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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하나 까딱하지 않은 연주로...현대음악 신화가된 존 케이지
기사입력 2020-10-30 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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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예술가의 사회-62] 존 케이지 (작곡가, 1912~1992)

◆ 현대 음악사를 뒤흔든 4분 33초
1952년 8월 29일 미국 뉴욕주 우드스톡의 숲속 공연장. 무대 위에는 피아노 한 대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공연을 기획한 작곡가는 전위 음악가로 유명했다.

관중들은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공연을 기다렸다.

'어떤 충격적인 무대가 펼쳐져도 놀라지 않으리라!' 점잖은 연미복 차림 연주자가 무대에 올라왔다.

연주자가 피아노 앞에 앉았다.

그리고 가만히 있었다.

정적이 이어졌다.

관중들은 '곧 뭐라도 하겠지'라고 생각하며 기다렸다.

하지만 연주자는 계속 가만히 있었다.

사람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4분 33초가 흘렀다.

연주자는 아무 연주도 하지 않고 무대에서 내려왔다.

그렇게 공연은 끝났다.


관객은 알 수 없었겠지만 '4분 33초'는 3악장으로 이뤄져 있었다.

악장에는 어떤 음표도 들어 있지 않다.

악장마다 '침묵'이라는 단어만 적혀 있었다.

연주자는 악보에 충실히 침묵을 유지했을 뿐이다.

하지만 관중은 분명히 무언가를 듣긴 들었다.

1악장은 33초였다.

1악장이 진행되는 동안 공연장 바깥에서 바람이 불었다.

바람에 나무들이 나부끼는 소리가 공연장 안으로 슬며시 들어왔다.

2악장은 2분 40초였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모두가 숨죽이고 있었지만, 공연장엔 비가 지붕을 때리는 소리가 은은히 퍼졌다.

3악장은 1분 30초 동안 이어졌다.

이 시간엔 당황한 관중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실내에 퍼졌다.


작곡가의 의도는 명확했다.

그는 4분 33초 동안 이곳에서 발생한 바람 소리, 빗소리, 관중의 수군거림을 음악으로 여겼다.

물론 작곡가도 공연 중 어떤 소리가 탄생할지는 몰랐다.

우연에 맡겼다.

불확실성이 빚어내는 소리가 공연의 핵심이었다.

연주 없는 연주 '4분 33초'가 일으킨 파장은 컸다.

마르셀 뒤샹이 전시장에 변기를 가져다 놓고 "이것도 예술"이라고 주장하며 현대미술 개념을 바꾼 사건과 비교될 정도다.

현대음악 틀을 뒤집어버린 존 케이지의 신화는 그렇게 시작됐다.



◆ 쇤베르크의 제자가 되다
존 케이지의 대표작 `4분 33초` 악보. 악보 안에는 아무 음표도 들어 있지 않다.

/사진 제공=존 케이지 재단

아널드 쇤베르크는 클래식 음악 애호가 사이에서도 어렵기로 유명하다.

'음악이 꼭 아름다울 필요가 있을까'라는 의문을 품은 작곡가 쇤베르크는 무조음악을 창조했다.

무조음악은 조성이 없는 음악이다.

그래서 쇤베르크 음악은 불안하고 난해하다.

불협화음처럼 들린다.

미술로 치면 이해할 엄두도 못낼 추상화다.

쇤베르크 음악이 초연했을 때 청중은 귀신이라도 본 듯 황급히 공연장을 빠져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오늘날 쇤베르크는 고전 음악에 자유를 선사한 예술가로 평가받는다.

장조, 단조처럼 수백 년 동안 서양 음악을 지배한 규칙을 부수며 새로운 길을 열었기 때문이다.

케이지는 쇤베르크 제자였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극단적인 음악을 선보이는 스승을 두고도 반역을 꿈꿨다.

케이지 눈에는 쇤베르크도 구식이었다.


케이지는 1912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났다.

케이지는 초등학교 시절 피아노 레슨을 받으며 음악을 접했다.

피아노 연주에 재미를 느꼈지만, 음악가가 되고 싶다고 마음먹을 정도는 아니었다.

케이지를 사로잡은 건 문학이었다.

책에 푹 빠져 지낸 소년은 작가라는 꿈을 품는다.

대학에 가서도 문학을 전공했다.

하지만 곧 염증을 느꼈다.

학생들에게 똑같은 책을 읽도록 강요하는 교육은 쓸모없다고 여겼다.

미련 없이 대학을 자퇴했다.

평생 규칙을 깨부수며 새 영토를 개척한 예술가의 첫 반란은 그렇게 시작됐다.


대학을 자퇴한 케이지는 부모를 설득해 홀로 유럽 여행길에 올랐다.

아직 스무 살도 안 된 나이였다.

유럽 고딕 건축에 푹 빠진 케이지는 한동안 건축 공부에 매달렸다.

건축 외에도 시, 그림, 음악 등 다양한 분야를 조금씩 건드리며 경험을 쌓았다.

1년 이상을 유럽에 머물고 1931년 미국으로 돌아왔다.

