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집자주 = 매일경제TV 프리미엄 콘텐츠 플랫폼 'CEO인사이트' 7호에서는 인터뷰 프로그램 <이야기를 담다>의 제작진과 출연진이 직접 나서 촬영 후일담을 공개한 내용이 담겼습니다. 나태주 시인은 "그 날의 인터뷰는 그런 의미에서 제게도 특별하고 소중한 순간으로 남아있다"며 "유쾌함은 어쩌면 순간적으로 찾아오는 감정이 아니라, 서로의 마음이 열리고 이해가 쌓일 때 비로소 만들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말했습니다.
<이야기를 담다> 비하인드는 김원경 PD('김 피디의 비하인드 컷')와 아나운서 이담('이담의 뒷담; 뒷이야기를 담다'), 김수진 작가('김 작가의 크레딧 쿠키') 등 제작진과 출연들이 각자의 시선에서 바라본 촬영장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이야기를 담다> 비하인드는 'CEO인사이트' 를 통해 격주 단위로 공개됩니다.<이야기를 담다>는 매주 목요일 저녁 6시 30분에 매일경제TV와 유튜브를 통해 만나볼 수 있습니다.
다음은 <이야기를 담다> 비하인드 나태주 시인 편 전문.
◇ 김 작가의 크레딧 쿠키
# 나태주가 사랑할 때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는 2021년 개봉한 노르웨이 감독 요아킴 트리에르의 로맨틱 코미디 영화다.
하지만, 시인 나태주는 그 반대다. 사랑할 때 나태주는 최고가 된다.
그런데, 그 사랑은 지독하게 외롭고 서글프도록 일방적이어야 한다. 애달픈 짝사랑이어야 한다.
"마음을 뺏겨요. 그리고 그 뺏긴 마음이 안 돌아와요. 지금 내가 80세인데도 마음이 훅 갈 때가 있어요. 그리고 안 와요, 마음이 저쪽으로 가서 돌아오질 않아요. 그래서 애달프지요. 그게요 살아가는 그 힘을 줘요."
살다 보면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내가 가야할 방향이 어딘지, 촉수를 잃어 방향감각을 잃은 나비처럼 한 방향으로만 빙빙 돌다가 존재감 자체를 잃어버리는 순간이 온다.
그런 깊은 수렁에서 빠져나오려면 또 다른 수렁에 빠져야만 한다. 그것이 바로 사랑이다.
"마음을 뺏기면요. 한 4~5년 동안 안 돌아와요. 그래서 굉장히 괴로워요."
4년에서 5년, 그렇게 오래도록 방황이 필요한 이유를 나태주 시인은 이렇게 설명했나보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 책이 싫은 시인
공주 특산물, 밤 포대라도 이고 오셨는 줄 알았다.
몸체만한 검은 배낭을 메고 그 먼 공주에서 서울 충무로까지 거슬러 오셨다.
세월을 이고 지고 살다보니 숙어진 어깨.그 어깨에 둘러맨 검은 배낭이 영 거슬렸다.
나태주 시인 몸체만 한 그 검은 배낭에서 그를 구해내고 싶었다.
"선생님 제가 들게요." "아니에요. 내가 들 수 있어요."
"선생님 제가 맡아둘게요." "아니에요. 안 무거워요."
수 차례의 배낭 실랑이 끝에도 절대 내게 내어주지 않은 그 것 속엔 뭐가 들어있을까?
"책이에요. 좀 두꺼워요."
책? 인터뷰에선 분명 책이 싫다고 했다.
"나는 소설책을 잘 못 읽습니다. 활자가 많아서요. 근데 이번에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를 읽었어요. 아주 아주 힘들게 읽었어요. 거의 다 읽었을 때가 밤이었는데 막 울었어요. 흐느껴 울었어요."
책이 싫은 게 아니라 그 책에 담긴 아픔이 싫었으리라….
그 큰 배낭을 다시 이고 떠나는 그를 점이 되어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았다.
상대를 배려하고 아픔에 공감하는 나태주 시인.
그래서 그의 시어 하나하나는 마음이 데일만큼 뜨겁다.
◇ 이담의 뒷담; 뒷이야기를 담다
나태주의 글을 읽으며 국어사전에 몇 단어를 검색했다.
어렵지 않은 단어인데, 사전을 두들길 때면 아나운서로서 괜한 수치심도 동반된다.
