '여자야' '갈테면 가라지' 등의 본인 히트곡을 부르곤 했다.

무대마다 전혀 다른 퍼포먼스를 선보이는 유현상의 변신도 재밌게 감상할 수 있는 대목이다).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는 유현상은 여러 가지로 본받을 만한 가수다.

특히 '노익장'을 발휘하는 그의 목소리는 경탄의 대상이다.

사람의 성대는 나이가 먹을수록 두꺼워진다.

한때 초강력 하이톤 음역을 내뿜던 보컬도 나이가 들면 본인 곡을 원키로 소화하지 못한다.

하지만 유현상의 가성 샤우팅은 여전히 짱짱하고 날카롭다.

그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스스로를 얼마나 단련하고 가꿔왔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백두산에 대해 잘 몰랐던 10대 청소년들은 'Up In The Sky' 'The Moon On The Baekdoo Mountain' 등의 곡을 들으면 한국 헤비메탈 1세대의 에너지와 파워를 온몸으로 체감할 수 있을 것이다.


[홍장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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