케이지는 유럽에서 보고 배운 예술 지식을 이용해 소규모 강의를 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동시에 그림, 글쓰기, 작곡 등 다양한 분야를 넘나들며 습작했다.

명확히 어떤 예술을 해야겠다는 계획은 없었다.

그나마 습작 결과물 가운데 작곡이 가장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래서 케이지는 음악에 전념하기로 했다.



◆ "저는 온 힘을 다해 내 머리로 벽을 칠 것입니다"
존 케이지는 피아노 줄에 이물질을 부착해 피아노 음높이를 불안정하게 변화시켰다.

불확실성 자체를 음악의 요소로 받아들인 존 케이지는 전위 음악가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사진 제공=존 케이지 재단

음악 이론 기본이 부실했던 케이지에게는 스승이 필요했다.

당시 캘리포니아에는 유럽에서 건너온 작곡가가 있었다.

이 작곡가는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독일 음악계에서 쫓겨나 미국으로 망명 온 상태였다.

그는 쇤베르크였다.

케이지는 쇤베르크를 찾아가 제자로 받아달라고 한다.

쇤베르크에게 교육받으려면 꽤 큰 비용을 지불해야 했다.

케이지에겐 그럴 만한 돈이 없었다.

쇤베르크는 물었다.

"삶을 통째로 음악에 바칠 각오가 됐는가." 당연히 케이지는 그러겠다고 답했다.

쇤베르크는 케이지에게 무료로 음악을 가르치기로 했다.


쇤베르크의 무조음악은 비록 불협화음처럼 들리지만 아무렇게나 만들어진 결과물이 아니다.

쇤베르크는 조성을 완벽한 방식으로 파괴한 음악가다.

객관식 시험에서 100% 확률로 0점을 받으려면 모든 정답을 알고 일부러 정답을 피해야 하는 법이다.

완벽한 불협화음을 만들기 위해 쇤베르크는 음악을 수학적으로 계산하고 또 계산했다.

쇤베르크는 당연히 음악 이론 대가였다.

케이지는 스승에게 화성학, 대위법과 같은 전통 작곡 이론을 배웠다.

하지만 케이지는 이론 공부에 흥미를 못 붙였다.

갑갑함을 느꼈다.

케이지의 실력은 그다지 늘지 않았다.

쇤베르크는 제자에게 "작곡을 하려면 화성학에 재능이 있어야 하네"라고 말했다.

케이지는 대답했다.

"저는 화성학에 재능이 없습니다.

" 그러자 스승은 "자네는 항상 장애물을 만날 것이며, 통과할 수 없는 벽을 마주할 것이네"라고 말했다.

사실상 음악을 그만두라는 말이었다.

케이지는 말대꾸했다.

"그렇다면 저는 온 힘을 다해 머리로 그 벽을 칠 것입니다.

" 물론, 케이지는 쇤베르크를 존경했다.

다른 방식으로 피아노에 접근한 스승의 실험 정신을 본받았다.

다만 케이지는 스승보다 더 낯선 곳으로 나아가고 싶어 했다.

2년 만에 쇤베르크 곁을 떠났다.


돈벌이가 필요했던 케이지는 캘리포니아대 무용과의 피아노 반주자로 일했다.

무용 무대를 위한 음악을 작곡하며 차근히 경력을 쌓았다.

케이지는 어느 날 난관에 부딪혔다.

무대 위에 피아노와 타악기들을 배치해야 했다.

무대 크기가 비좁았다.

타악기를 놓을 공간이 없었다.

케이지 머릿속에 무언가가 떠올랐다.

'피아노 내부에 물체를 삽입하면 어떤 소리가 날까?' 케이지는 피아노 줄에 못, 볼트, 너트를 부착했다.

그 상태로 피아노를 연주했다.

피아노 줄에 장착된 이물질 때문에 음정은 불안정해졌다.

이따금 쿵쾅거리는 소리도 들렸다.

피아노는 한순간 음높이가 불안정한 타악기로 변신했다.

케이지가 개발한 이 악기는 '준비된 피아노(Prepared Piano)'로 불렸다.


음악계의 반응은 갈렸다.

누군가는 '준비된 피아노'를 말도 안 되는 장난으로 치부했다.

하지만 케이지의 실험을 놀라운 눈으로 바라본 사람도 적지 않았다.

피아노라는 악기를 이런 방식으로 다룬다는 개념 자체가 도발적이었다.

케이지는 음높이가 확실하게 정해진 악기에 불확실성을 더했다.

불확실성을 연주한다는 행위가 하나의 예술로 받아들여졌다.

케이지는 전위 예술가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2차 대전이 터지면서 유럽 예술가들이 미국으로 건너왔다.

뉴욕은 파리를 제치고 예술 중심지가 됐다.

케이지는 뉴욕에 가서 쟁쟁한 예술가들을 만났다.

뒤샹, 몬드리안, 잭슨 폴록, 막스 에른스트와 교류한 케이지는 어느새 미국 대표 아방가르드 음악가가 됐다.