'문맥상 뜻은 이러이러할 것 같은데…정확한 의미가 뭘까?'하고 찾아본 단어들이 있다.
그러고 보면 방송에서 쓰는 단어는 한정적이다.
방송은 마치 동시통역처럼, 상대방이 내 말을 듣는 즉시 이해해야 성공이다.
그래서 더 풀어서 이야기하고, 어렵거나 잘 쓰이지 않는 단어는 피하려 한다.
글은 다르다.
내가 표현하고 싶은 내용, 상황, 느낌에 딱 알맞는 단어를 써도 된다.
완벽한 단어를 찾기 위해서 무려 나태주 시인도 몇 날 며칠을 끙끙댔다고 전해진다.
시를 읽다 잘 몰라서 찾아보면, 지역 방언인 경우도 있었다.
시적 허용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그만큼 글은 마음껏 표현할 수 있다.
하기는 정 이해가 안되면 잠시 책을 덮어놓고 사전을 찾아보면 되는 거 아닌가.('하기는'은 나태주 시인이 자주 쓰는 단어라 써보고 싶었다.)
#뭉근한 담백함
유명한 음식점들에선, 정말 듣도보도 못한 재료로 화려하게 음식을 내어놓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자주 보던 재료로 멋부리지도 않았는데 말도 안되게 완벽한 음식이 나오는 곳도 있다.
단순해보이지만 절대 아무나 할 수 없는 요리. 그런 요리 같았다.
그의 글 역시 담백했다. 그리고 뭉근했다.
#각자의 시
지난해 아빠가 퇴임했다.
퇴임 전시회 제목은 '우둔한 출발'.
전시회 책자에는 나태주의 '세상 속으로' 시의 일부가 적혀 있었다.
'이러다가 언젠가는 아주 시동이 안 걸릴 때가 올 것이다. 그래도 그때까지는 열심히 살아야지. 오래 묵은 자동차로 끌고 가듯 세상 속으로 들어간다.'
나태주의 시를 통해 아빠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나태주의 시이지만, 아빠의 시이기도 했다.
가장 사랑하는 시를 물으면 '풀꽃'을 꼽는 경우가 많다.
나태주의 시이지만, 그 시를 읽는 사람들에겐 '나의 시'가 돼있다.
나 또한 나태주의 풀꽃을 읽고 풀꽃이 달리 보였다.
세상을 어떻게 그렇게 예쁘게 보시냐고 물으니, 안 예뻐서 예쁘게 보라고 쓴 것이라고 하셨다.
"세상이 아름다우면 뭐하러 아름답다고 써요. 아름답지 않으니까 아름다우라고 아름답게 보라고 쓰는 거지."
참 솔직담백하시다.
나태주의 '세상 속으로'를 읽고 삶을 생각했다.
나태주의 시장길을 읽고 시장을 걷고 싶기도 했다.
#풀꽃같은 손
인터뷰를 마치고 함께 사진을 찍는데, 선생님께서 손을 꼭 잡아주셨다.
두텁고 따뜻한데, 어딘가 거친 손이었다.
펜을 잡고 수많은 시를 쓴 손이다.
글을 너무 많이 써서 그런지 손가락 여기저기가 아프다고 하셨지만, 왠지 모를 힘이 느껴졌다.
풀꽃같은 손이었다.
◇ 김피디의 비하인드 컷
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 나태주 시인과 같은 나이셨을 게다.
이틀 전부터 가슴 한켠이 설레었다.
꼭 어릴 적 돌아가신 아부지를기다리는 것 마냥 나태주 시인에겐 그런 아련함과 애틋함이 있다.
그의 시들이 늘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기다리는 마음을 담아서일까?
여행을 갈 땐 가벼운 책 한 권을 가방에 넣곤 한다.
짧지만 깊은 생각과 여운을 남기는 시집이면 더 좋다.
여행은 모든 감각을 열어놓는 시간이기에 더더욱 시가 평소와는 다르게 읽히기 때문에.
여행 중에 만난 사람에게 선물하기도 부담스럽지 않은, 건넸을 때 씨익 웃게 했던 나태주 시인의 책을 자주 담았었다.
'꽃을 보듯 너를 본다'는 내게 그런 책이었다.
책을 받아본 사람들은 "참 결이 너하고 비슷하다"고 말하곤 했다.
그 나태주 선생님을 만난다.
책 열 권을 샀다.
