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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북한 주민은 다릅니까?
기사입력 2021-08-02 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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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에서 백두산으로-5] 난리가 났다.

저녁 7시, 여행 자유화 소식이 전파를 탔다.

채 1시간이 지나지 않아 동쪽 사람들이 서베를린으로 가는 통과지점에 모이기 시작했다.

상부에서 아무런 지침을 받지 못한 인민경찰과 실랑이가 벌어졌다.

인산인해(人山人海), 차량으로 뒤엉킨 동쪽에서 "문 열어라, 문 열어(Tor auf Tor auf)" 함성이 터져나오고, 인민경찰은 선별적으로 통과를 허용했다.


그들이 원한 것은 규제 없는, 조건 없는, 완전한 자유 여행이었다.

힘 싸움이 시작되고 결국 차단문, 차단대가 열어 젖혀졌다.

인민경찰도 손을 놓았다.

터진 둑에서 물 쏟아지듯 서베를린으로, 자유로 돌진이 시작됐다.

오는 이들을 얼싸안고 함께 지르는 환희의 함성이 하늘을 찔렀다.


자정 무렵 모든 통과지점이 열리고, 몇몇은 이미 장벽 위에 올라 춤을 추었다.

동쪽에서 그들을 향해 쏘는 물대포 세례는 오히려 흥을 돋우었고, 이편에서 함께 물세례를 맞는 동서베를린 사람들, 독일민족에게는 축포였다.


믿기지 않았다.

믿을 수 없었다.

1989년 11월 9일 밤, "민족은 하나다"를 절감(切感)했다.

이 상황에서 떠올린 것은 바로 얼마 전의 동독 건국 40주년 기념식이었다.


1985년 소련 공산당 서기장으로 취임한 고르바초프가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를 추진하면서 사회주의 동유럽에도 파고가 들이닥쳤다.

변화의 요구가 물결처럼 번졌고, 동독에서도 시위와 진압이 일어났다.


동독 공산당 서기장 호네커는 단호히 거부했다.

당시 사회주의 제1의 경제강국을 통치했고 통치를 자신했던 그는 자신의 길을 고수했다.


40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동베를린을 찾은 고르바초프는 회고록에서 호네커와 단둘이 만난 자리에서 "삶은 용기 있는 결단을 요구한다.

너무 늦게 오는 자를 삶은 벌할 것이다(Das Leben verlangt mutige Entscheidungen. Wer zu spat kommt, den bestraft das Leben)"라고 변화에의 동참을 권했다고 한다.


호네커는 행동으로 응수했다.

1989년 10월 7일 동베를린 칼-마르크스 광장에서 고르바초프를 바로 곁에, 그 주위에 폴란드의 야루젤스키, 루마니아의 차우체스쿠, 팔레스타인의 아라파트, 북한의 연형묵 등 사회주의 주요 지도자를 연단에 세우고, 그 앞에 군사 퍼레이드를 화려하게 펼쳤다.

참석 동독 주민의 열정적인 환호, 도열하고 행진하는 동독 인민군들의 절도 있는 구호, 군악대의 장엄한 연주 속에 각종 미사일, 탱크, 장갑차 등 지금 보아도 가공할 육·해·공 무기들을 행진시켰다.


"고르비, 보이나, 이게 바로 내가 통치하는 독일민주공화국이야, 저 열광하는 소리가 들려? 내 확고한 지도력을 느낄 수 있어? 변화? 무슨 변화, 나는 내 길을 끝까지 갈 테야"라 속으로 외쳤을 것이다.

이게 끝이 아니었다.


밤에는 다시 수만 명의 군인, 사회단체와 군중들을 동원해 횃불 행진을 벌였다.

캄캄한 밤하늘에 일렁이는 횃불 바다 위 연단에서, 서치라이트 불빛이 뒤에서 그를 비추는 극적인 시각 효과를 연출하는 가운데 호네커는 팔을 내지르며 "독일민주공화국은 100년을 더 갈 것"이라고 외쳤다.


동독 건국 40주년 행사, 연단 앞줄 왼쪽 끝에서 다섯 번째 회색복이 북한의 연형묵이다.

/사진=picture-alliance/dpa

서베를린에서 TV로 생생하게 지켜보며, 수백 년을 더 갈 것이라 말하는 것이 나을 텐데 100년이라 들려 의아했다.

동서독의 방송체계가 달라 시청할 수 없지만, 약간의 조작으로 가능하고, 중고로 구입한 TV에는 이미 그런 기능이 있었다.


호네커를 연호(連呼)하고 행진했던 바로 그 동독 주민과 군인들이 불과 한 달 이틀 후에 서쪽으로 몰려오고 있는 것이다.

호네커가 장악을 호언장담하고 충성스러운 신민(臣民)이라 철석같이 믿었던 바로 그들이다.