◆ '4분 33초'에 담긴 철학

동양 철학에 심취했던 존 케이지(왼쪽)는 `만물은 변화한다`는 불교 메시지를 음악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사진 제공=존 케이지 재단

'준비된 피아노'와 함께 케이지의 인생을 바꾼 건 동양 철학이다.

케이지는 대학에서 불교 강의를 들었다.

마음속에서 조용한 혁명이 일어났다.

케이지는 '만물은 끊임없이 변한다'는 불교 진리를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인도 종교와 중국 주역에도 푹 빠졌다.

동양 철학을 깊게 공부하면서 케이지가 내린 결론은 이렇다.

'세상에 정해진 건 없다.

우리 삶은 주사위 놀이처럼 불확실성으로 가득하다.

'
동양 철학에 심취한 케이지는 1951년 묘한 경험을 한다.

케이지는 하버드대 녹음실을 찾았다.

그곳은 외부로부터 모든 소음이 차단되도록 설계된 방이었다.

케이지는 그 안에 가만히 서 있었다.

어떤 소리가 들렸다.

자신의 몸속 신경계가 돌아가는 소리였다.

혈관을 타고 움직이는 혈액 소리도 들렸다.

완벽한 침묵의 공간 속에서도 케이지는 무한한 소리를 들었다.

그 순간 열반 상태에 접어든 불교 수행자처럼 온몸으로 전율을 느꼈다.

그는 세상은 끊임없이 움직이며, 완벽한 침묵이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 발견을 음악으로 표현했다.


'4분 33초'는 그렇게 탄생했다.

연주자는 침묵을 유지하지만 관객은 무언가를 듣는다.

오늘날에도 많은 음악인이 전 세계 곳곳에서 존 케이지의 '4분 33초'를 무대에 올린다.

관객이 공연 동안 어떤 소리를 들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히 어떤 일은 일어나게 마련이고, 사람들은 무언가를 듣게 된다.

마치 한 치 앞도 내다보기 힘든 인생처럼. 케이지의 '4분 33초'는 우연이 전부일지도 모르는 우리의 삶을 닮은 음악이다.



◆ "나는 낡은 생각이 두렵다"

현대 예술의 대부 뒤샹(왼쪽)과 체스를 두는 존 케이지. 존 케이지는 음악계의 뒤샹으로 불릴 만큼 현대 예술가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사진 제공=존 케이지 재단

"정신병자들이 탈출했다.

" 1962년 서독 언론이 '플럭서스' 예술가들이 벌인 페스티벌을 두고 이같이 논평했다.

당시 독일은 전위 예술 성지였다.

독일에 모인 예술가들은 플럭서스라는 그룹을 만들었다.

그들은 기성세대 예술을 증오했다.

새로운 무언가를 창조하려는 에너지로 들끓었던 그들은 과격한 방식으로 과거와의 단절을 시도했다.

무대 위에서 도끼로 피아노를 산산조각 내는 퍼포먼스는 기본이었다.

플럭서스 예술가들이 활동하던 시기, 케이지는 이미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예술가였다.

플럭서스 멤버들은 사실상 케이지의 자식들이었다.

플럭서스 자체가 케이지를 정신적 스승으로 삼는 예술가들의 집합체였다.

플럭서스 주축 멤버였던 인물이 백남준이다.

그는 케이지 공연을 처음 접한 시점부터 자신의 삶이 새로 시작됐다고 말했다.

그만큼 케이지를 숭배했다.

미디어 아트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백남준의 실험 정신은 케이지에게서 배운 것이다.

전 세계 예술가들은 케이지의 전복적인 사고를 배우려 했다.

케이지는 현대음악을 넘어 현대예술의 아이콘이 됐다.


수백 년 동안 위대한 음악가들은 피아노 악보와 씨름하며 혁신을 거듭했다.

그런데 케이지는 과감히 피아노 뚜껑을 열어 악기 자체를 손봤다.

혁신이 아니라 혁명이었다.

연주가 없는 연주를 내세우며 관중의 뒤척거림이나 자연의 소리마저도 음악으로 여겼다.

케이지는 스승이 경고한 대로 종종 난관에 부딪혔다.

그럴 때마다 세상이 상상하지 못했던 각도에서 문제를 바라보고 돌파구를 마련했다.

물론, 케이지의 실험은 낯설었다.

많은 사람이 손가락질했다.

하지만 변화의 시작은 항상 그랬다.

수백 년 전 "지구는 둥글다"고 주장했던 과학자는 화형에 처할 뻔했다.

"여성에게도 선거권을 달라!"고 외친 여성은 과격한 주장을 펼쳤다는 이유로 단두대에서 목이 잘렸다.

'하늘을 나는 기구'를 만들겠다고 나선 형제는 미친놈 소리를 들었다.

시간이 흘러 그들은 모두 승리했다.

전복적인 사람들이 결국 정복한다.

케이지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이 왜 새로운 생각을 두려워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나는 오래된 생각이 두렵다.

"
[조성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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