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금융 시스템은 지난 수십 년간 급격한 성장을 이루었지만, 채권 시장의 발전은 상대적으로 더딘 편이다.
한국은 강력한 경제 기반과 활발한 주식시장을 보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채권 시장이 충분히 성장하지 못하면서 금융 생태계의 다양성이 제한되고 있다.
현재 한국의 자금 조달 구조는 주식시장과 은행 대출 중심으로 이뤄져 있으며, 이는 기업과 투자자 모두에 충분한 선택지를 제공하지 못하는 한계를 갖고 있다.
국제 금융시장을 살펴보면 성숙한 경제는 대체로 견고한 채권 시장을 갖추고 있다.
미국·유럽·일본 등 주요 선진국은 주식시장 못지않게 다양한 채권 상품을 통해 자본을 효율적으로 배분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금융시장의 안정성을 높이고 있다.
특히 미국 사례를 보면 20세기 후반 금융을 혁신하며 현대적인 채권 시장을 구축했고, 이를 통해 경제 성장과 기업 금융의 발전을 이끌었다.
한국도 이러한 해외 사례를 참고해 채권 시장을 보다 체계적으로 성장시킬 필요가 있다.
아시아 금융위기의 유산
한국 채권 시장이 발전하는 데 있어 큰 장애물 중 하나는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의 후유증이다.
당시 한국 경제는 단기 외채에 과도하게 의존하고 있었으며, 부실한 기업 지배구조와 불투명한 금융 관행이 만연했다.
이러한 취약점이 금융위기 속에서 드러나면서 한국은 심각한 채권 시장 붕괴와 외환위기를 경험했다.
이러한 위기는 한국 금융 시스템에 깊은 상처를 남겼고 정부와 금융기관, 투자자들 사이에서 극도의 위험 회피 성향을 낳았다.
이후 한국은 금융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강력한 규제 체계를 도입하고 기업 지배구조 개선과 리스크 관리 강화 등 개혁을 추진했다.
그러나 여전히 채권 시장 활성화에는 보수적인 태도가 유지되고 있으며, 이는 시장의 역동성을 저해하는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작용하고 있다.
아시아 금융위기 이후 한국 금융당국과 기업들은 부채 조달에 신중한 태도를 유지하면서 은행 대출 중심의 자금 조달 방식을 선호하게 됐다.
이에 따라 한국 채권 시장은 상대적으로 위축됐고, 이는 금융 생태계의 다변화를 가로막는 요인이 되고 있다.
이제는 보다 개방적이고 혁신적인 금융 정책을 통해 채권 시장의 새로운 성장 기회를 적극적으로 모색해야 할 시점이다.
채권 시장의 중요성
채권 시장은 성숙한 경제 시스템의 핵심 요소이며, 효율적인 자본 배분을 가능하게 하는 중요한 금융 메커니즘이다.
채권 시장이 성장하면 금융시장의 안정성이 높아지고, 기업과 투자자 모두에 더 많은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
첫째, 기업들이 은행 대출 외에도 채권을 통해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 선택지가 늘어난다.
이는 기업들의 금융 비용 절감과 자본 구조 개선에 기여할 수 있다.
둘째, 투자자들에게 보다 다양한 투자 옵션을 제공해 금융시장의 유동성을 높일 수 있다.
셋째, 정부와 공공기관 역시 채권 발행을 통해 인프라스트럭처 투자와 공공 프로젝트에 필요한 자금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다.
2015~2024년 10년간 미국 S&P500지수는 연평균 13.1%의 수익률을 기록했다.
같은 기간 한국 코스피는 배당수익을 포함하더라도 연평균 4.8%에 그쳤다.
이런 가운데 채권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조용하지만 확실한 수익을 제공하는 대안 자산으로 평가받는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2015~2024년 10년 동안 미국 투자등급 회사채는 연 2.4% 수익률을 기록해왔다.
같은 기간 한국의 투자등급 회사채는 이보다 높은 연 2.7% 수익률을 제공했다.
이는 예금 금리를 상회하는 기대수익으로 투자자의 관심을 끌고 있다.
특히 금리 인하 시 자본차익까지 기대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면서 채권은 단순히 보수적인 자산을 넘어 '전략적 대안 자산'으로 부상하고 있다.
시장 일각에서는 "고금리 환경에서 레버리지를 활용하기 어려운 주식이나 부동산보다, 리스크를 관리하면서 수익을 확보할 수 있는 채권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고 평가한다.
한국 채권 시장 규제 문제
한국의 금융 규제는 투자자들이 채권 시장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아직 어렵게 만들고 있다.
특히 부실 자산 처리와 관련된 명확한 법적 절차가 부족해 채권 투자자들에게 높은 불확실성을 초래하고 있다.
반면 미국은 파산법(Chapter 11)을 기반으로 부실 자산에 대한 구조조정 절차를 명확히 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투자자들에게 예측 가능한 환경을 제공한다.
한국도 보다 명확하고 안정적인 법적 체계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
미국과 한국의 채권 시장 제도는 구조적으로 차이가 있다.
예컨대 애플은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의 선등록 제도(Shelf registration)를 활용해 사전 등록만으로 신속하고 반복적인 채권 발행이 가능하다.
