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내 출생자라면 누구든지 시민권을 부여받는 '출생시민권'을 금지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행정명령이 일부 지역에서는 일단 시행된다.

미 연방대법원이 대통령 행정명령의 효력 중단 가처분 적용 범위를 전국으로 확대할 권한이 하급심에 없다고 결정하면서다.


지난 27일(현지시간) 미 연방대법원은 트럼프 대통령의 출생시민권 금지 행정명령과 관련한 사건에서 연방지방법원이 발동하는 효력 중단 가처분(Injunction)의 효력 범위는 해당 법원의 관할로만 제한돼야 한다고 결정했다.

행정명령 효력을 미국 전역에서 정지시키는 전국적 효력 중단 가처분(Nationwide Injunction) 결정을 내릴 권한이 하급심에 없다는 취지다.

이번 결정에는 대법관 9명 중 보수 성향 법관 6명이 찬성했고 진보 성향 3명은 반대했다.


보수 성향인 에이미 코니 배럿 대법관은 다수의견에서 "행정부가 법을 따라야 한다는 점은 아무도 부인하지 않는다"면서 "하지만 사법부가 그 의무를 강제할 무한한 권한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다"고 판시했다.

이에 따라 이미 법원에 소송을 제기해 효력 중단 가처분 결정을 얻어낸 캘리포니아, 뉴욕, 뉴저지, 미시간, 애리조나, 노스캐롤라이나 등 22개 주(州)와 워싱턴 DC에서는 출생시민권제가 유지된다.

텍사스, 플로리다, 펜실베이니아, 조지아, 오하이오 등 나머지 28개 주에는 출생시민권을 금지하는 행정명령이 일단 적용된다.

행정명령 시행 시점은 연방대법원 판결일로부터 30일 이후다.


앞서 트럼프 대통령은 올해 1월 취임한 직후 미국에 불법으로 체류하거나 영주권이 없는 외국인 부모 밑에서 태어난 자녀에게 출생시민권 부여를 금지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이를 두고 미국에서 태어나면 누구든 시민권을 부여한다는 수정헌법 14조에 위배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민주당 소속 주지사가 이끄는 22개 주와 워싱턴DC는 이 같은 취지로 위헌 소송을 제기했다.

일부 하급심 법원에서는 대통령 행정명령의 전국적 효력 중단 가처분 결정을 내린 바 있다.

그러자 트럼프 행정부는 하급심 법원의 결정으로 연방정부의 정책이 전국적으로 제한되는 것은 과도하다는 취지로 연방대법원에 심리를 요청하며 맞대응했다.


이날 연방대법원의 결정으로 미국 전역에서 출생시민권 적용 여부를 둘러싼 혼란은 불가피할 것으로 전망된다.

출생 시 시민권 적용 여부가 어느 주에서 태어났느냐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출생시민권 금지 행정명령의 위헌 여부가 아직 가려지지 않았다는 점도 변수다.

연방대법원이 아직 행정명령의 위헌 여부를 판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단 행정명령을 적용받아 시민권을 받지 못한 출생자의 경우 문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나중에 대법원의 위헌 결정으로 행정명령이 폐기된다면 이들은 추후 복잡한 권리 구제 절차를 밟아야 할 수도 있다.


소수자 우대 정책을 지지하는 중국계 시민단체 CAA의 애니 리 정책국장은 "태어난 위치가 그 사람의 인생을 결정하는 건 불공평하다"며 "대법원이 나중에 행정명령을 위헌이라고 판단한다면 그사이 태어난 아이들은 어떻게 되는 건가"라고 비판했다.


한편 연방대법원의 이날 결정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정치적 승리를 안겨줬다는 분석도 나왔다.

사법부가 소송과 무관한 제3자에게도 적용되는 전국적 효력 중단 가처분으로 행정부의 급진적 정책에 제동을 걸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조너선 밀러 공공권리프로젝트(PRP) 정책 책임자는 "이번 판결을 트럼프 행정부가 사법부의 제약에 덜 신경 쓰고, 더 과감히 정책을 추진해도 된다는 신호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크다"고 밝혔다.


[최현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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