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즈니스 리더 ◆
|
정은보 한국거래소 이사장이 지난 11일 한국거래소 서울사옥에서 국내 증시 현안과 밸류업 프로그램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이충우 기자 |
1400만명에 달하는 개인투자자가 혼란에 휩싸였다.
이미 투자자 해외 이탈 현상이 계속되는 추세였는데, 최근 정치적 상황까지 급변하자 외국인 투자금마저 대거 빠져나가 어느 때보다 위기감이 커졌다.
지난 11일 국내 유가증권·코스닥 시장 운영을 총괄하는 한국거래소의 정은보 이사장을 만나 대한민국 자본시장의 현재를 진단하고, 미래를 짚어봤다.
급박하게 흘러가는 주식시장의 수급 관리 임무를 맡은 그는 이날도 일본 증권거래소 이사장을 만나 한국 상황을 설명하고 오는 길이었다.
정부와 금융당국이 올해 초부터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해소하고 한국 주식시장의 가치를 높이려고 추진했던 '밸류업 프로그램'도 힘이 빠지는 것 같아서 물어봤다.
하지만 정 이사장은 "2024년은 대한민국 주주 친화적 경영의 원년"이라며 "적잖은 상장사가 자사주를 소각하고 투자자 정보 제공을 위해 노력하는 등 올해 상당한 진전이 있었다고 생각한다"고 나름 의미를 부여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한국 증시가 박스권을 못 빠져나오고 있다.
밸류업을 어떻게 평가하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밸류업은 올해 상당한 진척을 이뤘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박스권 장세에 갇혀 있는 것은 전반적인 산업 경쟁력의 불투명성 때문이다.
주가는 기업의 경영활동에서 기대되는 미래 현금흐름의 현재 가치인데, 개별 기업이 얼마나 투자를 잘하고 혁신을 통해 성장 잠재력을 키워갈 수 있느냐는 전적으로 개별 기업의 역량에 달려 있다.
―주가가 이러면 별 효과가 없었다는 것 아닌가.
▷밸류업이란 기업의 향후 성장 잠재력이 아닌 현재 가치를 계산했을 때 주가가 이에 미치지 못하는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해결하기 위해 도입된 것이다.
많은 기업의 내재적 가치를 투자자가 정확히 알기 어렵기 때문에 이러한 정보의 비대칭성 문제를 해소해서 저평가 상태를 벗어나자는 게 밸류업의 기본적인 취지다.
따라서 단순히 주가가 올라간다고 해서 밸류업이 성공하는 것도 아니고, 반대로 주가가 내려간다고 해서 밸류업이 실패한 것도 아니다.
일반적인 주가의 상승 여부를 밸류업의 성공 잣대로 삼을 수는 없다.
―한국 산업 경쟁력이 어떤 점에서 불투명한가.
▷중국을 비롯한 신
흥국의 추격을 따돌리려면 한국도 선진국처럼 지식 기반 산업을 육성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있다.
2024년 대한민국의 산업 경쟁력은 미국의 1970~1980년대, 일본의 2000~2010년 과정에 정확하게 와 있다.
―한국은 일본의 길을 걷는 건가.
▷미국은 20세기 후반 일본이 부상하는 과정에서 제조업 경쟁력이 급속히 쇠퇴했다.
하지만 레이거노믹스와 뼈를 깎는 구조조정을 통해 지식 기반 산업이 발전했다.
그 결과 마이크로소프트·애플·테슬라·엔비디아 같은 기업이 나타났다.
반면에 제조업을 통해 전 세계 1등 국가로 도약한 일본은 1990년대 버블경제가 붕괴하면서 지식 기반 산업 육성에 실패했다.
현재 우리나라는 미국처럼 개혁에 성공하느냐, 일본처럼 실패하느냐의 갈림길에 서 있다.
이미 포스코는 중국 제철회사의 경쟁력에 밀려 선재공장 가동을 중단했다.
한국 정보기술(IT) 산업의 핵심인
삼성전자가 이제는 일본 소니처럼 되지 않을까 하는 의심을 받고 있고, 2010년대 이후 새로이 부상한 2차전지 산업도 중국에 추격당하는 실정이다.
이처럼 한국 증시가 박스권 장세에 갇혀 있는 것은 제조업 기반의 우리나라 기업이 성장 잠재력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규 상장은 많고, 퇴출은 적다.
▷금융당국과 소통을 통해 상장 절차를 엄격히 하고, 부실기업의 상장폐지도 더욱 빠르게 이뤄지도록 관련 절차를 개선할 예정이다.
특히 상장폐지는 코스닥시장의 절차를 기존 3심제에서 2심제로 바꾸는 등 절차 개선을 내년 초까지 완료할 계획이다.
상장과 관련한 기업들 인식도 변할 필요가 있다.
간혹 상장을 일종의 엑시트(투자 회수) 수단으로 생각하는 경영진이 있는데, 이는 잘못된 인식이다.
상장은 기업의 성장을 위해 새로운 주주로부터 대규모 자금을 조달하고, 그 과실을 나눠주는 것이다.
―해외 증시로 투자자가 떠나고, 기업도 떠나고 있다.
▷사실 성장하는 기업이 많은 곳에 투자금이 몰리는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20세기 미국과 일본에서도 기업의 성장 잠재력이 녹록지 않을 때 해외로 많은 투자가 빠져나갔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국내 기업이 해외에 상장하면 반드시 성공한다고 단언하기 어렵다.
지금까지 해외에 상장한 국내 기업의 절반 이상이 이미 상장폐지됐고, 최근 상장한 곳도 주가가 하락한 상태다.
투자자들을 다시 한국 증시로 돌아오게 하려면 정부가 한국의 전략산업에 대한 지원을 강화해야 한다.
가령 미국은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을 시행해 자국 내 산업을 육성하고 있는데, 이에
삼성전자·현대자동차가 미국 내 생산시설을 만들고 있지 않나.
―탄핵 정국 여파로 우려가 많다.
▷경제의 내부적 요인이 아닌 외적 요인에 의한 위기는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
물론 정치적 불확실성으로 인해 내수가 다소 위축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업의 근원적인 경쟁력이 약화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크게 우려하지 않아도 된다.
정부와 금융당국에서도 최근 증시안정자금을 동원할 계획임을 발표한 바 있고, 해외 투자자를 끌어당기기 위한 노력도 계속되고 있다.
내년에는 야간시장도 개설해 외국인 자금이 유입되기 좋은 환경을 만들 예정이다.
[김대은 기자 정리]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