또한 파산법 아래에서는 채권자위원회, 회생전용지원(DIP금융) 같은 절차를 통해 이해관계 조율이 제도적으로 체계화돼 있다.
반면 한국에서는 채권 발행 시 상대적으로 더 많은 개별 인가 절차가 요구되고, 발행 유연성도 제한적이다.
부실기업 구조조정 과정에서도 법원의 재량이 커서 결과의 예측 가능성이 낮고, 채권자의 손실 위험이 크다.
올해 회생을 신청한 홈플러스 사례처럼 실제 손실이 발생한 경험은 시장 전반의 보수적 투자 성향을 강화시켜왔다.
또한 한국의 금융 규제는 유럽식 모델을 따르고 있어 차입자 보호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는 한편으로는 건전한 금융 관행을 유지하는 데 기여할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채권 투자자들의 권리를 상대적으로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러한 법적 불균형은 투자자들에게 추가적인 위험을 부과하며, 채권 시장의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성장 기회와 글로벌 협력의 필요성
최근 글로벌 고금리 환경은 한국 채권 시장의 확장에 유리한 조건을 조성하고 있다.
또 주식시장과 은행 대출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려는 움직임이 증가하면서 채권 시장의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고 있다.
한국은 주요 자본 수출국으로서 해외 금융시장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국민연금공단·한국투자공사 등 대형 기관투자자들은 해외 채권 시장에 대규모 투자를 하고 있지만, 이러한 투자가 국내 금융 생태계에 미치는 긍정적인 효과는 제한적이라는 한계가 있다.
이러한 점에서 한국 자본 시장이 나아가야 할 방향은 크게 네 가지다.
첫째, 채권이 안정적인 투자 수단이라는 점을 데이터로 입증하고 인식할 필요가 있다.
부동산 시장과 주요 채권 지수의 지난 10년간 변동성을 비교하거나, 국채·AAA등급 회사채·부동산 등의 장기 수익률과 리스크를 분석한 데이터를 활용해 채권 투자에 대한 대중의 이해를 높여야 한다.
이러한 정보가 '코스닥 박스권 횡보'와 같은 개념처럼 일반적인 상식이자 대화의 주제가 될 필요가 있다.
글로벌 채권 시장 규모를 보면 한국의 시장이 상대적으로 얼마나 작고 얕은지 알 수 있다.
세계경제포럼에 따르면 2022년 미국 채권 시장은 51조달러, 중국은 21조달러, 일본은 11조달러 규모였으며, 한국은 2조달러에 불과했다.
기업 채권 비중에서도 미국은 10조달러, 중국 6조달러, 한국은 약 1조달러에 그친다.
둘째, 규제 개선을 통해 국내외 기관투자자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국내 채권 시장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현재 국내 금융 규제는 기관투자자의 채권 투자 자율성을 일정 부분 제한하고 있어, 기관들이 국내 채권 시장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따라서 기관투자자들이 보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국내 채권 시장에 참여할 수 있도록 금융 규제를 개선하고, 장기 인프라 채권 발행 활성화 등을 통해 시장의 유동성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
셋째, 글로벌 채권 시장과의 연계를 강화해야 한다.
현재 국내 채권 시장은 규모에 비해 유동성이 낮고 투자자층이 제한적이기 때문에 글로벌 투자자의 참여 없이는 깊이 있는 성장이 어렵다.
이를 위해 세제 혜택, 외환거래 절차 간소화, 신용평가 제도 정비 등 정책적 개선이 필요하다.
특히 최근 10년간 글로벌 채권 시장에서 영향력을 키워온 월가의 한국계 금융 전문가들과 협력해 한국 채권 시장의 발전을 도모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개인투자자의 참여를 확대할 수 있는 투자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국내 개인투자자들은 주식과 부동산 투자에 집중하는 경향이 강하다.
채권 시장을 보다 친숙하고 매력적인 투자처로 만들기 위해 채권 상장지수펀드(ETF), 리테일 채권 상품 개발 및 세제 혜택 강화를 추진할 필요가 있다.
또한 투자자 교육을 확대해 채권이 안정적이고 예측 가능한 수익을 제공하는 수단이라는 점을 강조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한국 채권 시장이 성숙하고 다변화된다면, 한국 금융 생태계는 더욱 경쟁력을 갖추고 국제 금융시장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규제 개혁, 금융 교육 강화, 글로벌 협력 확대 등 다양한 노력이 필요하며, 이를 통해 채권 시장을 금융 시스템의 핵심 기둥으로 발전시킬 수 있다.
마크 김
회원 수 약 3500명에 이르는 뉴욕 최대 한인 네트워크인 한인금융인협회(KFS) 회장이다.
한국과 미국 간 금융 가교 역할을 충실히 한 공로로 미국 시민권자 최초로 한국 경제부총리 표창을 2023년 받았다.
뉴욕 소재 투자자문사인 앵커리지캐피털 투자운용역 상무로 재직 중이다.
KFS는 매일경제와 매년 가을 뉴욕에서 한인 대학생 월가 취업 멘토링 'K-월스트리트 플랫폼'과 한미 금융 빅샷들이 참가하는 '글로벌금융리더포럼'을 함께 개최하고 있다.
[마크 김 뉴욕 한인금융인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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