무시무시한 비밀경찰 '슈타지(Stasi)'와 세뇌교육으로도 그들 마음속에 무엇이 불타고 있었는지, 무엇을 열망했는지 그는 결코 몰랐다.

알 수 없었다.


1989년 여름부터 시작한 변화 요구가 한순간에 폭발한 것이다.

40년간 공산당 독재 속에서 체제가 주장하는 국가의 주인이 아니라, 억압받고 굴종당했다는 인식이 드디어 결단과 행동으로 나타났다.


그들의 외침, "Wir sind das Volk"는 "우리는 국민이다"가 아니다.

"우리가 바로 그 국민이야, 너희들이 아니라 우리가 바로 국가의 진정한 주인이야, 우리가 주인이 되는 그런 국가를 원한다"는 부르짖음이었다.

난공불락의 여리고성이 나팔 소리와 함께 무너졌다면, 베를린장벽은 "Wir sind das Volk"로 무너져 내렸다.


장벽이 무너지고 통일이 되기 이전 1990년 2월 28일 동독이 발행한 “Wir sind das Volk” 기념 초일봉피(初日封皮). 동독 변혁 운동의 출발점이었던 라이프찌히 성 니콜라이교회 모습과 소인이 찍혀있다.

/ 사진=손기웅

베를린장벽과 접경선 개방 5주년을 맞아 통일된 독일이 1994년 11월 9일 발행한 초일봉피(初日封皮). 동독 국민차 ‘트라비(Trabant)’가 매연을 뿜으며 서쪽으로 몰려오고 있다.

/ 사진=손기웅

2015년 10월 10일 김정은은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당 창건 70주년 행사를 호네커와 같은 형식으로 화려하게 펼쳤다.

바로 곁에 중국의 류윈산 정치국 상무위원을 세우고, 군중들이 외치는 열렬하고 광적인 환호 속에 대륙간탄도탄, 신형 방사포, 핵 배낭 등 가공할 무기들을 행진시켰다.

밤에도 횃불 군중 시위를 펼쳤다.


근 30년 동안 만난 수많은 북한이탈주민의 100%가 동독은 북한과 다르다, 자신들이 얼마나 통제받고 억압당했는지 모를 것이다, 그곳에서 변화의 움직임이란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여러분의 삶을 직접 체험하지 못했으니 여러분의 말을 존중합니다.

그러나 북한이 통제와 억압과 세뇌 방법을 어디서 배웠을까요? 소련과 동독 멀리는 나치가 아닐까요? 소련에도 KGB, 동독에도 Stasi와 같은 비밀경찰이 있었고,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세뇌 교육도 있었습니다.


그랬음에도 그들은 변화를 요구하고 몸을 일으켰습니다.

동구 모든 사회주의국가의 변화가 위로부터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국민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 변화를 요구하고 행동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땅에 와서 누리는 이 자유와 민주, 인권과 복지를 우리도 30년 전에는 꿈꾸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해냈습니다.


북한 주민도 그러할 것입니다.

그 지독하고 폭악한 일제식민지 시기에도 한반도 전역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던 우리 민족입니다.


인간은 똑같습니다.

같은 인간으로 태어나 남과 같이, 남 이상으로 잘살고 싶어합니다.

북한 주민도 우리와 같은 인간입니다.


그들이 눈과 귀를 열어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이 좋고 나쁜지를 느끼고 깨닫는다면, 아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옳고 좋은 것을 얻기 위해,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누리기 위해 그들 역시 행동할 것입니다.

그것이 역사 발전이었고, 역사입니다"라고 말해준다.


김정은을 향해 눈물을 줄줄 흘리며, 충성을 포효하는 북한 주민 마음속에도 더 많은 자유와 민주, 더 나은 인권과 복지, 같은 인간으로서 인간답게 살고 싶은 욕망이 일렁이고 있음을 믿는다.

무엇보다 중요한 일은 그들의 눈과 귀를 열어주는 것이다.


북한 주민 여러분, 무엇을 열망하고 있습니까?

독자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변화를 거부한 호네커는 장벽 붕괴 직전 권좌에서 쫓겨나 망명지 칠레에서 1994년 5월 29일 사망했다.

차우체스쿠는 도망치다 잡혀 1989년 12월 25일 생중계되는 가운데 부인과 함께 총살당했다.


문재인정부는 한반도에서는 물론 타국에서도 북한 주민에 대한 자료·정보의 유입을 통제하려는 '대북전단살포금지법'을 통과시키고 처벌하고 있다.


브란덴부르크 개선문으로 급히 달려가느라 카메라가 없어, 가족과 다시 찾은 베를린장벽. 장벽에 올라가지 못하도록 인민군이 통제하고 있다.

/ 사진=손기웅


[손기웅 한국평화협력연구원장/전 통일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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