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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용한 박사의 ‘당신이 모르는 三國志’] (5) 전쟁의 시작 | 동탁은 지방·신진 세력 불러 정계 개편
기사입력 2020-09-18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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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년 낙양(뤄양)에 입성한 동탁은 소제를 폐위하고 헌제를 새 황제로 삼았다.


동탁은 황제를 위협하는 최고 권력자가 됐지만 그때부터가 문제였다.

한나라 조정이 정상이었다면 동탁 개인을 조정으로 호출하는 경우는 있어도 동탁이 지배한 병주 유목군단을 입성시키는 어리석은 짓은 절대로 하지 않았을 것이다.

명목상으로 한나라 군대지만 동탁 군대는 이질적인 문화에서 성장한 점령군이나 마찬가지였다.


동탁은 맹수 같은 군대의 배를 채워줘야 했고, 만인이 존중하고 인정하는 지도자가 돼야 했다.

진수가 쓴 정사 삼국지는 동탁이 전자에만 관심이 있고, 후자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듯 묘사했다.

하지만 동탁이 그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동탁은 중앙 정계에 기반이 전혀 없었고 정치 경력 역시 전무했다.

동탁은 자신의 처지를 인정하고 겸허하게 낙양 정치인들의 충고를 받아들였다.


▶널리 인재를 발탁해 쓴 동탁
▷주요 지역에 추천 인사 파견했지만…
당고의 화(박스 기사 참조) 이후 불만에 찬 지방 호족과 억압받던 인재들이 중앙과 전국 각지에 널려 있었다.


동탁은 먼저 중앙 정계에서 인망 있는 인물을 발탁해서 중용했다.

낙양 출신 주밀을 이부상서로 임명하고, 여남 출신 오경을 시중에 임명했다.

이들에게 인사를 맡겨 당고의 화로 쫓겨났던 인물을 고위관료로 등용했다.

이들이 추천한 인사를 화북 지방 주요 지역에 파견했다.

이때 파견한 인물이 한복, 유대, 공주, 장자, 장막 등이다.


동탁은 그가 아니라 원소 등 다른 누가 집권했더라도 시행했을 만한, 그리고 칭찬을 들었을 정책을 펼쳤다.

하지만 상황은 정반대로 전개됐다.

동탁은 원소의 중요성을 알았다.

4대를 걸쳐 집권한 원씨 집안은 전국에 자신의 인맥을 심어 두고 있었다.

기주자사로 파견한 한복만 해도 원씨 집안을 생명의 은인처럼 대하는 인물이었다.


동탁은 원소를 포섭하려고 했다.

하지만 소제를 축출하려는 계획을 밝히자 원소는 바로 기주로 도주했다.

동탁은 원소를 체포하려 했지만, 주밀과 오경 등이 원씨 집안을 건드려서는 안 된다고 반대하면서 차라리 원소를 발해태수로 임명하자고 건의했다.

동탁은 순진하게 이 진언을 받아들였다.

덕분에 황하 북쪽의 동북 지역 허베이성 북부에서 현재 베이징으로 이어지는 모든 지역이 원씨 집안 세력권(원소와 한복)이 됐다.


또 한 명의 기린아가 동탁과 등졌다.

조조는 황건적의 난 때 공을 세워 중앙 정계에 데뷔했다.

‘주머니 속의 송곳’이라고 했던가. 그는 이미 충분히 능력을 증명한 잠룡이었다.

조조는 원소와 친했지만 ‘십상시의 난’으로 애매한 처지가 됐다.

그의 아버지 조숭은 십상시 대부였던 환관 조등의 양자였다.

동탁은 조조를 효기교위로 임명했다.

교위는 녹봉이 2000석으로 군을 다스리는 태수급이다.

동탁은 정치적 곤경에 처한 조조를 구제해주면 감사와 충성을 바칠 것이라고 기대했던 것 같다.


하지만 조조는 아예 변장을 하고 도주하더니 진류(현재의 허난성 카이펑시 동남쪽)에서 군사를 모았다.

그해 연말, 동탁이 하태후와 홍농왕(소제)을 살해하자 조조는 기다렸다는 듯이 거병했다.


▶반동탁 연맹군 형성
▷속전속결 vs 세력 확대
조조의 거병은 동탁의 혁신정치가 전혀 먹히지 않을 것이라 예측했음을 의미한다.

과연 190년 정월, 원소와 그의 동생 원술, 한복, 공주, 유대, 왕광, 장막, 교모, 원유, 포신이 동시에 거병했다.

원소가 연합군 맹주가 됐고 조조는 분무장군이 됐다.