방송 스텝들과 친한 지인들에게 선물할 책에 그 긴 시를 한 자 한 자 적고 사인을 남긴다.
어찌 이렇게 정성스러울 수가 있지, 책을 너무 많이 산 거 같아 죄송스럽기까지 하다.
이제 알 것 같다.
왜 그의 시가 이토록 많은 이들의 마음을 울리는지.
시인의 손끝에서 피어나는 글자마다 사람을 향한 따뜻한 시선이 담겨있다.
그것은 마치 오래전 잃어버린 아버지 사랑처럼 깊고 그리운 것이다.
감사할 따름이다.
#아부지같은#아련함#애틋함#짝사랑#기다림#그리움#감사#설레였던 나태주 선생님의 편집되서 방송에선 볼 수 없었던 비하인드 스토리를 들여다보자.
# "잘 있노라니 그것만 고마웠다."
이담 : 좀 아프신 적도 있으셨잖아요. 투병 생활도 하셨고.
나태주 : 62세 때 교직 정년퇴직하던 해 내가 몸으로 사고를 쳤어요. 몸으로 죽을병 걸렸다 그 소리야. 쓸개가 완전히 터져서 도저히 못 산다 그런 지경에까지 갔다 살았는데 이 사는 것이 참 고맙다고 생각해요. 그런 삶을 살아서 나는 그 아팠던 것이 아주 악운이었지만 나았으므로 그것이 행운으로 바뀌었어요.
이담 :지금은 건강하신 거죠?
나태주: 아직도 건강하지 않은데 아마도 계속 건강하지 않을 거예요. 그래도 나는 생각해요. 이 나마도, 지금이라도, 이 만큼이라도, 이런 데 대한 다행한 마음, 이것이 나를 유지해요. '겨우 이만큼, 겨우 이렇게' 하지 않고 '아직도 이만큼' 이렇게 바꾸지요. 이만큼이, 그래서 나에게는 그 이만큼이 많은 축복을 줍니다.
이담 : 선생님의 '안부'란 시 중에 '잘 있노라니 그것만 고마웠다'가 생각납니다.
건강하진 않지만 이나마도 감사한 그의 마음
그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길 바라는 마음.
작지만 소중한 이만큼의 행복을 느끼게 하는 그의 말이다.
삶의 작은 것들에 대한 감사는 우리를 지탱하는 힘이 된다.
그는 "겨우 이만큼, 겨우 이렇게"라는 마음으로 일상의 소중함을 일깨워준다.
아픔을 겪고 나서야 비로소 깨달은 삶의 의미는, 우리에게도 큰 위로가 된다.
"잘 있노라니 그것만 고마웠다."
이 한 줄로 충분하다.
오늘 만난 나태주 시인의 모습 그대로였으니까.
◇ 이야기를 담다, 그 후
#우리의 삶이 유쾌하지 않을 지라도
처음<이야기를 담다>에 참여할 때만 해도 평소의 인터뷰처럼 진행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질문에 답하고, 정해진 형식에 따라 이야기를 나누는 익숙한 흐름이 이어질 것이라고 예상했죠.
그런데 막상 촬영이 시작되자, 예상과는 조금 다른 분위기가 펼쳐졌어요.
사실 우리의 삶은 유쾌하지 않을 때가 더 많습니다.
우울하고 짜증나고, 때로는 화가 나기도 하죠.
하지만<이야기를 담다>를 촬영하는 그날만큼은 그런 일상의 무거움이 가볍게 덜어지고, 그 속에서 유쾌함을 발견하게 해주었습니다.
촬영 내내 화기애애하고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고, 끝난 후에도 그 따뜻함과 여운이 오래 남았습니다.
어쩌면 그 날의 유쾌함은 모두가 함께 노력하고, 서로의 진심이 맞닿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동안 많은 진행자들을 만나왔지만, 이담 아나운서는 그중에서도 특별히 기억에 남습니다.
프로그램에 대한 이해도가 깊었고, 주제에 대한 지식과 생각이 매우 해박했어요.
단순히 질문을 던지기만 하는 인터뷰가 아니라, 깊이 있는 이해를 바탕으로 대화를 이끌어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유쾌함은 어쩌면 순간적으로 찾아오는 감정이 아니라, 서로의 마음이 열리고 이해가 쌓일 때 비로소 만들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날의 인터뷰는 그런 의미에서 제게도 특별하고 소중한 순간으로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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