원소는 그렇다 쳐도 나머지 인사는 모두 동탁이 뽑은 주밀과 오경이 추천한 인사였다.


동탁의 약점은 그의 야수 같은 군대였다.

그들은 삼국지연의에 묘사된 것보다 훨씬 강병이었다.

하지만 돈이 많이 들었다.

맹수를 거느리려면 먹이를 쉬지 않고 공급해야 한다.


동탁은 군대 유지를 위해 황실 재산부터 낙양 부호, 일반 주민의 자산을 모두 착취했다.

동탁은 지방과 신진 세력을 불러들여 정계 개편을 이뤘으니 적폐 세력의 징벌과 재산 몰수 정도는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들 고향인 농서나 인접한 유목민 사회에서 이런 행동은 당연한 승자의 권리였다.

하지만 후한은 유목사회가 아니고, 동탁은 몽골 부족장이 아니었다.

변방 사회에서 리더는 적의 사람과 재산을 빼앗아 자기 부족에게 나눠 주는 사람이다.

그러나 한나라 같은 왕조의 지도자는 전 국민의 재산과 생명의 보호자여야 한다.

동탁은 이 부분을 착각했다.


낙양은 경제의 중심이고 전국 유통망 중심이었다.

고관과 부호들은 전국 각지 인맥과 연결돼 있다.

소문은 빠르게 퍼졌다.

이 과정에서 소문은 중국인답게 당연히 통 크게 부풀려졌다.

백성들은 낙양이 혁신가가 아니라 정체성이 의심스러운 인물에게 점령됐다고 생각하기에 족했다.


각지에서 봉기한 군대는 낙양을 목표로 진군을 시작했다.

이들은 대부분 허베이성, 허난성, 산둥성 지역 군현에서 모집한 군병이었다.

연합군이 결성되기는 했지만 이들은 동탁군과 맞부딪히는 것을 두려워했다.

동탁이 신속하게 황제를 장안으로 피신시키고 낙양의 궁실을 불살라버린 것도 한몫했다.

낙양은 개활지에 있어 방어가 어렵다.

반면 산시성 분지 안에 위치한 장안은 고대부터 요충지다.

낙양에서 장안으로 진격하려면 그 유명한 함곡관을 지나야 한다.

이뿐 아니라 만화에서나 볼 수 있을 듯한 칼날 같은 계곡 수십 리를 지나야 한다.

중일전쟁 때 일본군도 뚫지 못했던 곳이다.


연합군은 낙양을 향해 삼각 포진을 하고, 더 많은 지역이 호응하기를 기다렸던 것으로 보인다.

원소다운 전략이었다.

반면 조조는 속전속결을 주장했지만 아무도 응하지 않았다.

화가 난 조조는 단독으로 출진했다.


조조의 1차 목표는 낙양 북쪽에서 정저우로 흐르는 황하를 따라 진군해 성고를 점령하는 것이었다.

북쪽 황하와 동남쪽 소림사가 있는 숭산을 중심으로 산지가 펼쳐져 있는데 그 산지가 황하와 만나는 지역이 성고였다.

조조 계획대로만 성공하면 동탁의 기반인 병주와 낙양의 연결을 끊을 수 있었다.


당고의 화란?
청류파 지식인에 대한 사상 탄압
후한 말기에 접어들면서 외척과 환관이 번갈아가며 권력을 휘둘렀다.

특히 환관의 세력이 커지면서 사대부들의 비판이 잇따랐다.

급기야 166년 사예교위 이응은 태학생들과 함께 파당을 만들어 조정의 정사를 비방한다고 환관들을 고발한다.

그럼에도 환제는 조령을 내려 이응 등 청류파 소속 지식인 200명을 체포했다.

바로 1차 당고의 화다.

167년 영제가 즉위하면서 외척인 두무 등은 이응 등을 기용해 환관을 죽이려 했다.

하지만 사전에 일이 누설돼 두무 등은 모두 살해당하고 이응 등은 금고에 처해졌다.

2차 당고의 화다.

두 차례 당고의 화로 약 100명이 살해되고 600~700명의 청류파 지식인이 금고형에 처해졌다.

금고란 관리의 신분에서 서인 이하 신분으로 강등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당고의 화는 진시황의 분서갱유에 필적한 사상 탄압으로 이후 청류파는 철저하게 탄압을 받아 해체됐다.

이후 후한은 황건적의 난 등을 거치며 급속도로 쇠퇴의 길을 걷는다.


[임용한 한국역사고전연구소장]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076호 (2020.09.16~09.22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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